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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경복궁(鍾路)

영대디강 2024. 11. 17. 04:25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161(世宗路)의 경복궁(景福宮, Gyeongbokgung Palace)은 조선시대에 가장 먼저 지은 궁궐이다. 경복궁은 사적 제17호로 지정받은 조선시대의 궁궐 중 하나이며, 조선(朝鮮)의 정궁(法宮)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遷都)를 단행하면서 지은 궁궐이 1592년 임진왜란으로 전소(全燒)되었고, 그대로 275년간 방치(放置)되다가 1868년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주도하여 중건(重建)되었다.

세종대왕 동상 뒷편으로 즐비하게 펼쳐놓은 공기방석 위에 앉아 책을 읽고있는 관람객들 사이로 보이는 광화문(光化門)은 경복궁의 남쪽에 있는 정문이다. 1395년에 만들어졌으며 원래의 이름은 남문(南門)이었으나, 조선의 제4대 국왕인 세종(1418.9.18 ~ 1450.4.8 재위) 때에 광화문으로 명칭이 바뀐다. '왕의 큰 덕()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로 광화문(光化門)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2층 누각인 광화문 앞의 양쪽에는 한 쌍의 석조 해태 조각상이 자리잡고 있으나, 광화문 복원 공사를 하면서 잠시 이동하였다. 2010년 복원공사가 완료되어 2010년 8월 15일 광복절에 일반에게 공개되었으며, 2021년부터 광화문 앞 월대(月臺) 복원을 위한 발굴 공사가 진행중이다.

광화문에는 총 3개의 문들이 있는데, 가운데 문은 왕이 드나드는 문이고, 나머지 좌우의 문은 신하들이 다니던 문이었다. 광화문의 천장에는 주작(朱雀)과 용(龍) 그리고 거북(龜)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곳 흥례문(興禮門)은 정문인 광화문과 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 사이에 있는 중간문으로, 정면 3, 측면 2칸의 중층 목조 건물이다. 1867년에 중건되었다가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 초에 철거되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가 들어섰다가, 경복궁 복원 사업을 통해 옛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2001년에 완공된 모습이다.

근정전(勤政殿)은 경복궁에서 문무백관의 조하(朝賀)를 비롯한 국가 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정전이자 법전(法殿)이었다. 현재 근정전은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는 현존하는 한국 최대의 목조 건축물이다. 정종, 세종, 단종, 세조, 성종, 중종, 명종 등 조선 전기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임진왜란 전에는 주변 회랑이 단랑(單廊)이었으나, 현재의 근정전은 복랑(復廊) 형식의 행각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마당에서 약간 북쪽에 상하월대 위에 정면 5, 측면 5칸 규모로 지어진 다포계 팔작지붕의 중층 건물이다. 정전 앞 넓은 마당에는 거칠게 다듬은 박석(薄石)이 깔려 있고, 그 가운데로 난 어도(御道) 좌우로 문ㆍ무관이 신분에 따라 자리하는 아홉 쌍의 품계석이 놓여 있다. 조선물산공진회때 용상이 훼손되었으나, 2000년부터 2003년까지 있었던 근정전 해체공사 때 복원되었다.

근정전 건물 외관은 중층(重層)이지만, 내부는 층의 구분없이 전체가 트인 통칸으로 되어 있으며, 뒷면 내진주(內陣柱) 중앙에는 어좌(御座)를 마련하였고그 뒤에는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 병풍이 있다. 천장 중앙에는 보개(寶蓋)를 마련하여 구름무늬를 그리고발톱이 7개인 칠조룡(七爪龍한 쌍을 만들어 달았으며건물 내부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다. 본래 건물 안에는 의장기물이 가득 장치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임금의 집무실(執務室)인 이곳을 바라보면서 여름엔 너무 덥고 겨울에는 많이 추웠으리라 생각하니, 냉난방 시설이 없던 그시절이 머릿속에 저절로 그려진다. 

 사정전(思政殿)은 2012년 3월 2일 대한민국의 보물 1759호로 지정되었다. 사정전(思政殿)은 왕이 아침에 조정회의(朝廷會議), 업무보고, 국가정책 토론 등 각종 회의가 매일처럼 열리던 곳으로 나랏일을 보던 편전의 중심 건물이며, 좌우의 만춘전(萬春殿)과 천추전(千秋殿)이 함께 편전(便殿)을 이루고 있다. 사정전은 공식업무공간으로 바닥에 마루만 깔려 있지만, 좌우의 만춘전과 천추전에는 비공식 업무공간으로 온돌방을 두어 왕과 신하들에게 편의를 제공하였다. 근정전에서 업무를 하지 않을땐 사정전에서 하였고, 날씨가 추울때도 사정전에서 집무했다

경성전의 모습이다. 1394(태조3) 경복궁 창건 당시에 정도전(鄭道傳, 1342.10.6  ~ 1398.10.6 )은 연생전과 경성전의 이름에 대해 태조에게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경성전(慶成殿)의 '경성(慶成)' 뜻은 '이룸, 완성()을 기뻐한다().'이다. 서쪽은 전통적으로 가을을 의미했고, 한 해 농사의 결실을 가을에 맺기 때문에 서쪽은 완성, 결실을 의미했다. 경성전의 맞은 편에 있는 연생전(延生殿)이며, 그 이름은 '생명의 기운을 맞이한다'는 뜻으로 경성전과는 서로 뜻이 이어지는 이름이다."

강령전(康寧殿)은 임금의 정식 침전이다. 왕도 보통사람과 마찬가지로 신이 아닌 사람이므로 자신만의 생활공간이 당연히 필요했다. 강녕전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쉽게 말해서 왕의 집이다'강녕(康寧)'은 말 그대로 '편안함'을 뜻한다. 서경(書經) 〈홍범〉편에서 '홍범구주(洪範九疇)'란 원칙이 나오는데, 거기서 언급한 다섯 가지의 복(오복: 五福) 중 세 번째인 '강녕(康寧)'에서 따왔다고 한다. 오복은 ()·()·강녕(康寧)·유호덕(攸好德)·고종명(考終命)의 다섯가지 복을 말한다.

교태전(交泰殿)은 왕비의 정식 침전, 즉 중궁전(中宮殿)이다. 교태전의 이름은 주역(周易)의 64괘 중 '11' '태괘(泰卦)' '천지교태(天地交泰)'에서 유래했다. 태괘는 위에 음()을 상징하는 곤(, ), 아래에 양()을 상징하는 건(, 하늘)이 있는 모양이다. 이것은 하늘과 땅의 기운이 서로 내려가고 올라가면서 만나 교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두고, 왕(남자, )과 왕비(여자, )가 서로 부부의 예절로 잘 지내며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뜻이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우세하다. 

건춘문(建春門)은 경복궁의 동쪽에 있는 문으로, ‘동쪽은 봄에 해당한다’는 의미로 건춘문이라 이름하였다. 이름은 봄에 해당한다’는 의미로 건춘문이라 이름하였다. 주로 왕족, 척신, 상궁이 드나들었던 문이었다. 건춘문의 앞에는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자리잡고 있으며, 건춘문의 천장에는 청룡이 그려져 있다. 문 안에는 왕세자가 거처하던 춘궁(春宮)이 있었으며, 문 밖에는 왕실의 종친들을 교육하는 종학(宗學)이 있었다. 지금은 이곳을 통하여 청와대로 들어가는 문이 되었다.

영추문(迎秋門)은 경복궁의 서쪽에 있는 문으로, 서쪽은 가을에 해당하여 가을을 맞이한다는 의미로 영추문이라 이름하였다. 문 밖에는 명당수가 흐르는 개울이 있었다. 주로 일반 관료들이 드나들었다. 영추문의 천장에는 백호(白虎)가 그려져 있다. 문 안에는 궐내 각사가, 문 밖에는 궁궐에 물자를 조달하는 관청이 자리잡고 있었다. 1865년에 준공되었던 원래 영추문은 1926년에 종로를 운행하는 전차의 진동으로 인해 석축이 무너지고 얼마 뒤 철거되어, 1975년에 원 위치가 아닌 북쪽으로 50m 이전한 자리에 목조가 아닌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해 지었다. 

영제교(永濟橋)는 근정문 앞을 흐르는 금천에 설치된 다리로 풍수지리사상에 입각하여 정전 안이 지엄하고 신성한 곳임을 나타내기 위해 정전의 외당 앞에 명당수를 흐르게 하고 그 물위로 다리를 설치한 것이다. 북악산에서 흘러들어온 물과 서쪽에서 들어온 물이 합쳐져 근정문 앞을 지나는 금천을 이루는데 영제교는 바로 이 금천에 설치한 다리이며, 덕수궁의 금천교, 창덕궁의 옥천교와 금천교도 같은 이치로 지어진 다리이다. 영제교의 길이는 13.85m, 너비는 9.8m 가량으로 비교적 넓으며 3칸으로 나뉘어 있는데 중앙이 3.4m, 그리고 양쪽이 각각 3.2m씩이다. 이 가운데가 바로 어도(御道, 왕의 길)로서 왕의 어가가 지나는 길이다. 다리 발은 홍예의 형태를 취했고 난간은 하엽동자로 돌난대를 떠받치게 하였으며, 난간 전후 법도에는 4마리의 서수가 강바닥을 뚫어져라 감시하고 있다. 

경복궁을 흐르는 금천의 지류인 또랑의 오른쪽이 바로 장고(醬)이다. 장고는 궁중연회나 제례에 쓰이는 장(醬)을 보관하던 곳이다. 북궐도형(北闕圖形)에는 함화당과 집경당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장고가 있는데, 이곳은 서쪽 장고로서 태원전과 경회루 사이에 위치한다. 큰 잔치가 있을 때는 임시주방인 숙설소(熟設所)가 장고 가까이에 설치되었으며, 장고마마(醬庫媽媽)가 장독들을 관리하였다. 

경회루(慶會樓) 모습이다. 근정전 서북쪽 연못 안에 세운 경회루는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경복궁을 처음 지을 때의 경회루는 작은 규모였으나, 조선 태종 12(1412)에 연못을 넓히면서 크게 다시 지었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돌기둥만 남은 상태로 유지되어 오다가 270여 년이 지난 고종 4(1867)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경회루도 다시 지었다. 연못 속에 잘 다듬은 긴 돌로 둑을 쌓아 네모 반듯한 섬을 만들고 그 안에 누각을 세웠으며, 돌다리 3개를 놓아 땅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앞면 7·옆면 5칸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누각건물에서 많이 보이는 간결한 형태로 꾸몄다

광화문에서 일하며 점심시간에 동료들과 함께 경복궁을 걸었다. 경복궁은 1910년 한일 병합 후 일제강점기인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개최와 1926년 조선총독부 건설로 많은 전각(殿閣)들이 철거 혹은 훼손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박물관과 잔디밭을 비롯한 정원이 들어섰다. 이런 모습은 1945년 해방 후에도 이어졌으며, 625전쟁을 거치면서 일부 전각이 추가로 소실되었다. 1968년 광화문 복원을 시작으로 경복궁의 본모습을 되찾기 위한 각계의 관심과 노력이 증대되어, 1980년대 말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이 시작되었다. 1995년 조선총독부청사 철거, 2001년 흥례문 권역 복원, 2010년 광화문 목조 복원, 2023년 광화문 월대 복원을 비롯하여 옛모습으로 역사 바로찾기의 모습을 만나보면서 만감이 교차한다. 

경복궁 입구 쪽문 옆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이다. 이곳 지하에는 조선 왕실의 예술을 감상할 수 있는 궁중서화, 왕실의 의례를 살펴볼 수 있는 왕실의례실 그리고 조선의 수준 높은 과학 문화의 역사를 볼 수 있는 과학문화실이 있다1층에는 황제국의 선포와 근대 국가로의 전환을 살펴볼 수 있는 대한제국실이 있으며, 전시실 로비에서는 순종 황제와 황후가 타던 자동차(어차)를 만날 수 있다2층에는 조선 왕조의 상징물과 기록물 위주로 전시된 조선의 국왕실과 조선 5대 궁궐의 역사와 왕실 가족들의 생활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조선의 궁궐, 왕실의 생활실이 있다. 입장시간은 주중·주말 10:00 ~ 18:00 (·토요일은 10:00~21:00)이며 입장 마감은 1시간 전까지이다.

경복궁은 신분증만 제시하면 내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이지만, 관람객들은 한복을 입고 입장하면 3,000원의 입장료가 무료란다. 그런저런 이유로도 외국인 관람객들은 한복을 입고 경복궁을 관람하는 모습들이 많이 보인다. 그 당시에는 7천여 칸이라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건축물로 거듭났었지만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절에 소수의 전각이 이전되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수천 칸의 전각이 헐리고 매각되며 조선총독부와 같이 뜬금없는 건물이 들어서는 등 궁궐내가 크게 훼손되었다. 1990년에 이르러서는 고작 36동의 건물(고종 재위 당시의 7% 수준)만 남았고, 지금도 계속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라진 전각들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여 최근 복원한 전각들도 완벽하게 원형이라는 보장은 없으며, 후일에도 완전한 경복궁의 모습을 볼 수 있을지는 지금도 미지수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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