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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백의종군길(牙山)

영대디강 2021. 10. 10. 05:21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백의종군길(白衣從軍-)은 이순신이 간신배의 모함에 의해 1597년 3월 4일 투옥되었다가, 동년 4월 1일, 선조의 명을 받고 27일 만에 출옥한 후 의금부를 출발하여 6월 8일 권율 도원수를 만나고 8월 3일 수군통제사로 재임명 받을 때까지 걸어갔던 행로를 의미하나, 여기서 말하는 백의종군길은 후반부를 제외하고, 4월 1일 의금부를 출발하여 6월 4일 초계(합천 율곡)까지 간 행적로를 의미한다.

2015년 조성된 백의종군길은 의금부(義禁府)[현재 서울 종각역 부근]에서 출발해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에서 전라남도 구례군까지의 연결 구간 15.5㎞를 포함해 총 640.4㎞에 이른다. 백의종군길 중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초등학교에 이르는 340.2㎞ 구간이 새롭게 고증됨에 따라 그동안 지방자치단체에서 고증한 경상남도 161.5㎞, 전라남도 123.2㎞에 달하며 이 중 충청남도 아산시의 백의종군길은 원형일 경우 66.2㎞에 달한다. 이순신이 1597년(선조 30) 4월 1일부터 백의종군을 시작한 후 1597년 4월 5일 충청남도 아산 지역에 도착하여 4월 19일 아산을 떠나기까지 걸었던 길이다.

충청남도 아산시의 백의종군길은 다른 어떤 지역보다 그 의미가 크다. 이순신의 성장지이며, 아산 이충무공묘가 있는 곳으로 전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증된 백의종군길을 걸어 봄으로써 충무공 이순신의 구국정신을 체험할 수 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이 길은 인간 이순신의 고뇌와 눈물이 담겨있는 이순신 백의종군길 ‘효(孝)의 길’ 이다. 현충사에서 인주면 해암리 게바위까지 이어지는 약 15㎞ 구간으로 이뤄졌으며, 이 길은 400백여 년 전 이순신이 아산에서 겪었던 14박 15일간의 이야기와 함께 사계절 변화하는 곡교천의 아름다운 정취를 느끼며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이 호수는 아산시 둔포면의 봉재저수지 제방이며 1944년에 축조되었다.

저수지 주변에 미국의 어느 마을로 보여지는 곳이 조그맣게 자릴잡고 있다. 아산시 탕정면에 조성된 지중해마을의 이국적인 유럽풍 건물이 모여 지중해의 작은 시골 마을을 연상시키는 곳이기에 포토존으로 여기며 사진을 남긴다.

POST라는 글자가 쓰여진 빨간 우체통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디자인과 색감이 독특한 건물들에 담쟁이 넝쿨들이 타고 올라간 멋진 집의 외관을 구경하고, 아기자기한 골목을 장난감 인형이 된 기분으로 걷는 즐거움도 있다.

이순신은 16세기 조선의 무신으로, 일본의 조선 침공으로 일어난 전쟁인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을 통솔했던 제독이자 구국영웅이다. 침략군과 교전하여 천재적인 활약상을 펼치고 중앙정부 지원 없이 자급자족을 해낸 군 지휘관이자, 휘하 사람들에게 법에 따른 원칙을 요구하면서도 부족함 없는 처우를 보장한 상관, 지방관 시절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고 전시 피난민도 위무하여 받아들인 목민관, 고위 관료와 접선 및 축재를 거부하고 절제를 중시한 인격자, 그리고 왕의 추궁과 후임자의 실책으로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였으나 이를 극복해낸 철인의 면모까지 갖춰 조선 중기의 명장을 넘어 한국역사상 최고 위인의 반열까지 오른 인물이다.

이순신의 사후 조정은 관직을 추증했고 선비들은 찬양시(詩)를 지었으며 백성들은 추모비를 세우는 등, 이순신은 오래도록 많은 추앙을 받아왔다. 이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에도 마찬가지로 이순신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이순신은 현대 한국에서 성웅(聖雄)이라는 최상급 수사가 이름 앞에 붙어도 어떤 이의도 제기받지 않는, 세종대왕과 함께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한국사 양대 위인이다. 가장 존경하는 위인을 묻는 설문조사에서도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과 1, 2위를 다투며 충무공(忠武公)이라는 시호도 실제로는 김시민과 같은 여러 장수들이 받은 시호이지만 현대 한국인들은 이순신 전용 시호로 인식한다.

이순신은 웃음이 적고 행동이 단아했으며 좌절과 포기를 모른 채 자신의 사명에만 충실하여 전장에서 싸우기를 멈추지 않았다. 탐관오리들이 자신의 위신을 높이고자 높으신 분들과 뇌물을 주고 받는 그런 시기에도 부정행위를 하지 않고 무관의 본분에 충실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원리원칙적인 성향과 굉장히 청렴한 성격 탓에 당시 상사들과 갈등이 많아 임진왜란 전에는 인사 이동이 자주 있어 여러 지역을 옮겨 다녔다. 이순신은 사람이 갈망하는 권위나 권력같은 원초적인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자신의 신념으로 매사에 임하는 사람으로, 그는 전장에서 싸우다 전사하던 그 순간까지도 누구의 인정과 보상도 바라지 않고 오직 나라와 백성을 구하고자 헌신하였으며, 몇몇 전투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공적을 세워 어떻게 이뤄낸건지 아직도 학설이 분분할 정도로 신화적(神話的)이다.

이순신은 인류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잔혹하고 거대한 형태의 폭력인 전쟁이라는 상황을 수행하며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모두 감당하였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 여러 사람들의 질시와 모함을 받아 파면당하고, 관리로서 받은 조정의 비합리적인 처우 등, 앞으로는 왜군과 싸우며 뒤로는 조정과 임금이라는 내부의 적과 맞서 홀로 버텼다. 또한 어머니와 아들까지 연이어 전시에 잃고, 설상가상 자신이 모든 걸 쏟아부어 육성한 정예군이 거의 궤멸 수준으로 타격을 입은 상황에서도 다시 일어나, 오랜 전쟁으로 단련된 수십 배의 적군에 맞서 출전이 곧 죽음임이 확실시되는 절망적인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싸워 결국 이겼다. 이순신은 이처럼 자신이 처한 참담한 상황에서 인간으로서 지닐 수 있는 이상과 펼칠 수 있는 능력의 극한을 보여준 위대한 인물로 심지어 적국인 일본조차 이순신을 동경하고 사당을 세울 정도였다.

가령 명량 해전의 초반부에서 물살이 바뀌기 전까지 약 2시간 가량을 이순신은 대장선 1척으로 일본 측 함선 133척과 정면으로 붙어 하나하나 박살내고 있었다. 분명히 조선 측과 일본 측의 풍부한 사료로 교차검증이 가능한 기록임에도 너무 믿어지지 않아서 사람들이 오히려 왜곡된 유사역사학자의 주장을 믿고 마는 것이다. 일개 병졸 하나하나의 공을 세세히 적어 장계를 올려 포상을 받게 했으며 자신의 공적을 부하들에게 돌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대표적으로 명량 대첩 때 자신의 공로를 안위에게 준 것이 있는데 그 덕에 안위는 초고속 승진을 하게 된다. 허나 마냥 너그럽게 대했냐고 했다면 그것도 아닌데 훈련을 게을리하는 병사들을 매우 엄히 다스렸으며, 심지어 조선 수군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왜군(倭軍)이 아닌 이순신이라는 평가도 있을 정도다. 고로 당근과 채찍을 정확히 다루어 부하들을 부린다고 할 수 있겠다.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전투 수행 능력이 익히 알려져 있지만 기록을 보면 전략적인 식견이 그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난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당시 이순신의 지휘를 받는 조선 수군의 총 전력은 일본군보다 절대적인 열세였지만 대부분의 전투를 수적 우위를 점한 채로 압승을 거두며 심할 때는 이러한 각개 격파가 하루 동안 5~6번이 일어나 그 전투들만으로 출정한 조선 수군의 전력을 넘어서는 일본군을 수장해버리는 일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연합 함대를 중시하여 항상 만전의 화력을 갖추고 싸우는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적보다 열세인 상황에서 전투를 벌인 때는 전력의 열세를 극복할만한 완벽한 함정을 팠거나(閑山島 大捷),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정치적 이유로 출정해야 했거나(장문포 해전), 그 이상 전투를 피하면 나라가 망하는 때(鳴梁 大捷)뿐이었다.

이순신은 함대 설계 및 훈련, 운영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전 국토가 전쟁의 화마로 털리는 바람에 교지를 쓰거나 기록을 남길 종이마저 부족했던 중앙 정부에게 종이를 바치기도 했다. 남해안 여러 섬에 둔전(屯田)을 만들어 식량을 자급자족했으며 어로 활동으로 군량과 군비를 충당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기피 대상이었던 수군의 병력 유지를 위해 직접 발벗고 뛰어다닌 결과 1만 명 이상의 병력을 중앙 정부의 지원없이 유지했다.

이순신이 중앙 정부에 무언가를 요구했던 것은 역병으로 병사들이 죽어나갈 때 의원을 보내달라는 것과 화포를 만들 철이 부족하여 조정에 철을 조달해 줄 수 없는지에 대해서 장계를 올린 것 정도다. 원균이 5천명의 병력을 지원받고도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한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특히 자기 휘하로 피난 온 백성들을 잘 보살피고 다스려 칭송을 받으며 목민관으로서도 훌륭한 면모를 보였다. 다방면으로 뛰어난 업적과 충성심 덕에 적국이었던 일본조차 사후 연구 대상으로 삼기도 하였다.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서 파직됐을 때 일화가 있는데, 원균에게 인수인계를 하고 금부도사의 체포를 받아들였을 때 군사들이 달려나와 울면서 앞길을 막자 이순신은 "나는 죄가 없기에 가서 조사를 받고 증명하면 풀려날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전하의 명을 어기고 금부도사의 일을 방해하고 있어 그 죄가 매우 크니 어서 비켜라."고 그들을 꾸짖었다. 겨우 군사들을 지나치자 이번에는 백성들이 몰려나와 이순신을 부르짖고 금부도사 일행을 비난하면서 분위기가 험악해졌는데 금부도사 일행이 겁에 질려 갈팡질팡할 정도였다. 이순신은 금부도사에게 잠시만 자신을 풀어 달라 하여 함거에서 나와 백성들을 주목시켰고, 잠시 한양에 갔다가 곧 돌아올 테니 걱정 말고 기다리라고 차분하게 타일렀고 그제서야 백성들은 통곡하면서 길을 열어 주었다고 한다.

이순신은 위대한 지휘관, 위대한 전술가로서 가져야만 하는 모든 덕목들을 다 갖추고 있었다. 우월한 정보력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싸웠다. 일단 전투에 들어서면 아군의 장점을 극대화하고, 적의 장점은 무력화시키는 전술로 적의 피해를 극대화했다. 명장들이 종종 보이곤 하는 호전성이나 아집, 전공 욕심도 없어 항상 아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또한 이런 전략전술을 실제로 실행한 조선 수군은 이순신이 직접 만들어내다시피한 군대였다.

그 외에도 원하는 전장으로 적을 유인할 때까지의 계략, 육지에서도 하기 힘든 전술 기동을 바다 위에서 완벽하게 해내는 기동 능력, 전투 개시의 시점, 전황에 따라 적을 이길 수 있는 포진, 특히 압도적인 수적 열세 상황에서 발휘된 뛰어난 통솔 능력, 전쟁 내내 발목을 잡았던 원균과 조정의 트롤링, 오만불손했던 명나라 장수를 적절한 밀땅으로 매료시킬 정도의 매력과 적 일본까지도 칭찬해 마다않는 인품, 무엇보다 전투에 집중하기도 버거운 군대가 군수품을 자급자족하는것도 모자라 일부 품목을 정부에 진상까지 했다는 것까지 고려한다면, 가히 인류 역사상 최고의 수군 지휘관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 밖에도 독보적인 정직함과 청렴함도 현대 한국인들에게 매우 존경받는 요소 중 하나다. 이순신을 뜯어 보자면 '존경하지 않을 이유를 찾는 게 더 어렵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순신은 완벽한 인물이었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40년 가까이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순위에서 부동의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백의종군 직후 앓아누운 횟수가 늘어났기 때문에 몸이 안 망가졌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로지 고문으로 몸이 망가졌다기 보다는 나이 50에 격무로 장기간 스트레스에 시달려 온 사람이 투옥과 고문까지 더해지며 건강에 큰 타격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또한 목숨을 바쳐 왜적을 5년 동안 한 번의 패배 없이 막았음에도 적의 반간계에 넘어가 파직으로 화답한 선조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꼈을 수도 있고, 이로 인한 정신적 고통 역시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본래 백의종군은 무관이 전시나 위급한 상황에 파직되었을 때 직무 중인 현 직위의 권한은 잃지만 전직관료의 신분으로 현직을 보좌하게 하려는 처분이다. 이순신 장군이 기록한 난중일기에서 백의종군을 하고있던 당시의 기록들을 보면 길을 지날 때마다 지방 관리들과 장수들이 아침마다 문안 인사를 오고 술과 식량, 그리고 짐이 무거울까봐 말까지 보내주는 것이 나와있고 여기에 더해 이순신 장군을 보좌하는 군관도 배속이 되어있었고 심지어는 어느 일정 수준의 녹봉 즉 국가에서 주는 급료도 받았다.

실제로 이순신의 사례뿐만 아니라 조선은 반상의 법도가 엄격하고 특히 이순신은 당상관이라는 관료중에서도 고위직에서 파직되었기에 직첩은 거두었지만 조선이라는 나라가 전직 관료는 현직에 준하여 대하는 공식적인 제도가 존재했고, 당연히 전직 관료를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되어 있었으며, 감히 평민이나 병사가 백의종군자를 제대로 대우하지 않으면 처벌하는 규정까지도 있었다. 그리고 파직도 또한 현재의 공무원 파면도 다른게 직책을 잃는다해도 현직에서 받았던 품계는 (정3품 같은) 그대로 유지가 되기 때문에 직을 잃었다고 신분 까지 잃지는 않는다. 조선시대에서 양반이 모든 신분을 잃고 떨어지는 일은 역모 주동자와 그 연좌되는 직계가족일 경우 뿐이다. 애초에 파직도 대부분의 경우 금방 복직되거나 최소한 직첩은 돌려주는게 조선시대 수준의 처벌이다.

이순신 장군이 이 처벌을 두 번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첫번째는 조산보 만호 겸 녹둔도 둔전관 시절로 임무 수행 중에 여진족의 침략을 받아 10명이 전사하고 녹둔도의 백성들도 희생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녹둔도 전투는 수십명의 병력으로 1,000에 달하는 여진 기마병을 상대해 성공적으로 방어를 치뤄내고 반격까지 감행해 주민 60여명을 구해낸, 패전이라고 할 순 없는 전투였지만 상급자인 함경도 북병사 이일이 이순신의 병력 증원 요청을 거부한 책임을 면피하기 위해 이순신 쪽으로 책임을 모조리 돌리려 했다.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패장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러나 이순신 쪽에서 자신의 무고함을 강력하게 따져 묻고 국왕 선조 역시 이순신의 사례는 여느 패전과 다르다고 결론을 내려 참형은 피할 수 있었다.

두번째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계략에 걸린 선조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왜적이 쳐들어 오는데도 막지 않는다며 이 처벌을 내렸다. 사실 이순신은 조정보다 먼저 가토 기요마사의 한반도 상륙을 알고 있었다. 이순신이 가토가 부산 앞의 가덕도에 상륙했다는 첩보를 입수한 것은 1월 10일, 고니시가 김응서에게 가토의 도해 사실을 흘린것은 1월 11일이었고 이틀후인 1월 13일에 가토가 부산 본토에 상륙했기 때문. 그리고 이순신은 뒤늦게나마 조정의 명으로 출정을 하긴 했지만 이미 일본군이 부산포 일대를 들쑤시고 왔으며 조정에서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문제는 선조가 1월 21일에 올라온 원균의 장계(나라면 가토를 잡을 수 있었는데 이순신은 밍기적 대다가 놓쳤다.)를 보고는 "이순신이 임금을 능멸했다."며 파직을 명했다는 것이다.

충청남도 아산 지역에서 이순신이 걸은 곳을 『난중일기(亂中日記)』에 기록된 날짜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597년 4월 5일~12일 : "평택현을 출발하여 분산(墳山)[선영]에 이르러 울며 절했다. 외가로 가서 사당에 절했으며, 조카 뇌(蕾)의 집에 가서 선대의 사당에 참배한 후 본가에 도착해 빙부모(聘父母) 신위에 절했다." 4월 13일~15일 : "본가에서 해정로(海汀路)를 따라 해암(蟹巖)으로 가 배에서 어머니 시신을 맞았다." 4월 16일~18일 : "배를 중방포(中方浦)까지 끌어온 다음 영구를 상여에 싣고 왔다." 4월 19일 : "본가를 출발하여 금곡(金谷) 강선전(姜宣傳)의 집 앞에 도착 후 천안 보산원(寶山院)까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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