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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행주나루길(高陽)

영대디강 2022. 2. 13. 05:36

평화누리길 4코스는 행주산성 입구에서 호수공원의 선인장전시관 까지이다. 경기도 북부에는 4개 시·군을 잇는 평화누리길이 있으며, 평화누리길은 DMZ와 가까운 지역인 김포, 고양, 파주, 연천을 잇는 대한민국 최북단 걷는 길로,  12개 코스, 189km의 길로 구성되어 있다. 평화누리길의 제4코스는 행주나루길로 불리며, 코스 거리는 11Km로 소요시간은 약 3시간 정도이다.

시작지점인 행주산성(幸州山城)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행주대첩(幸州大捷)으로 널리 알려진 곳으로 테뫼식의 토축 성곽 산성으로 사적 제56호로 지정면적 361,171, 둘레 약 1,000m이다. 강안(江岸)의 돌출된 산봉우리를 택하여 산 정상부를 에워싼 소규모의 내성(內城)과 북쪽으로 전개된 작은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外城)의 이중구조를 하고 있다.

산성의 정확한 축성연대와 목적은 알 수 없으나, 강안의 험한 절벽을 이용하고 동·북·서로 전개된 넓은 평야를 감싸안고 있는 것은 삼국시대 초기의 산성형식과 부합된다. 이곳이 백제의 초기 영역에 속하여 서해안으로의 수운(水運)과 관계된 중요한 거점으로 추측되며, 특히 나당(羅唐) 때까지 남북교통의 요충에 해당하여 고구려와 신라의 공방전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성벽은 산 정상부의 동남쪽 사면과 외성부의 동북쪽 성벽뿐이며, 서쪽 방면은 내성은 확인되나 외성 성벽은 육안으로 식별하기가 어렵다. 성벽은 내성의 경우 정상부를 깎아내어 다듬은 뒤에 둘레 약 250m 정도의 토루(土壘)를 형성하고 있으며, 정상에서 동북쪽의 산등성이를 따라 외성의 자취가 남아 있는데, 이 외성은 자연능선을 이용하여 양쪽에서 석심을 두고 판축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계곡 쪽의 성벽은 유구를 찾을 수 없으나 산 중복을 돌아간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이른바 이중식산성은 삼국시대의 새로운 형식으로서 주목된다.

행주산성은 1593(선조 26) 권율(權慄)의 전적지로서 임진왜란 3대첩인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 진주목사 김시민의 진주대첩과 더불어 행주대첩으로 유명하다. 현재 성안에는 1603년에 세운 행주대첩비와 1963년에 다시 세운 대첩비가 있다. 1970년에 대대적인 정화작업을 벌여 권율을 모시는 충장사(忠壯祠)를 건립하고 정자와 문도 세웠다.

행주산성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충장공(忠莊公) 권율 장군이 장검을 빼어 짚고 서 있는 동상이 있다. 그 위로 올라가면 오른쪽 길에 홍살문이 있고, 홍살문을 지나 들어가면 권율 장군의 제사를 모시는 충장사가 행주대교와 한강 하구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 앞마당에 두번째 세운 행주대첩비가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 순찰사였던 권율은 군사를 거느리고 행주산성에 머물었다. 이때 한양에는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후퇴한 왜군 3만여 명이 모여 벽제관에서 명나라 이여송 장군의 군대를 크게 이긴 후 왜군 병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3만여 명의 왜군은 행주산성을 겹겹이 둘러싸고 9차례에 걸쳐 무자비하게 공격해 왔다. 그러나 권율의 2천3백명의 군사에게 패하여 왜군은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모두 지리멸렬 퇴각했다.

권율 장군은 조선 중기의 명장수 중 한 사람으로 46세라는 늦은 나이에 관직에 올랐고 63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 임진왜란 당시 수도가 함락되자 이광과 곽영이 4만여 명의 군사를 모집했고, 그때 권율 장군은 광주 목사로 곽영의 지휘 아래 남원에 머물면서 1,0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해 금산군 이치싸움에서 잘 훈련된 왜군을 상대로 승리했다. 이로 인해 전라도 순찰사로 승진했으며,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서 3만여 명의 왜군을 물리친 것은 그의 일생 중 가장 큰 업적이었으며, 임진왜란 7년간 군대를 지휘하며 큰 공을 세웠다.

권율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모악(暮嶽). 도첨의(都僉議) 권보(權溥) 9세손으로, 할아버지는 강화부사 권적(權勣), 아버지는 영의정 권철(權轍), 어머니는 적순부위(迪順副尉) 조승현(曺承晛)의 딸이다. 이항복(李恒福)의 장인이다. 1582(선조 1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이어 전적·감찰·예조좌랑·호조정랑·전라도도사·경성판관을 지냈다. 1591년에 재차 호조정랑이 되었다가 바로 의주목사로 발탁되었으나, 이듬해 해직되었다.

행주대첩은 임진왜란 중 일어났던 3대 대첩 중의 하나로 1593년 성 안의 부녀자들이 행주치마에 돌을 담아 병사들에게 날라다 준 것이 큰 힘이 되어 대승을 거둔 전투이다. 행주산성은 남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창릉천이 산성을 에워싸고 돌아, 방어하기에 아주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 산성에서 행주치마의 전설이 탄생하였다.

왜병은 7대로 나누어 계속해 맹렬한 공격을 가해 성이 함락될 위기에까지 직면했으나, 일사불란한 통솔력과 관군과 의승병이 사력을 다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대패한 적은 물러가기에 앞서 사방에 흩어져 있는 시체를 모아 불을 질렀으나, 그밖에도 유기된 시체가 200구에 달했고 타다 남은 시체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권율의 군대는 그들이 버리고 간 기치(旗幟)와 갑주(甲胄)·도창(刀槍) 등 많은 군수물을 노획했다. 이것이 1593 2 12일에 있었던 행주대첩이다.

그 뒤 권율은 왜병의 재침을 경계해 행주산성은 오래 견디어내기 어려운 곳으로 판단, 파주산성(坡州山城)으로 옮겨가서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부원수 이빈() 등과 성을 지키면서 정세를 관망했다. 그 뒤 명나라와 일본 간에 강화 회담이 진행되어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휴전 상태로 들어가자, 군사를 이끌고 전라도로 복귀했다. 그해 6월 행주대첩의 공으로 도원수로 승진되어 영남에 주둔했는데, 1596년 도망병을 즉결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바로 한성부판윤에 기용되었으며, 호조판서·충청도관찰사를 거쳐 재차 도원수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적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에 대진했으나 도어사 양호(楊鎬)의 돌연한 퇴각령으로 철수했다. 이어 순천 예교(曳橋)에 주둔한 왜병을 공격하려 했으나, 전쟁의 확대를 꺼리던 명장(明將)들의 비협조로 실패했다.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7월에 죽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1604(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1841년 행주에 기공사(紀功祠)를 건립, 그해 사액되었으며, 그곳에 향사되었다. 임진왜란 때 활약한 공훈을 중심으로 기록된 사적이 『권원수실적(權元帥實蹟)』이란 책명으로 1권이 전한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행주산성 입구인 이곳 바위 밑에서 태어난 행주 기씨(幸州 奇氏)는 경기도 고양시 행주동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며, 시조는 마한 원왕(元王) 3 우성(友誠)이며,  고려 인종(仁宗) 때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를 지낸 기순우(奇純祐) 1세조로 한다. 행주 기씨 족보에서는 기자(箕子) 48대손인 기우성(奇友誠)을 시조로 한다. 《행주기씨보(幸州奇氏譜)》 및 《청주한씨세보(淸州韓氏世譜》에 의하면 마한 8대 원왕(元王) ()의 아들로 우평(友平), 우량(友諒), 우성(友誠)이 있었는데, 우평은 태원 선우씨(太原 鮮于氏), 우량은 청주 한씨(淸州 韓氏), 우성(友誠)은 행주 기씨가 되었다고 한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기록에는 마한의 유민(遺民)이 온조왕에 의하여 한산(漢山)의 북쪽, 즉 행주(幸州)로 옮겨졌다고 하고 있다

권율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에 제수되어 바로 임지로 떠났다. 왜병에 의해 수도가 함락된 뒤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과 방어사 곽영(郭嶸) 4만여 명의 군사를 모집할 때 광주목사로서 곽영의 휘하에서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서울의 수복을 위해 함께 북진했다. 이광이 수원과 용인 경내에 이르러 이곳에 진을 친 소규모의 적들을 공격하려 하자 극력 반대하면서 자중책을 말하기도 했다.

3만명 7개 부대로 편성된 왜군이 오늘(2월12일)새벽을 기점으로 공격을 해 왔지만 권율 장군은 이미 강력한 화약 무기들을 준비시켜 놓고 있었다. 수적으로도 매우 열세했던 전투에서 조선군이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이처럼 신무기들이 동원됐다는 점과 함께 부녀자들까지 나라를 지키는데 동참했기 때문이다. 부녀자들은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치마에 돌을 날라서 함께 돌을 던지며 싸웠다. 행주 대첩은 단 하루 만에 끝났고, 하루 동안 7차례나 크게 싸움을 벌으며, 우리 군대는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로 엄청난 전투력으로 이겼다.

행주산성 서북쪽에는 신라시대 때 쌓았다는 토축산성터가 남아 있어 당시의 상황을 가늠케 한다. 토축산성은 강기슭의 돌출된 산봉우리를 택하여 산 정상을 에워싼 소규모의 내성(內城)과 북쪽으로 전개된 작은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外城)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강기슭의 험한 절벽을 이용하고 동북서쪽으로 펼쳐진 넓은 평야를 포용하고 있는 것에서 삼국시대 초기의 산성형식임을 알 수 있다. 현재는 산 정상의 동남쪽 사면과 외성의 동북쪽 성벽만 남아 있으며, 서쪽은 내성은 확인되나 외성은 육안으로 알아보기 어렵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으며 둘레가 약 1m이다. 사적, 전체 규모는 10 8천여 평이다.

산성에서 북쪽으로 내려오다보면 신라시대 토성터와 문이 있었다는 문터를 차례로 만난다. 토성터는 아래편 길가에서 보면 다소 높은 둔덕처럼 흙무더기가 올라와 있어 사전지식이 없으면 알아차릴 수 없으나 굴곡져 내려오는 그 길이가 꽤 길고, 문터 역시 토성터가 끝나는 지점에서 볼 수 있으나 딱히 ‘문터’였다고 보여질 만큼 흔적이 뚜렷하지는 않다.

나라가 외적의 침입을 받아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국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일어나 외적과 싸웠던 의병은 임진왜란시절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고구려와 백제가 망한 뒤, 남은 백성들은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 의병을 조직했다. 1907년 일본에 우리나라의 통치권이 넘어갔을 때에도 전국적으로 의병 운동이 일어났었다. 우리 국민은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스스로 일어나 힘을 모아 나라를 구했다는 아름다운 역사속 이야기이다.

산성 정상 오른편에 첫번째 세운 아담한 행주대첩비가 서 있는데 금방 쓰러질 듯 이곳 저곳에 금이 가 있어 안쓰럽다. 이 비석에 얽힌 믿거나 말거나 할 일화가 전한다. 일제강점기 때 비석에 금이 가기 시작해 점점 커진 구멍에 커다란 구렁이가 들어와 살더니만 1948년 해방이 되자 벌어진 금이 줄어들기 시작, 지금처럼 쪼개진 듯 남아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비석에 권율 장군의 혼이 어려 있다는 뜻일거라고 우리는 그렇게 믿는거다.

현재 행주산성 안에는 권율 장군을 기리는 대첩비가 세 개 있다. 산성 정상부 오른쪽에 서 있는 아담한 비가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장병들이 손수 세운 대첩비로 첫번째 비이다. 1602(선조 35) 최립(崔岦)이 당시의 전투상황을 자세히 묘사해 비문을 짓고, 한호(韓濩)가 왕희지풍에 가까운 해서로 썼으며, 김상용(金尙容)이 전액을 썼다. 뒷면은 권율의 사위 이항복이 짓고 김현성이 썼으며, 높이 178, 너비 82, 두께 18㎝이고,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두번째 비는 조인영의 건의로 1842(헌종 8) 8월에 세웠다. 이순신 장군의 후손이며 훈련대장 이유수가 책임을 맡아 지금의 행주대교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 지은 권율 장군의 사당에 헌종은 기공사(紀功祠)라 사액을 내렸고, 대제학 조두순이 지은 공덕문을 백사 이항복의 아들이며 권율의 외손인 예조판서 이유원이 글씨를 써 세운 것이다. 그뒤 사당이 한국전쟁 때 포탄에 맞아 파괴되매 비만 지금의 충장사 앞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그리고 1963년 산성 정상에 근년에 세운 비가 있다.

산성에서 북쪽으로 내려오다보면 신라시대 토성터와 문이 있었다는 문터를 차례로 만난다. 토성터는 아래편 길가에서 보면 다소 높은 둔덕처럼 흙무더기가 올라와 있어 사전지식이 없으면 알아차릴 수 없으나 굴곡져 내려오는 그 길이가 꽤 길고, 문터 역시 토성터가 끝나는 지점에서 볼 수 있으나 딱히 ‘문터’였다고 보여질 만큼 흔적이 뚜렷하진 않다.

행주거리 예술이밤.... 밤이면 별빛 달빛 조명속에 펼쳐지는 행주산성의 예술이야기가 조각 작품으로 소개되어 있다. 

권율 본인은 행주대첩을 자신의 최고 전공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항복의 <백사집>에 의하면 권율은 이항복에게 "원래 웅치와 이치의 싸움이 더 어려운 여건이었는데 내가 여기서 싸워 이겨 호남이 보존될 수 있었네. 그러나 행주 전투는 이미 적의 기세가 쇠한 상태였고 내가 공이 있던 상태에서 이뤄진 전투니 이것이 내가 쉽게 이길 수 있었던 이유이지. 하지만 나는 행주 싸움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니 사람 일은 참 모를 일이구만."라는 식으로 심경을 토로했다고 한다. 의례적인 겸양의 말로도 보이지만 권율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긴 자신의 싸움은 웅치 - 이치 전투였다는 소리다물론 그렇다고 행주 전투의 공적을 폄하할 수는 없는데 권율은 2.3천의 병력으로 3만이 넘는 왜군을 상대해야 했다. 그것도 산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100미터 남짓 높이의 구릉 위에 놓인 축성물에 목책을 쌓아두고 벌인 전투였다. 그 상태에서 10배가 넘는 적 병력을 상대로 거의 전멸 일보 직전까지 때려잡는 압승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권율의 발언은 어떻게 보면 수적으로 불리했지만 압승한 전투보다 전쟁에 큰 영향을 준 전투를 더 중요히 여겼다는 점에서 전략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라고도 할 수 있겠다.

사실 선조는 행주대첩 후 빠르게 도원수 김명원을 교체하고자 했는데, 벽제관 전투 이후 명나라의 강화 교섭 시도에 대하여 조선 조정의 반대 입장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류성룡과 김명원에 대한 불만과 자신의 능력을 입증한 권율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거기에 김명원이 사실 관계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섣불리 장계를 올려 장수 신각을 죽게 만든 경력도 있었기 때문에 선조는 무슨 트집을 잡든 김명원만은 자르고 싶어했다. 김명원은 군정 사무에는 능했지만 지휘 능력은 낙제였고 유순한 성품 탓에 장수들 통제에도 애를 먹었기에 교체할 필요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비변사에서는 "권율이 경기 지역의 지형지물과 군사 정세를 모른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다. 그 결과 도원수의 교체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신 의병의 절제권을 부여받았다. 그래서 1593 3월 이후부터 한동안 군사 지휘권은 종전대로 유지되었지만 권율이 전라도 관군을 이끌고 의병까지 관장하게 됨으로써 실질적인 지휘권은 권율에게 있었다.

권율은 46세의 늦은 나이인 1582(선조15년)에 식년시 문과에 병과 15위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9)에 제수되었으다. 그 후 죽은 영의정의 아들이자, 현직 관료들의 친동생이라서인지 승진은 빠른 편이라 전라도 도사(5), 예조 정랑, 호조 정랑(5), 경성 판관 등을 거쳤다. 행주산성으로 병력을 옮기고 기다리고 있는데, 오는 줄 알았던 명나라군은 벽제관에서 참패하고 그대로 평양으로 후퇴했다. 이에 행주산성이 신경쓰였던 일본군은 승기를 몰아 3만 병력으로 행주산성을 공격했는데, 권율의 뛰어난 통솔력과 3천명에 불과한 병사들의 선전 끝에 이를 물리쳤다. 이것이 그 유명한 행주대첩이다.

소싯적 일화를 보면 왠지 대인군자의 풍모가 느껴지는 이야기가 많은데, 6세 때 한번은 어머니가 하얀 비단옷을 새로 지어주며 입으라고 하자 입기 싫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묻자 "의복은 몸만 가리면 그만이지 뭐 하러 남의 시선을 생각합니까?"라고 대답했는데 아버지 권철은 이 얘기를 듣고 비범한 인물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가문도 좋고 나름대로 똑똑했던 것 같지만 특이하게도 마흔살이 되도록 관직을 얻으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권율에게 "과거를 치르든지 집안의 배경으로 관직을 얻든지 해야지, 자네는 언제가지 그렇게 살텐가?"라고 묻자 권율 왈, "옛날 태공망은 나이 80에 현달해도 오히려 천하를 경영하여 백성을 구제했는데 아직 내 나이가 태공망의 반밖에 안 되는데다 능력까지 미치지 못하는데 어찌 출세가 늦을 걸 걱정하겠는가?"며 반박했다고 한다. 지인들과 어울려 전국을 여행하거나 지리를 연구하는 등 한량처럼 지냈다고 한다. 

권율은 1537년 경기도 강화도호부 선원면 연동(현재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연리)에서 영의정을 지낸 아버지 권철(權轍)과 어머니 창녕 조씨 조승현(曺承晛)의 딸 사이에 넷째 아들인 막내로 세상에 태어났다.  고려말조선초의 유학자이며 조선 개국공신인 권근이 6대조인 그야말로 뼈대있는 집안 출신인 것이다.

권율이 벼슬길에 뜻을 두게 된 이유는 아버지 권철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아버지 권철은 죽기 직전에 막내아들 권율을 빤히 쳐다보다가 "널 내가 낳았구나"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는데 이 말에 깨달은 바가 있어 아버지의 3년상을 치르고 금강산에 들어가 과거 급제를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렇게 벼슬길에 늦게 올라서 역사적인 영웅이 되었다는 사실에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도 뭔가를 생각하는게 있어야 한다.

행주대첩 이후에 죽은 왜군들을 둘러보다가 문득 이 놈들이 쳐들어와 조국이 엉망이 된 걸 생각하니 열이 뻗쳐서인지 한 왜군 배를 가르더니 간을 끄집어내 씹으면서 "왜놈들의 간을 씹어도 속이 풀리지 않는구나."라며 뱉어버리고 말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디까지나 야사이며 전쟁 시에는 별별 일이 터지는 걸 생각하면 식인이니 뭐니 비웃을 이야기도 아니다. 다만 권율이 행주 대첩이 끝난 후 죽은 왜병들의 시체를 찢어서 나뭇가지에 걸어놓도록 했다는 것은 사실인데 이게 야사로 전해지면서 과장된 것으로 보면 될 듯하다. 행주대첩 당시에는 투구를 쓰고 있다가 지친 병사들에게 그 투구를 벗고 투구에 식수를 따라서 물을 마시게 하며 병사들을 독려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당시 왜군과 싸웠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가 전문적인 군사 훈련을 받은 군인도 아니었다. 오히려 농민을 비롯한 일반인들이 대부분이었다는 점에서 이 승리가 더욱 놀라운 것이다. 왜군이 성책 가까이 다가오자 조선군 진영에서 북소리가 세 번 울렸다. 권율은 변이중이 만든 화차와 수차석포(水車石砲) ·총통·활·재주머니 등을 총동원해 적군을 막아냈다. 어느새 하루해가 지고 어둠이 깔릴 무렵 왜군의 일곱번째 부대가 공격해올 때는 무기조차 바닥나 투석전과 육박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이때 마을 부녀자들이 총출동, 앞치마에 돌을 담아 날랐다. 큰 돌은 그대로 굴리고, 잔돌은 수차석포에 넣어 대포처럼 발사했다. 이 앞치마부대는 동요하던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워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면서 퇴각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일본군은 행주산성 싸움에서 패한 후 다시는 서울 이북에 출병하지 않고 한양 철수를 서둘렀다.

신무기인 화차랑 신기전 등 강력한 화약무기를  요소요소에 미리 잘 배치해놨다가 왜군이 몰려오자 무자비한 화력으로 신나게 한순간에 쓸어버렸다. 여기에 적장인 우키타 히데이에와 이시다 미츠나리의 통솔력이  막장 수준이라 왜군은 변변찮은 전략 한번 못 써보고 병력만 무한정 밀어 올렸는데, 권율이 적절히 대처하고 보급이 기가막힌 타이밍에 도착하면서 엄청난 대승을 거둔다.

무덤 안내 표지판이다. 근처에 공동묘지가 있다는 것이다. 산에는 당연히 무덤이 있겠지라는 생각을 갖겠지만,  표지판을 자세히 읽어 보니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행주대첩 때 전사한 , , 군 병사와 여성 승병들의 시신을 처음으로 묻었던 곳이며, 그 후 일제시대엔 공동묘지로 정해짐으로써 더 많은 무덤이 들어선 곳이란다.

행주산성에서 밤에도 한강의 경관을 보며 안전하게 누리길을 즐길 수 있도록, 밝고 안전한 행주산성 수변누리길만들기 사업은 행주산성 수변누리길에 야간경관조명을 설치하는 사업으로 공사중이라서, 왼쪽으로 108 장수 계단을 올라야 한다. 기존 누리길 구간에 사유지로 단절된 구간이 있어 고양시가 이동 편의를 위해 징검다리와 전망대, 보행데크 등도 추가 설치한단다.

동서로 길게 쌓은 행주산성은 삼국시대 이후부터 통일신라와 고려, 조선시대까지 중요한 역할을 하던 군사기지로서 산성 내에는 1603년 세운 행주대첩비와 권율의 사당인 충장사가 있다성안에서는 삼국시대의 적갈색 연질토기편, 회청색 경질토기편을 비롯하여 어골문(魚骨文)·수지문(手指文)의 기와조각도 발견되고 있어 고려시대까지도 간헐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시 권율은 한양 탈환 작전을 세우고 한양 서쪽에 이름 없는 고지인 이곳 행주산성의 토성 위에 목책을 쌓아 방어진을 구축한다. 당시 왜군 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는 3만 병력으로 행주산성을 공격한다. 성 안에는 조선군 2,300여 명과 의병장 김천일의 부대 그리고 승병장 처영의 승군 등 약 6,000명뿐이었다. 성 안의 모든 관민과 남녀가 맞서서 일곱 번의 일본군 공격을 물리쳤다. 화포와 화살을 쏘고 칼과 창으로 찌르고, 바위와 돌을 던지고, 재와 끓는 물까지 쏟아 부으면서 굳건히 버텼고 결국 우키다 히데이에는 부상을 입고 5,000여 명의 사상자를 남긴 채 철수했다. 이후 일본군의 한양 이북 공격이 중지될 정도로 행주대첩은 전세를 바꾼 조선군의 대승리였다는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의 사적지이다.

오천년 우리 역사 문화발전의 터전으로, 그 유구한 역사와 함께해 온 한강이 용산과 마포를 지나 서울을 마악 빠져나가는 지점에 섬처럼 자리잡은 낮고 아담한 덕양산이 있다. 동남쪽으론 임진강을 타고 오르는 한강과, 서북쪽의 파주·문산·벽제관 등을 조망할 수 있는 중요한 요지였다. 이 산에서 그 유명한 행주대첩을 치렀고, 이후 덕양산은 아예 그 이름이 행주산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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