율곡길(坡州)
평화누리길 9코스 율곡길은 19km로 율곡습지공원에서 시작하여 전진교->두포리->파평면행정복지센터->자장리마을회관->율곡수목원까지 걷는 길이며, 율곡습지공원인 여기서부터 평화누리길 9코스 율곡길의 시작점이다.
드넓게 펼쳐진 코스모스의 꽃말은 ‘소녀의 순정’이란다. 코스모스가 가을바람에 한들거리는 모습이 소녀가 가을바람에 수줍음을 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유래되었다고 한다. 신이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제일 처음 만든 꽃으로, 처음 만들다보니 모양과 색을 요리조리 다르게 만들어보다가 지금의 하늘하늘하고 여러 가지 색을 가진 코스모스가 만들어졌다는 전설이 있다.
코스모스는 왜 가을에 꽃이 피는가? 코스모스는 단일식물(낮의 길이가 짧아지는 때에 꽃이 피는 식물)이다. 따라서 하지가 지나면 낮의 길이가 짧아지고 꽃눈형성호르몬의 분비가 많아지게 되어 꽃눈이 나오고 꽃이 피게 된다. 그러나 코스모스는 씨가 발아하기 위해 25℃ 이상으로 기온이 높아야 한다. 다른 식물에 비해 늦게 싹이 나와 자랐기 때문에 꽃을 피울 만큼 자라려면 시간이 걸리게 되므로 가을에야 꽃이 피게 된다.
수줍음을 타는 소녀인 코스모스는 쌍떡잎식물이고 통꽃이다. 멕시코 원산의 1년초로서 관상용으로 널리 심고 있으며 높이 1~2m이고 털이 없으며 가지가 많이 갈라진다. 잎은 마주나고 2회 깃꼴겹잎으로 갈라지며, 갈라진 잎조각은 선형 또는 바늘모양이고 잎의 길이와 폭이 비슷하다.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장승배기로 394에 위치한 율곡수목원은 식물유전자원의 보전과 증식, 전시를 위해 조성된 곳으로, 시민들에게 다양한 산림문화, 휴양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사계정원, 침엽수원, 암석원, 유실수원, 사임당숲 등의 아름다운 전시원 관림이 가능하며, 다양한 숲체험도 가능하다. 유아를 대상으로 한 유아숲체험과, 남녀노소 누구나 가능한 산림치유프로그램이 있다. 수목원을을 감싸는 둘레길은 5km 길이로 전망대, 솔향기길, 문바위 등 다채로운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또한 북쪽으로는 임진강, 동쪽으로는 파평산, 감악산 등 산자수명한 명산을 한눈에 조망이 가능하며, 율곡이이와 황희선생 유적지와도 가까워 연계하여 관광이 가능하다.
일곱명의 손주들 중에서 서열상 여섯번째인 일곱살 손자인 민수와 더불어 율곡정원을 걸으며 율곡 이이선생을 이야기한다. 아직은 초등학생도 아닌 유치원생과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대화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할아버지와 손자가 이런 시간을 갖는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너무나도 소중한 교훈을 남기는 시간이 되었다.
율곡수목원이 위치한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는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자 정치가인 율곡 이이의 본가가 있던 곳으로 그의 생애와 관련이 깊은 곳이다. 율곡 이이는 13세로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을 차지해 ‘아홉번 장원급제한 분’이라는 뜻의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율곡수목원 구도장원길은 청소년들에게 꿈을 갖게 하고 충효의 정신과 호연지기를 기르도록 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총 2700m 거리의 율곡수목원 산책로에 율곡 이이의 생애와 사상 등을 5개 테마로 ▲나도밤나무 길(800m) ▲자경문 길(400m) ▲격몽요결 길(400m) ▲십만양병길(400m)▲삼현수간길(700m)로 조성한 이야기길이다. 특히 사방이 트여 임진강 물줄기를 볼 수 있는 전망대에는 장원종을 설치해 청소년과 시민들의 소원성취를 기원하는 특별한 장소로 만들 계획이며, 더불어 율곡 이이의 스토리텔링과 함께 산림치유프로그램도 진행될 예정이란다.
율곡선생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경세가로 선대의 세거지인 파평면 율곡리에서 성장하였고, 법원읍 동문리 사적 제 525호인 파주이이 유적지에는 이이선생의 묘가 있다. 아명은 현룡, 자는 숙헌, 호는 율곡, 석담, 우재 본관은 덕수, 판관 의석의 증손이고 사헌부감찰 원수의 아들로 1536년(중종 31)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율곡을 낳던 날 밤 꿈에 검은 용이 바다에서 침실로 날아와 아이를 안겨주는 것을 보았다 하여 어릴 때 이름을 현룡이라고 하였다. 산실은 몽룡실이라 하여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그의 생애와 관련이 깊은 지역이 세 곳이 있는데, 첫째는 그가 태어난 외가가 있었던 강원도 강릉의 오죽헌이고, 둘째는 처가가 있었던 황해도 해주의 석담, 그리고 셋째는 덕수 이씨 가문의 세거지이면서 그가 성장했던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이다. 특히 그의 호 율곡은 파주의 율곡촌에서 유래된 것인 만큼 그의 생애에서 파주와의 관련성은 대단히 크다.
어려서부터 대단히 총명하여 이미 3세에 글을 읽었고, 1543년(중종 38)인 8세 때 "화석정시"와 1545년 10세 때 "경포대부"를 지었으며, 1548년(명종 3) 13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초시에 합격하였다. 파평면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은 5대조인 강평공 명신이 1443년(세종 25)에 세운 뒤, 증조부인 의석이 증축하였는데, 율곡이 어린시절 학문을 익히고 관직에서 물러나 후진을 양성하던 곳으로 그의 학문과 사상의 형성에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1551년 16세 때 모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치른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서를 연구하다가 1년 만에 하산하여 강릉 외가에서 '자경문'(스스로 경계하는 글)을 좌우명으로 삼고 공부에 전념하였다. 1557년(명종 12)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과 결혼하였고, 이듬해 당시 이름을 떨치던 성리학자 퇴계 이황을 경상북도 예안으로 찾아가 이기론에 관해 토론하였다.
당시 퇴계는 "후배가 두렵다는 말이 옛 말이 아니로구나."라고 하면서 그의 재능에 탄복하였다. 1561년 부친상을 당하고, 1564년 7월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한 후 이어 진사시에도 합격하였으며, 그해의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구도장원공'(아홉 번 장원한 인물)이라고 일컬어졌다.
과거시험에서 율곡이 지은 "천도책"은 그 당시 시험관들로 하여금 경탄을 거듭하게 만들었다. 1564년 호조좌랑이 된 것을 시초로 1565년 예조좌랑, 이듬해 사간원정언. 이조좌랑을 역임하면서 마음을바로 하여 정치의 근본을 세울 것, 귀천을 가리지 말고 어진 이를 기용하여 조정을 맡길 것, 백성들을 편안케 하여 나라의 기반을 튼튼히 할 것 등을 상소하였다. 구도장원의 기를 받아 민수가 앞으로 치뤄야할 수 많은 시험에 장원 합격을 기원하며 조손이 함께 장원종을 울렸다.
1577년 해주 석담을 내려가 생활하면서 '격몽요결'을 저술하고, '해주향약'을 만들어 마을의 폐습을 바로잡았으며 사창제도를 실시하여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특히 초학자를 위한 입문서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격몽요결은 실제 생활을 토대로 하는 실천철학서이며 교육입문서로서 조선사회에서 '소학'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혀진 서책중의 하나였다. 애매하고 몽매한 것은 쳐서 없앤다는 제목처럼 격몽요결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충. 효.학. 행을 강조하며, 일상생활에서 도리를 터득하여 실천하려는 목적으로 저술된 것이었다. 1583년에는 시국에 대한 '육조계'를 올려 당시의 여러 폐단을 시정코자 하였다.
격몽요결의 내용은 불필요한 관직을 없앨 것, 지방의 여러 고을을 병합하여 행정을 간소화할 것, 생산을 장려할 것, 황무지를 개간할 것, 백성들에게 과중한 부담이 되는 공납에 대한 법규를 개정할 것, 공사노비들에게도 속량할 수 있는 기회를 줄 것, 성곽을 보수할 것, 군인의 명부를 정확히 파악하고 기재할 것 등으로 사회개혁을 통해 국가와 민생의 안전을 추구하였다.
이때 선조에게 "지금 나라의 기세가 떨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10년 안에 반드시 나라가 무너지는 큰 화를 만나기가 쉬울 것이니, 10만 명의 병사를 기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라고 상소하여 10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무렵 동인들로부터 탄핵을 받고 사직하게 되었다. 그 당시 활 잘 쏘는 사람을 뽑아 북방의전쟁터로 보낼 때에 군마가 부족하여 말을 바치는 노약자에게 군역을 면제해 주는 제도를 마련하였다. 이것은 말을 준비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당시의 탄핵 내용은 그같은 일을 임금의 재가없이 함부로 했다는 것과, 그가 임금의 부름을 받고 입궐할 적에 누적된 피로로 승정원에 이르지 못하고 병조로 들어가 누워있었는데 그것은 율곡이 권력을 잡아 교만해진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때 박순과 성혼이 상소하여 변호했으나 양사에서 합동으로 다시 탄핵하자 태학생 및 호남과 호서의 유생 800여 명이 그 부당함을 극력 상소하여 오히려 동인의 박근원 등이 유배되었다. 그의 정치이념의 기초는 왕도정치, 인정에서 출발하는 애민정치였다.
그는 만언봉사에서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변할 수 없는 것은 왕도이며 인정이다."라고 하면서 "임금은 나라에 의거하고 나라는 백성에게 의거한다. 백관을 창설하고 여러 직책으로 가른 것은 오직 민생을 위해서이다."라고 하여 민본정치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봉건적 모순과 폐해를 비판하고 개혁할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그는 1569년 저술한 동호문답의 '논안민4년에 상소한 만언봉사에서도 상하가 서로 믿는 성실이 없는 것과 . 신하들이 일을 책임지는 성실이 없는 것 등 7가지의 병폐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율곡은 이러한 폐단이 만연된 당시의 사회를 변법사상에 기초하여 개혁하고자 하였다. 법의 개정에 반대하는 당시의 보수적 집권층과는 달리 시대의 상황에 따른 법의 역사성을 강조하였다. 어떠한 제도라도 오래 지나면 폐단이 일어나게 마련이며 조정의 성법이라도 폐단이 생기면 고치는 것이 당연하다는 입장이었다. 또한 정치는 시의를 반영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에 따라 시의적절한 제도를 새로 마련하여 백성을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시대에 따라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을 창업과 수성, 그리고 경장의 과정으로 나누어 논하면서 당시의 사회를 경장기로 보았다.
민생의 어려움이 극에 달해 있는 당시에 상황을 직시하였으며 변법과 개혁을 통해 국가의 쇄락을 막을 것을 주장하였다. 구체적으로 그는 변법사상에 기초하여 조세법. 공물법. 노비법. 적서차별법 등의 각종 법규를 실정에 맞게 고칠 것을 내세웠다. 이이의 사회. 정치적 견해에서 중요한 것은 국방론이다. 집권통치자들이 태평성세만을 노래하면서 국방에는 전혀 관심을 돌리지 않고 있는 당시의 형편을 통탄하는 동시에 적극적인 국방론을 제기하였다.
그는 국방을 강화하기 위한 선결조건으로 백성들의 생활을 안착시키는 것을 내세웠다. 또한 유사시에 대비하여 10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당시의 국제정세를 볼 때 우리나라의 세력이 매우 약하여 10년 이내에 국가에 화가 있을 것을 예측하였다. 따라서 미리 10만 명의 군사를 양성하여 서울에 2만, 각 도에 1만 명씩 배치하되 군사에게는 호별세를 면해주고 무술을 단련시키며 6개월 만에 교대로 서울을 지키도록 하다가 변란이 일어날 때는 10만 명을 합쳐서 지키게 하는 등 위급한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위한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율곡의 10만양병설에 대하여 유성룡 등은 태평한 시대에 병사를 기르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였지만, 10만양병설이 제기된후 8년 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니 율곡의 뛰어난 식견과 예지에 감탄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율곡은 조선 시대 대표적인 성리학자일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을 주장한 대표적인 정치개혁가였다. 대동법의 실시, 사창의 설치 등 사회정책에 대한 획기적인 선견을 제시하기도한 그의 시무논적 경향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율곡의 저술로는 '성학집요', '격몽요결', '소학집주개본', '중용토석'등과 이를 집대성한 '율곡전서'가 있다.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해주 석담의 소현서원, 법원읍 동문리의 자운서원, 강릉의 송담서원, 풍덕의 구암서원, 서흥의 화곡서원, 함흥의 운전서원 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제향 되었다. 1624년(인조 2) 문성이란 시호가 내려졌고, 1681년(숙종 7) 문묘에 종사되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하여 유치원을 쉬며 며칠동안 우리집에서 할머니와 함께 생활했던 민수가 제 부모를 만나 여기 율곡의 숨결이 살아있는 이곳 율곡숲에서 인수인계가 이뤄졌다. 손자를 보내는 마음이 율곡 이이선생을 닮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어우러져 이 가을의 하늘만큼이나 청명하고도 아쉽다.
모르긴해도 오늘이 민수의 생애에서 가장 오래 걸었던 날이 아닐까 싶다. 샌달 신발로 이십릿길도 훨씬 더 되는 머언길을 걸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대견스러운 마음으로 주차장까지 잠깐 업어줬던 그 따스함이 아직도 내 등에 남아있다.
율곡수목원을 감싸는 5㎞ 길이의 수목원둘레길이 있어 전망대, 솔향기길, 문바위 등에서 다채로운 매력을 느끼며 걸었고, 율곡습지공원에서 코스모스 흔들리는 아름다운 길을 3㎞ 이상 걸었으니 아마도 민수는 오늘 차에 오르자마자 잠에 빠질것 같고, 아마도 밤에는 꿈잠을 잘 수 있으리라.
율곡수목원 구도장원길을 거닐며 코로나19로 인해 지친 마음도 치유하고, 민수가 구도장원의 기운을 받아 소망하는 일을 모두 이루기를 기원한다.
율곡 이이는 13세로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을 차지해 ‘아홉번 장원급제 한 분’이라는 뜻의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칭호를 얻었다.율곡수목원 구도장원길은 청소년들에게 꿈을 갖게 하고 충효의 정신과 호연지기를 기르도록 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총 2,700m 거리의 율곡수목원 산책로에 율곡 이이의 생애와 사상 등을 5개 테마로 조성한 이야기길이다.
율곡습지공원은 재해예방시설(저류지)을 마을 주민들이 꽃을 심고 가꾼 곳으로 봄이면 유채꽃이 피고,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피는 아름다운 곳이다. 율곡습지공원은 고향의 정겨운 시골풍경을 떠오르게 하며, 넓은 꽃밭과 습지에 피어있는 연꽃 군락지, 억새, 옛 농기구가 있는 초가집, 높이 솟아 있는 솟대들, 삐뚤빼뚤 재미난 모양의 장승, 물레방아 등이 정감을 자아낸다. 연꽃 군락지에서 시원하게 물을 뿜어내는 분수가 인상적이고, 초가 원두막, 그네 등 곳곳에 쉼터가 있어 쉬어가기 좋다.
아이들과 함께 즐기기 좋은 유아숲체험원은 어린이들이 산림의 다양한 기능을 체험함으로써 자연친화적 정서를 함양하고 전인적 성장을 할 수 있도록 지도∙교육하는 곳으로 파주시에는 4개소가 조성되어 운영 중이며, 율곡 유아숲체험원(파평면 율곡리 95-7번지)과 탄현 유아숲체험원(탄현면 성동리 717번지 일원/통일동산 고산원공원 내), 금촌 유아숲체험원(금촌동 1010번지 일원/쇠재공원 내), 운정 유아숲체험원(와동동1412번지/운정호수공원 내)이 있다.
평화누리길은 2010년 5월 8일에 개장된 길로 DMZ 접경지역의 4개 시군을 잇는 대한민국 최북단을 걷는 길로, 김포시 3개코스, 고양시 2개코스, 파주시 4개코스, 연천군 3개코스 등 모두 12개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총 연장 189km로 1개코스의 길이는 15km 내외이다.
평화의 상징도시 파주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증보문헌비고』라는 책에 나오며, 파주는 본래 고조선의 땅이었다가 삼한시대에 마한에 속했다. 삼국시대에 최초로 파주에 자리 잡은 나라는 백제였으나 고구려와의 계속된 영토싸움으로 475년에는 파주 땅 전체가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그 뒤 신라 진흥왕이 파주를 차지했으며, 세월이 흘러 고려시대의 파주 지역은 무신정변과 깊은 관련을 맺으며, 1170년(의종 24) 정중부를 비롯한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킨 보현원이 바로 옛 장단군 지역이기 때문이다. 파주는 조선시대에 지금의 명칭을 얻었다. 세조(1459년)는 이곳이 왕비의 친정이 있는 마을이었기 때문에 그전까지 원평도호부로 불리던 이 지역을 ‘목’으로 승격시키고 명칭도 파주로 고쳤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