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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華城)은 조선 정조 때에 경기도 수원시에 쌓은 성이다. 정조 18년(1794)부터 20년(1796) 사이에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주관 하에 축성하였는데, 근대적 성곽 구조를 갖추고 거중기 등의 기계장치를 활용하는 우리나라 성곽 건축 기술사상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사적 제3호.
수원 화성(사적 제 3호)은 팔달산과 그 동쪽의 낮은 구릉과 평지를 감싸며 쌓은 평산성(平山城:평지와 산을 이어서 쌓은 성)으로 타원형태를 이루고 있다. 성의 전체둘레는 5.744km이고 높이는 4.9~6.2m이다. 정조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 새로운 정치 공간을 마련하게 위해 신도시 화성을 계획하게 되었다. 수원 화성은 당시의 최첨단 과학과 건축술이 빗어낸 역작으로 동양 성곽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화성 건설에 관한 모든 과정은 《화성성역의궤》라는 책에 모두 담겨 있다. 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됨으로써, 한국의 세계적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
수원 시내 한복판을 광범위하게 점하고 있는 수원화성은 우리나라 성곽문화의 백미로 꼽힌다. 우리나라는 물론 외국 성곽의 장점만을 흡수해 완벽하게 건설된 도시 성곽이며, 세계 최초의 계획된 신도시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정조 18년(1794) 2월에 시작하여 2년 6개월 만에 완공을 이룬 수원화성은 당대에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능력과 기술을 집약시켰던 것이다.
성벽은 돌로 쌓았으며 높이는 지형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4∼6m 정도이고 성벽 위에는 1m 정도 높이의 여장을 두고 여장에는 총안을 뚫었다. 성벽은 위로 올라가면서 배가 안으로 들어가는 규형(圭形) 쌓기를 기본으로 했다. 성벽에는 4개의 성문을 두었고 암문 5개를 설치해 통행토록 하였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중앙에는 행궁이 자리 잡았다. 화성이 위치한 지세는 서쪽에 팔달산이 있고 그 반대쪽인 동쪽에도 나지막한 구릉이 있으며 이 동서 경사지 사이를 북에서 남으로 개천이 흐르고 그 주위에 약간의 평지가 펼쳐진다. 화성을 비롯해 우리나라 성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불규칙한 형태로 쌓아나가는 것이 특징이다.
성벽은 화강암뿐만 아니라 벽돌이라는 흙으로 만든 신소재가 함께 사용되었다. 벽돌과 석회를 섞어 성벽을 쌓으면 화포의 강한 충격에도 견딜 수 있어 당시 화력을 바탕으로 한 전투에서 효과적인 방어를 할 수 있었다. 이에 화성 축조이후, 벽돌을 사용한 성벽이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다.
효원의 종이다. 이곳은 정조대왕이 사도세자를 기리며 세운 신도시이기 때문에 효의 도시이며, 이를 기리기 위해 효원의 종을 주조해서 매달아 놓았다. 정조대왕이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을 생각하며 흉내라도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잠시나마 타종의 자세를 취해 본다.
화성 축조는 1794년에 시작됐는데 이듬해에 정조의 생모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 잡혀 있어 행궁을 증축할 필요가 있었다. 행궁의 여러 건물 중 혜경궁 홍씨의 처소로 사용될 ‘장락당’이 제일 먼저 지어졌다. 수원 화성은 정조의 정치력을 높이는 전략적 건축물이자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는 효도의 마음이 담긴 기념물인 셈이다. 애석하게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타거나 사라져 빈 터만 남게 됐다.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면서 지금은 장락당을 비롯해 480칸 이상이 옛 모습을 되찾았다.
수원 화성은 조선시대 수원의 도심 전체를 둘러싼 전체 길이 5.4km가량의 읍성 형태 성곽이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인근으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이름 지은 후 다산 정약용에게 설계를 명령했다. 1792년 초안에서는 성곽의 길이가 4.2km 정도였지만 1794년에서 1796년까지의 축성 과정에서 1km가 늘어났다.
문(門)은 평상시에 출입하는 성문, 적의 눈에 띄지 않는 암문, 물이 흘러가는 수문으로 나뉜다. 대(臺)는 성문의 좌우에 솟아서 적을 감시하는 적대, 장수가 부대를 지휘하는 장대, 깃발을 흔들거나 쇠뇌를 쏘는 노대로 나뉜다. 돈(墩)은 감시를 하거나 포를 쏘는 곳으로 망루와 같은 공심돈, 봉화를 피우는 봉돈이 있다.
화성 성곽은 부드러운 곡선 형태로 이어지며 들쭉날쭉 지어졌다. 화성의 건축 과정을 기록한 비석 ‘화성기적비’에는 “봄의 버들잎 같은 모양으로 지었다”고 기록돼 있다. 팔달산 아래에 유천 즉, 버들개천이라는 지명이 있었는데 정조도 “성벽을 세 번 구부리고 세 번 꺾으면 이름처럼 ‘내 천’자 모양이 됐다”고 평가했다.
누(樓)는 주변을 한눈에 바라보는 각루, 포를 쏠 수 있게 튀어나온 포루(砲樓), 군사들이 몸을 숨길 수 있는 포루(鋪樓)의 3가지로 나뉜다. 이외에도 성벽에 접근하는 적군을 공격하도록 튀어나온 치성(雉城), 군사가 머무르며 기거하는 포사(鋪舍)도 있다. 이처럼 다양한 방어시설을 갖춘 성곽은 우리나라에서 수원 화성이 유일하다.
중간 중간에 설치된 ‘방어시설’이 수원 화성을 기존의 읍성이나 성곽과는 확연히 달라지게 했다. 일반적인 읍성은 야트막한 담장이 이어질 뿐 별다른 방어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와 달리 화성은 100m 간격으로 방어시설을 지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기능을 포함하고 있었다. 화성의 방어시설은 모두 48개소로 문, 대, 돈, 누 등으로 크게 나뉜다.
행궁동 벽화마을은 당초 마을만들기사업의 일환으로 주민들의 동의를 받아 미술작가들이 집집마다 담장에 벽화를 그려 지역 명소로 자리를 잡았다.
수원화성과 한양도성은 크기는 한양도성의 4분의 1정도 밖에 안 되지만 성 내부에 흐르는 하천이라던지(청계천과 수원천) 종로거리가 있고, 궁전이 있는 것까지 비슷하다.
인가라곤 겨우 5∼6호에 지나지 않았던, 200여년 전의 광막한 벌판이었던 수원은 어느 날 갑자기 화려한 도시로 탈바꿈했고, 사통팔달의 교통 중심지로 성장하여 수원특례시를 눈앞에 두고있다. 지구에서 화성(火星)으로 변화한 것 같은 역사이다.
서울의 종로가 지금의 광화문광장 부근인 육조거리에서 시작해 동대문(흥인지문)까지 이어지는 거리라면 수원의 종로는 장안문(북문)에서 팔달문(남문)까지 이어진다. 수원 화성이 축조된 이래 사람들로 늘 북적이던 거리였으며 경기 남부의 상업 중심지로 자리매김한 곳이다.
행궁의 오른편 골목에는 오래된 주택들이 많이 몰려있었는데, 젊은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낡은 주택의 내부를 현대식으로 리모델링하기 시작하면서 거리는 이색적인 카페나 음식점으로 가득한 곳으로 바뀌게 되었다.
화서문(華西門)은 성의 서문이다. 동남으로 행궁과 460보 떨어졌으며, 홍예와 문루의 제도는 모두 창룡문과 같다. 다만 좌우의 돌 계단을 꺾이게 해서 층을 만들었다. 안쪽 좌우의 무사는 아래 너비가 각각 9척이고, 바깥 쪽은 너비가 각각 22척 2촌이다. 홍예문 사이 좌우의 무사는 높이가 각각 18척이고 수문청은 문의 남쪽 가장자리에 있다. 서옹성의 제도는 동옹성과 같은데 높이는 11척, 안쪽 둘레는 76척 정문에서 36척 떨어져 있으며 바깥 쪽 둘레는 110척이다. 안과 바깥 면 모두에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고 외면에는 방안 총혈 19개의 구멍과 활 쏘는 구멍 6개를 뚫었다. 나머지는 모두 동옹성과 같다.
수원 화성의 그 방대한 공사를 2년 9개월이라는 단기간에 끝낼 수 있었던 것은 다산 정약용이라는 젊은 실학자의 역할이 컸다. 그는 화성의 설계를 맡아 전통적인 방법을 기초로 중국을 통해 들어온 여러 서양의 건축을 참고하였다. 화성은 정약용의 설계를 바탕으로 채제공을 비롯한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와 같은 유능한 실학자들의 젊은 패기와 기중기, 녹로와 같은 과학기술이 접목되어 만들어졌다. 당시 건설된 주요시설물로는 문루와 옹성을 갖춘 4대문과 행궁, 암문, 수문, 연못, 장대, 공심돈, 각루, 포루, 봉돈, 궁대, 치성, 용도, 적대 등 48개소이다.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은 화홍문 동쪽 높은 벼랑 위에 세워져 있다. 한국의 건축미와 정자문화를 맘껏 자랑하는 정교하고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정자이다. 동북각루라고도 불리는 이 정자의 이름은 중국 송나라 때 학자이며 시인인 정명도의 시 "운담풍경근오천 방화수류과전천"(雲淡風輕近午天 訪花隨柳過前川, 구름 개어 맑은 바람 부는 한낮 꽃 찾아 나선 길/ 버드나무 따라 앞 개울가를 지나네)에서 딴 것이라 전한다. 정자에는 원곡 김기승(原谷 金基昇)이 쓴 정자 이름 현판이 걸려 있다.
정조는 성곽이 완성되자 화성 축성공사의 전말을 소상히 기록한 보고서를 작성케 했다. 그렇게 작성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따르면 축성 역사에 동원된 공장(工匠)은 1,280명, 연 동원 일수는 37만 6,342일, 축성에 사용된 벽돌은 모두 69만 5,000장이었다. 당시 동원된 공장들에게 생활보장이 넉넉히 될 만큼의 임금이 지불된 사실도 여기서 밝혀지고 있다. 『화성성역의궤』에서 계획, 도제, 의식, 동원된 인력과 경비, 사용된 기계 등 축성의 전말과 당시의 모든 상황을 소상히 알 수 있다. 따라서 『화성성역의궤』는 경제를 비롯한 당시의 사회형편을 연구하고 성역을 보수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료이다.
정조는 수원화성이 완성된 이듬해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니, 이땅에 다시는 정조와 같은 현명한 왕이 출현하지 않았고, 조선은 다시 혼미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수원화성 역시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 오랫동안 방치되었으나 그 아름다운 자태만은 변함이 없다. 누구나 한나절만 할애한다면 유서 깊은 수원화성을 둘러보며 정조대왕의 이상과 꿈의 일면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연무대는 사방이 담장에 둘러싸인, 제법 위엄이 있어 보이는 집 한 채를 만난다. 솟을삼문에 정면 5칸인 잘생긴 기와집인데, 수원화성 동쪽 군사들을 지휘하던 훈련장으로 동장대라고도 한다. 연병장의 지휘본부다. 빈 터에 누각만 남아 있던 것을 1977년 수원화성을 복원하면서 주변의 담장과 석축계단을 옛모습 그대로 복원했다.
본래 수원의 행정청[邑治]은 지금의 수원에서 남쪽으로 약 8㎞ 떨어진 화성군(현: 화성시) 태안면 송산리의 화산(花山) 아래 있었다. 정조는 양주군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이곳으로 이장하면서 수원읍과 민가들을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팔달산 아래 지금의 수원으로 옮기고 읍명을 화성(華城)이라 했다.
여러 기록에는 성벽의 전체 둘레가 8.36㎞에 이른다고 되어 있으나, 실제 둘러보며 만난 수원화성의 안내판에는 5.52㎞라 되어 있다. 아마도 전자는 당초의 성 둘레였을 터이나 차츰 성곽 안팎으로 집들이 촘촘히 들어서고 훼손된 부분을 보수하면서 축소되었는지, 사대문 양 옆으로 끊긴 성곽이 계산되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
조선의 성은 임진왜란(1592)을 맞아 무참히 허물어져버렸다. 이에 성곽의 방어 체제와 능력에 대한 고민이 뒤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임진왜란 때 재상을 지냈던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은 전쟁이 끝나자 『징비록』을 작성하여 "성곽에는 반드시 옹성과 치성이 갖춰져야 함"을 거듭 역설했다. 이 말은 훗날 수원화성을 쌓는 데 크게 반영되었다. 정조는 곧 화성 축성에 들어갔다. 성안에 행궁을 설치하는 등 화성성역(華城城役)이라 부르는 신도시 건설이 무르익어갔다. 이에 정조는 일찌기 유성룡이 제시했던 설과 유형원·강항·조중봉, 그리고 실학의 집대성자 정약용이 주창한 성설(城說)을 설계의 기본 지침으로 삼는다. 실학사상이 크게 영향을 미친 대역사(役事)였다.
사대문 밖에는 이중으로 적을 차단할 수 있는 아담한 옹성을 설치했는데, 이는 서울 동대문에만 있는 구조물이다. 사대문엔 또 구멍이 5개 뚫린 물탱크[五星池]를 두어 적이 불을 지를 때를 대비해 물을 담아두었다.
사대문 사이에 암문(暗門) 4개, 수문(水門) 2개, 적대(敵臺) 4개, 공심돈(空心墩) 3개, 봉돈(烽墩) 1개, 포루(砲樓) 5개, 장대(將臺) 2개, 각루(角樓) 4개, 포루(飽樓) 5개 등 다양한 구조물을 치밀하고 규모 있게 배치하였으며, 성내에는 행궁(行宮)을 마련해 임금이 머물 수 있는 제반 시설도 모자람 없이 갖추었다.
서장대(西將臺)는 화성의 군사지휘본부로서 '화성장대(華城將臺)'라고도 불린다. 팔달산의 정상에 자리 잡고 있다. 1794년(정조 18년) 8월 11일 공사에 착수, 9월 16일에 상량하고, 9월 29일에 완공됐다. 화성장대(華城將臺)라는 편액은 정조가 직접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장대에서는 성 전체가 한눈에 들어와, 화성 일대는 물론 이 산을 둘러싸고 있는 100리 안쪽의 모든 동정을 파악하고, 그 자리에서 군사들을 지휘할 수 있는 위치이다. 이 곳에는 장대석으로 대를 쌓고 세 벌의 계단을 마련하고 그 위에다 또 한 단의 대를 놓고, 또 그 위에다 2층지붕의 건물을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중층 누각으로서 상층은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의 모임지붕으로 되어 있다.
정조는 1789년(정조 13)에 사도세자의 무덤인 영우원(永祐園)을 수백 년간 수원도호부가 있던 화산(花山)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이라 개명(改名)하고 수원 도읍을 새 장소인 지금의 팔달산 아래로 옮기도록 하였다. 그리고 수원부로 부르던 고을 명칭을 화성(華城)으로 고쳐 부르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줄곧 수원은 화성이란 이름으로 사용되었으나 1895년 지방 관제개편 과정에서 다시 수원군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고 지금은 수원시로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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