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지점인 미리내 성지(美里川聖地)는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리내성지로 420에 위치한 한국 천주교회의 사적지이며, 본래 경기도 광주, 시흥, 용인, 화성, 안성일대 등 초기 천주교 선교지역을 이루던 곳의 하나이며, 한국교회사 처음의 천주교 사제 김대건 신부의 묘소와 그의 어머니 고 우르슬라, 김대건 신부에게 사제품을 준 천주교 조선 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 그리고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이곳에 안장했던 이민식 빈첸시오 외에도 이름 없는 16명의 천주교 순교자들이 모셔져 있는 곳이다.
시작지점에서 먼저 미리내성지를 둘러 보기로 했다. 성지의 이름인 미리내는 한국의 고유어(순 우리말)로 은하수라는 뜻이다. 이 성지에미리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는 신유(1801년), 기해(1839년) 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으로 숨어들어 옹기를 굽고 화전을 일구며 살았는데, 이들이 피운 불빛이 깊은 밤중에 보면 은하수처럼 보인다는 것 때문이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한자로 미리천(美里川)으로 표기하며, 이를 산촌의 이름을 따서 미산리(美山里)라고 명명하게 되었다.
9월의 높고 파아란 하늘빛과 어우러진 예수님 조형물에 새겨진 마태복음 11장 28절"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그 앞에 서니 경건함과 평온함을 동시에 갖게 됨을 온몸과 맘으로 휘감아 느낀다.
김대건은 페레올.다블뤼 두 신부를 데리고 충청남도 강경을 거쳐서 중국에서 귀국하였다. 그는 지방전도에 나서 10년 만에 고향에서 어머니를 만났으나, 아버지는 순교한 뒤였다.1846년 최양업과 다른 신부의 입국을 위하여 비밀 항구를 찾다가 체포되었는데, 서울로 끌려와 40회에 걸친 문초를 받고 9월 새남터에서 순교(당시 26세)하였는데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참수하여 군문 효수할 것인데 헌종이 편법을 써서 효수하지 않고 매장하게 하였는데 매장 40일 후에 양성면 미리내에 사는 이민식 씨에 의하여 밤으로 7일에 걸쳐 운구하여 현재 미리내묘지에 안장하였으며, 1925년 7월 5일 로마교황 비오 XI세로부터 복자위에 올림을 받았고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우리 나라에 와서 직접 거행한 시성식에서 카톨릭의 성인 자리에 올랐다.
경당에는 현재 모두 여섯 분의 묘소와 함께 김 신부의 하악골(아래턱뼈)을 모셨다. 다른 유해는가톨릭대학교 신학 대학(성신 교정) 성당 안에 안치돼 있다. 김 신부의 묘역에는 한국 천주교의 3대 주교인 페레올주교와 미리내의 첫 주임신부인 강도영 마르코 신부, 3대 최문식 베드로 신부 등의 유해가 석관 속에 안치되어 있다.
김대건 신부는 1822~1846(순조22 ~헌종12)우리나라 최초의 신부로 천주교 성인이며,교명은 앙드레,본관은 김해 김씨로충청남도 당진의 내포에서 독실한 천주교도인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났다.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는'2021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되었다. 2021년은 김대건 신부님 탄생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경당 옆 광장을 확장하고 십자가의 길14처 조각을 세웠으며, 103위 성인 시성 기념 대성당을 완공하여 봉헌식을 가졌다.기념성당 제대에는 성 김대건 신부의 유해 일부가 안치되었고, 2층 전시실에는 박해시대 천주교인에게 사용된 고문 형구와 순교 참상 모형 전시장이 설치되었다.그 후 기념성당과 경당 사이에 성모당이 건립되고,입구에서 경당까지 오르는 길에 웅장한 돌조각으로 묵주기도 길이 조성되었다.
미리내는 1972년부터 본격적인 성역화 작업이 시작되고 1989년에 웅장한 103위 성인 기념 대성전이 완성되었다. 성지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어는 것은 성지 한 가운데 웅장하게 서있는 기념성당이다. 이 성당은 천주교 103위의 시성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고 기념성당 뒤쪽으로 난 십자가의 길에는 예수가 로마병사에게 붙잡혀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받고,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기까지의 과정이 담겨져 있는 청동조각 15점이 서 있다. 김대건 신부의 무덤과 하악골(아래턱뼈)이 모셔져 있는 미리내성당, 김신부의 동상, 성모성당, 게쎄마니 동산(여기저기 나뒹구는 바위를 자연 그대로이용한 동산)등을 돌아보는데 2~3시간이 소요된다.
미리내성지 안에 조성된 골고다 언덕이다. 골고타( Γολγοθα, Golgotha)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처형된 예루살렘 교외의 언덕이다. 현재 그 위치는 분명하지 않으나 예수무덤성당 안에 골고타를 표시하는 곳이 있다. 골고타(히브리어)는 라틴어로 칼바리아이 로쿠스 (Calvariae Locus)라고 하며 이것에서 영어 칼바리(Calvary)가 파생되었고, 해골을 뜻한다. 그 장소는 예로부터 공개 처형장이었다고 하며, 그 이름의 유래는 언덕의 지형이 두개골과 비슷하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또는 근처에 묘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겟세마니(Γεθσημανή, Gethsemani; 기름 짜는 기계를 의미함)는예루살렘의 동쪽, 기드론 계곡을 눈앞에 둔, 올리브산 (감리만)의 서쪽 기슭에 있는 동산으로서 예수는 가끔 제자들과 이 동산에 올라 기도를 드렸다고 전해진다. 특히 겟세마니는 예수가 죽기 전날 밤, 최후의 만찬을 끝내고 제자들과 함께 올라 슬픔과 고뇌에 찬 최후의 기도를 드린 동산으로, 그리고 유다의 배반으로 예수의 체포가 이루어진 장소이다. 겟세마니 기도는 예수의 마지막 기도이다. 여기서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알고 그것을 피하기 원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기도는 아버지의 뜻대로 진행되기를 원했다. 이에 반하여 제자들은 잠을 자고 있었고 예수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십자가의 길이란 바로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타 언덕까지 걸어간 길을 뜻한다. 한국 천주교에서 예전에 '성로선공'이라 불리던 십자가의 길 기도는 성지 예루살렘을 방문한 순례객이 골고타 언덕에 오르며 십자가를 지고 간 예수의 행적을 되짚으면서 바치던 기도였다. 하지만 예루살렘이 이슬람 세력에게 넘어가 순례가 불가능하게 된 뒤부터 성당 내에 마련된 14처를 돌며 기도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나도 역시 경건한 마음으로 엎드려 이나라를 위해 기도했다.
뒷길로 오르는 쌍령산(雙嶺山)은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학일리와 안성시 고삼면 쌍지리 사이에 있는 산을 말한다.높이가 해발 382미터이고 안성시 고삼면에 산 이름에서 유래된 쌍지리에 쌍령마을이라는 지명을 남기고 있다. 산봉우리 두 개가 마주하고 있다고 하여 쌍령산이라고 한다고 하며 본래 양지현 고동면(古東面)의 쌍령리에 있다고『양지현읍지』에 기록되어 있다.쌍령산의 본래 이름은 성륜산(聖輪山)이다. 성륜(聖輪)이란 '성스러운 바퀴'라는 뜻이니 이는 불교의 법륜(法輪)을 뜻하는 말이다. 법륜은 흔히 불교에서 '부처님의 교화(敎化)와 설법'을 가리켜 전륜성왕의 윤보(輪寶)가 산과 바위를 부수고 거침새 없이 나아감에 비유(比喩)하여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이름없는 순교자들의 묘소에 올라서니 하늘위에 성령같은 새의 형상이 나타난다. 참으로 신비스럽다. 뭉게구름 사이로 날으는 이름모를 새의 형상이 하늘에 나타남은 신앙의 선구자이신 이 분들을 하늘에서 지켜주시는 모습같기도 하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라디아서 2:20-21 KRV).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생각하며 기도하는 자세가 된다.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예수의 조형물 앞에서 기도한다. 예수는 구유에서 출생했다는 이야기는 오로지 누가복음서에만 기록되어 있는데, 베들레헴의 그리스도는 그가 태어나게 된 이유를 누가는 인구조사 때문에 예수의 가족이 고향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이라는 마을을 떠나 팔레스타인의 남쪽 지방인 유다의 에루살렘 가까이에 있는 베들레헴으로 갔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나사렛요셉과 예수의 어머니성모마리아가 다윗왕의 후손이기 때문에 다윗 왕의 고향인베들레헴에서 주민등록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하늘을 향하여 기도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따라서 나도 기도한다. 개인적인 소망은 없으니 나와 내 가족을 위한 그런 작은 기도제목이 아니다. 오로지 반만년을 이어온 이 나라의 안전과 번영 그리고 전쟁과 기아가 멈추는 세계 평화를 위한 간절함으로 하늘에 기도한다.
김대건 신부가 미리내에 묻힌 지 50년 후인 1896년 비로소 본당이 설정됐을 때 이곳에는 이미 1천6백여명의 신자가 있었다. 26세의 나이에 처형당한 김대건 신부는 조정에서 장례마저 치루지 못하게 하여 처형당한 지 40일이 지난 다음에야 이민식 빈체시오가 간신히 시신을 빼내어 남의 눈을 피하며 일주일을 등에 지고 이곳 미리내로 옮겨와 안장할 수 있었다.
김대건 신부는 순교한 앵베르 주교의 후임으로 조선교구 3대 교구장에 임명된 페레올 주교와 함께 중국 상하이에서 라파엘 호를 타고 충남 강경을 거쳐 입국했으며 입국 후에는 은이공소(용인)를 중심으로 미사와 고해성사 집전 등을 수행하였다.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신부에게 선교사들이 입국할 수 있는 길을 개척할 것을 지시했다.
김대건은 한국 천주교 최초의 신부이자 순교자이다. 금가항 신학교에서 탁덕(鐸德)으로 승품(陞品), 한국사람으로서는 최초로 신부가 되어 미사를 집전하였다. 충남 강경에 잠입하여 각지를 순방하면서 비밀리에 신도들을 격려하고 전도하였다. 세례명 안드레아. 아명(兒名) 재복(再福)·보명(譜名)·지식(芝植). 충청남도 당진시우강면(牛江面)에서 태어났다. 조부 진후(震厚)가 10년 동안의 옥고 끝에 1814년 순교하고, 아버지 제준(濟俊)도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순교하는 등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7세 때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內四面)으로 이사함에 따라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1836년(헌종 2) 프랑스 신부 모방(P.Maubant)에게서 세례를 받고 예비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상경하였다.
미리내성지에 자리한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 기념 경당’ 명칭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기념성당’(김대건기념성당)으로 변경됐다. 천주교 수원교구는 명칭 변경을 결정한 뒤 전국에 공문을 발송해 이를 고지했다.대건기념성당은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순교 정신을 현양하기 위해 1928년 건립됐다. 전국 성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순례지로, 김 신부 유해 일부와 목관 일부분을 안치하고 있으며 묘소가 바로 앞에 있어 미리내성지 순례의 절정으로 꼽힌다. 한편 미리내성지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 묘소가 있는 박해 시대 교우촌’이라는 명맥을 이어 오고 있다. 이 깊은 산속에 세워진 '103위 성인 시성 기념 대성당'의 웅장함이 놀랍다.
체포된 김대건 신부의 죄목은 '혹세무민'과 '청나라 밀입국' 혐의를 씌웠고 최종적으로는 '천주교를 믿는다'는 죄명으로 사형을 선고받는다. 투옥된 김대건은 관원으로부터 "당신이 천주교인이요?"라는 질문을 받았고 이에 당당히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라고 답했는데 그 대가로 가혹한 취조와 고문을 겪어야 했다. 천주교인에게 사용된 고문 형구와 순교 참상 모형 전시장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곳이다.
점심식사를 위해 찾은 칠곡저수지 풍경이다.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칠곡리에 위치한 저수지이다. 약 170,000 m²면적에 둘레는 약 2Km로 차로 드라이브를 하면 약 7분 정도, 둘레길로 조성되진 않았지만 도로를 따라 걷는 길은 도보로 약 30분 정도 소요된다. 도시인들에게는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물멍하기 좋은 장소이다. 주변에 맛집과 저수지가 한 눈에 들어오는 카페가 있다.
오래 걷다보니 배고픔을 어쩔수 없어서 한정식을 먹기위해 찾은 강남댁이라는 이름의 한상차림 식당인데 풍경이 너무나도 아름답다. 1층에는 단체손님만 선택된 자리에 앉을수 있어서 한가로운 2층에 자릴잡고 앉았는데, 알콜이 묻은 음료를 마시지 않았음에도 그냥 풍광에 흠뻑 취해서 마음이 먼저 비틀거리는 곳이기에 요즘말로 가성비 좋은 곳이다.
내가 이땅에 태어나기 백년전에 남긴 김대건 신부의 마지막 말이다. "나의마지막시간이다다랐으니잘들으시오. 내가외국인과연락한것은나의종교를위해서 이고나의천주를위해서입니다. 이제내가죽는것은그분을위해서 입니다. 나를위해영원한생명이바야흐로시작되려합니다. 여러분도사후에행복하려면천주를믿으시오. (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순교직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