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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청령포(寧越)

영대디강 2023. 5. 21. 05:08

청령포(淸泠浦)는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 산67-1번지 일원에 위치한 국가지정 명승 제 50호이다. 조선왕조 제6대 임금인 단종이 1457(세조3)에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처음으로 유배되었던 곳이 바로 이곳 청령포다. 이곳은 삼면이 깊은 강물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은 절벽으로 막혀 있어서 배로 강을 건너지 않으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유배지로 아주 적합한 곳이다.

주차장 매표소 옥상에서 청령포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본 모습이다. 청령포는 서강이라는 하천이 구불구불 흐르면서 마치 뱀이 기어가는 모습과 같은 곡류(사행천)가 발달한 지역으로, 하천이 곡류하게 되면 곡류하는 안쪽은 물이 흐르는 속도가 느려지고 반대로 바깥쪽은 물이 흐르는 속도가 빨라져서 안쪽에는 자갈이나 모래가 쌓이고, 반대로 바깥쪽은 하천변이 깎여 말발굽 모양의 물길이 발달한다. 

청령포를 향하여 매표소에서 도강하는 배를 타고 잠깐 주변을 돌아보는 시간 약 1~2분이면 곧바로 도착하는 곳이다. 청령포 앞에는 과거 서강이 크게 구부러져 흘렀던 발절리 구하도(舊河道)가 있다. 발절리 구하도는 과거 경작지로 이용되었으나 현재는 공원으로 조성되었으며, 국내에서 대규모의 구하도(옛날에 하천이 흘렀던 길) 형태를 볼 수 있는 자연학습장소이다. 영월 청령포는 어린 나이에 작은 아버지인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의 유배지로, 서쪽은 험준한 암벽이 솟아있고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섬과 같이 형성된 곳이다.

단종은 1457628일부터 두달 동안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그 해 여름에 홍수로 청령포가 범람하여 영월읍 영흥리에 있는 관풍헌으로 옮겨서 유배생활을 했다. 1726(영조2)에는 단종의 유배지를 보호하기 위하여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는 금표비를 세웠고, 1727(영조3) 9월에는 영조가 친필로 단묘재본부시유지비(端廟在本府時遺址碑)'라는 비문을 써서 단종이 살던 집터에 비를 세우고 비각을 건립하였다.

단종이 유배되었던 사적지인 이곳 청령포에 20004월에는 단종이 거처하던 곳에 정면 5칸 측면 2칸 반 규모의 겹처마에 팔작지붕 형식으로 기와집을 복원하였고, 부속건물로 정면5칸 측면 1칸반의 규모로 홑처마에 우진각지붕 형식의 초가집을 건립하였다.

아무리 유배지라지만 한시대의 무소불위 절대권력이었던 임금이셨던 분이 이렇게 좁은 방에서 글을 읽고 쓰시는 모습이 모형으로 남아 있어서 만감이 교차함을 느끼게 한다. 단종은 문종의 장남으로 즉위년(1450) 7월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부왕인 문종이 재위 2년만에 승하하여 그 뒤를 이어 12세의 어린나이에 1452518일 경복궁에서 제6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단종 1(1453)에 숙부 수양대군은 정인지, 한명회 등과 결탁하여 황보인, 김종서 등 단종의 권신을 척살하고 국권을 장악하는 계유정란을 일으켰다. 단종 3(1455)에 임금은 그들의 음모와 위협으로 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청령포의 관음송이다. 이 소나무는 높이 30m로 가슴 높이의 줄기 둘레가 5m이며, 지상 1.2m의 높이에서 두가지로 갈라졌고 갈라진 두 가지의 밑 둘레는 각각 3.3m 2.95m이다. 이 나무의 나이는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왕조 제6대 임금 단종(1441 ~ 1457)이 유배생활할 때에 이 나무의 갈라진 가지 사이에 앉아서 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어서, 이 나무의 나이를 약 600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이 소나무를 관음송이라고 부른 것은 이 나무가 당시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보았다하여 볼관() 임금의 목소리를 들었다하여 소리음()자를 써서 관음송이라고 전한다.

망향탑이다.  청령포 서쪽 절벽인 육육봉과 노산대 사이에 있는 돌탑으로, 어린 단종이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이곳에 올라 한양땅을 그리며 직접 쌓았다는 탑으로, 그 당시 애절했던 단종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다. 이곳 유배지에 머물던 두달동안 쌓았기에 탑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작고 아담한 돌무더기 수준의 돌탑이지만, 한양에 남겨진 부인 정순왕후 송씨를 생각하면서 그리움에 하나하나 돌을 얹어 쌓았다는 망향탑이 남아 있어서,  그 시대의 역사와 문화적으로 가치가 매우 높은 곳이다.

소나무 숲이 절경인 이곳 강원 영월군 청령포 숲은 2004년 제5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공존상(우수상)을 받은 곳이다. 청령포는 조선 제6대 임금인 단종이 유배되었던 애절한 역사가 남아있는 유서깊은 곳으로, 기암괴석의 절벽을 휘돌아나가는 강과 울창한 송림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하고 있다. 이곳 숲 바닥에 질펀하게 앉아서 사람과 숲의 조화로운 공존을 통해 이 아름다운 숲이 다음세대까지 변함없이 영구히 보존되기를 마음속으로 깊이 깊이 기원한다.

이곳은 장릉이다. 장릉은 국가지정 사적 제196호로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90에 있다.  조선왕조 제16대 임금인 단종이 안장되어 있는 능이다. 세조2(1456)에 단종을 복위하려는 그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육신(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사건이 발각되어, 이 사건으로 이듬해 상왕은 노산군으로 강등됨과 동시에 영월 청령포에 유배되었다. 그 해(1457) 가을 금성대군이 중심이 된어 단종을 복위하려는 사건이 다시 일어나자 노산군에게 종사에 죄를 지었다는 구실로 서인(庶人)으로 폐하는 한편 사약을 내리는 등 죽음을 강요하니 1024일 단종은 17세를 일기로 최후를 마쳤다. 단종이 죽자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시신을 거두는 사람이 없었는데, 영월호장 엄흥도가 관을 준비하여 남몰래 지금 능이 있는 이곳 동을지산에 암매장하였다.

그후 중종 11(1516) 우승지 신상이 치제한 이래 25여년 수묘치 않아 폐묘가 된 것을 중종 36(1531) 군수로 부임한 박충원이 애절한 제문을 지어 치묘, 치제하였는데 그 때 지은 제문을 오랜기간 이어왔다. 노산군이 돌아가신 후 224년 만인 숙종 7(1681)에 대군으로 추봉되었으며, 마침내 숙종 24(1698)에는 복위되어 단종이라 하여 종묘에 부묘하고, 능은 장릉이라 하였다. 이 능 양식은 가장 간단하고 작은 후릉석물의 양식을 따랐다. 특히 다른 능과 다른 점은 단종에게 충정을 다한 여러 신하들을 장릉에 배향하여 정조 15(1791) 왕명으로 장릉 밑에 충신당을 설치하고, 정단에는 안평대군 이하 32인 별단에는 조수량등 336인을 배향한 것이다.

정여각은 충절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영조2(1726)에 세운 곳이다. 충신 엄흥도가 영월호장으로 있을 때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 유배되어 관풍헌에서 14571024일 조정에서 내려진 사약을 받고 승하하여 그 옥체가 강물에 버려지자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함께 단종의 시신을 암장하여 충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순조 33년에 공조판서로 추증되었고, 고종 13(1876)에 충의공이란 시호를 받았다

장릉 앞에서 묵념을 한다. 조선왕릉 유일하게 서울 수도권에서 벗어난 비수도권인 강원도에 있는 조선왕릉이란다. 왕릉 주변에는 상석과 망주석이 있으며 문인석, 석마(石馬) 등도 갖추었고 아래쪽에는 엄흥도의 정려비와 박충원의 행적을 새긴 여러 비석들이 있다. 특이점으로는 무인석이 없다는 것인데 이것은 단종이 무신 세력을 등에 업은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했기 때문이라 한다. 또한 조선왕릉 망주석에 세호(細虎) 새겨지지 않은 유일한 왕릉이다.

하늘을 바라보며 충신열사들의 어제를 생각한다. 조선왕릉을 찾아보기 위하여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서울 경기도 시내버스나 수도권 전철을 타고 찾아 있는 접근성이 있지만, 이곳은 조선왕릉 유일하게 서울발 시외버스를 타고야만 있는 유일한 조선왕릉이며 서울 경기도 시내버스나 수도권 전철이 접하지 않는 유일한 조선왕릉이기도 하기에 멀리 이곳을 찾은 내가 더욱 더 감개무량하다.

영월 고씨굴은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김삿갓면 진별리 산262에 국가지정 천연기념물 제219호로 196964일 지정된 석회동굴이다고씨굴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1974515일에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다. 고씨굴의 출입구는 남한강변에 있으며, 동굴의 위치가 해발 약 190m에 높은 곳에 있으므로 이 교량을 통하지 않고는 출입이 불가능하다.

강변주차장에서 바라본 고시동굴 출입교량의 우뚝 솓아있는 모습이다. 입구에 매표소를 만나게 되지만, 이곳도 역시 나이가 많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입장료부담이 없이 그냥 들어가라며 입장권을 손에 쥐어 준다. 괜시리 잘못한 것도 없는데 미안하고 주눅이 든다. 오지인 이곳에서 일하는 분들의 인건비도 만만치 않을텐데 싶어서 입장권을 사려고 카드를 내밀었는데, 얼굴을 보더니만 신분증을 보자며 그냥 입장하시란다.   

동굴 입구에서 머리통에 맞는 화이바(Fiber) 헬멧(helmet)을 쓰고 입장해야하는 이유를 금방 알아냈다. 고씨굴의 총길이는 양 3,3380m로 이중에서 동굴의 중심통로인 주굴은 약 950m, 가지굴은 약 2,430m이다. 이중에서 약 620m 구간이 관광지로 개발되어 일반인에 공개되고 있는데, 걷는 길이 너무 어두우며 비좁고 낮아서 머리통을 여러번 바윗돌에 부딪혔다. 동굴 내부의 기온은 8~16도C이며, 습도는 75~93%이고, 동굴속의 온도는 약 16도C를 유지한다. 이곳 동굴내에는 동굴우렁이류, 엿새우류, 굴접시거미, 갈르아벌레 등 총 8255067종이 확인 되었단다.

고씨굴은 임진왜란때 의병활동을 하던 고종원(1538 ~ 1592)이란 선비가 이 굴에 피난을 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592년 왜군이 조선을 침략하여 일으킨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아우 고종경과 함께 무기를 모으고 사람들을 모아 왜군들과 싸웠다. 하지만 병사들이 전쟁터에서 도망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동생은 사형을 당했다. 고종원은 왜군이 영월지역으로 쳐들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을 데리고 지금 이 굴속으로 피신하였는데, 왜군이 동굴에 불을 피워 산채로 잡으려고 하자 부인은 남편이 도망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기 위해 동굴속 연못에 뛰어들어 자살하였다. 그 후 또다른 아우 고종길과 함께 왜군에게 잡혀 있다가 탈출하였지만, 아우는 왜군에 잡혀 죽음을 당하였다. 전쟁을 치르면서 부인과 두아우를 잃은 고종원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인 1592420일부터 96일까지의 사건을 모두 기록하였다. 이 기록으로 인하여 고종원의 가족이 동굴속에 피했다고 하여 이 동굴을 고씨굴이라 부른다.

동굴 입구에서 바라본 남한강 건너편의 모습이다. 오후 6시까지 관람이 가능하지만 5시에 매표를 마감한다. 입구 건너편에 매표소를 비롯한 자그마한 관광단지가 조성되어 있어서 식음료 구매가 가능하다. 

영월 한반도 지형(寧越 韓半島 地形)은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한반도면 옹정리에 있는 지형이다. 2011 6 10일 대한민국 명승 75호로 지정되었다.  곳을 포함한 일대의 하천은 한반도습지(韓半島濕地)라는 이름으로 2015 5 13일 람사르 습지 등록되었다. 역시 소문난 곳으로 명승이라서 그런지 관람객들이 줄지어 들어서 사진을 남기는 모습이다. 

주차장에서 부터 한반도 지형까지 걷는 길에 태극기 형태로 만들어 놓은 바람개비가 특이하다. 부터 옹정리에서 신천을 고개 넘어 왕래하던 사람들이 보던 풍경이었으나 가치를 깨닫지 못하던 , 쓰레기 매립장 설치 계획을 계기로 1999 12 22 모양을 최초로 인식하게 되어 결국 매립장 계획은 백지화 되었단다. 당시 영월 전역에 동강댐 건설 반대 여론이 크게 일어나던 상황과 절묘하게 맞물려 보존의 길로 들어선 셈이니 태극기가 펄럭이며 돌아갈만도 하다.  

한반도를 닮아한반도 지형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사계절마다 특색 있는 경관을 보여 주는 명승지이다. 영월 한반도 지형은 서강 지역을 대표하는 경관 하나로 평창강 끝머리에 자리 잡고 있으며, 굽이쳐 흐르는 하천의 침식과 퇴적 등에 의하여 만들어진 지형이다. 영월의 명승지를 돌아보며 보낸 하루의 끝자락은 여섯시 내고향에서 소개된 영월 서부시장으로 달려가서, 손주들과 함께 나누며 매콤하게 맛보고 싶은 부꾸미, 빈대떡과 닭강정등을 양손 가득 싸들고 즐겁고 행복한 시간으로 마무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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