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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홍주성(洪城)

영대디강 2021. 1. 10. 05:41

홍성 홍주읍성(洪城 洪州邑城)은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에 있는 읍성이다. 1972 10 14일 한민국의 사적 제231호 홍주성(조양문, 아문, 산성)으로 지정되었다가 2011 7 28일 홍성 홍주읍성으로 명칭변경되었다.

홍주성은 조선 세종 때 쌓은 석성인데 그 이전부터 토성이 있었다. 홍주성 역사관 쪽으로 이어진 언덕이 바로 토성의 흔적이다. 성곽은 총 1.7km에 이르는데 지금은 800 m밖에 남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많이 헐린 데다 1978년 홍성 지진 때도 일부 무너졌다고 한다. 홍주성 사방으로 문이 각각 있었는데 서문과 북문은 소실되어 터만 남고, 남문은 2013 12월 홍화문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홍성은 고려시대에 운주로 불린 이후 천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고장이다. 운주로 시작되어 홍주로 불리다 일제강점기에 홍주군과 결성군을 합쳐 홍성이 되었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유명한 위인도 많이 난 곳이다.

홍주성 천년여행길은 홍성의 천년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길이다. 홍주성을 중심으로 대교리 석불과 당간지주 등 문화유산과 홍성전통시장의 정겹고 활기찬 풍경을 차례로 만나게 된다. 홍성의 흘러간 역사뿐 아니라 현재의 모습도 생생하게 둘러볼 수 있다.

충남 홍성의 천주교 성지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홍성의 천주교 성지는 전국에서 두 번째로 순교자가 많은 곳으로 천주교 수난의 역사적인 현장이기도 하다. 이곳에 홍성은 212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곳이며, 알려지지 않은 신앙인까지 포함하면 1000여 명이 넘게 순교를 한 곳이다. 그뿐만 아니라 홍성은 천주교 신자로 옥중에 세례를 받은 원시장이 순교한, 충청도에서는 첫 순교터이기도 하다.

십자가 형틀위에 소복하게 내려 쌓인 하얀 눈을 바라보면서, 내가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지은 죄악도 역시 저렇게 하햔 모습으로 남아있으리라 생각하자니 저절로 자숙하는 회개의 마음이 된다.

홍성 천주교 성지에는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찾고 있다. 처음 이곳 홍성이 천주교 성지라는 것조차 알려지지 않았을 때, 홍성을 방문한 천주교 신자들에 의해 입소문으로 전해져 지금은 많은 교인들이 성지순례를 하고 있는 것이다. 홍성의 천주교 성지는 다른 지역의 성지보다 특별하다. 순교 터가 있는 곳은 과거 조선 시대 홍주(홍성의 옛 지명)를 관할하던 관청이 있던 자리고 현재도 홍성군청이 있는 곳이다.

홍주성 천년여행길은 지금까지 천년을 한결같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을 지켜오며 그 찬란한 천년 역사를 품에 안고 있는 내포의 큰 고을 홍주를 돌아보는 길이다. 홍주성 천년여행길은 희망찬 홍성을 상징하는 고암길과 서민경제의 심장과 같은 장터길, 도심속 답답한 몸과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힐링 공간인 매봉재길,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홍주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고스란히 간직한 홍주성길, 근 현대를 넘나드는 추억의 골목길로 이루어져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에서 겨울에 걷기 여행 길로 선정된 곳이 충남 홍성 홍주성 천년 여행길이다. 코스경로 : 홍성역 ~ 김좌진장군오거리 ~ 홍성전통시장 ~ 대교리미륵불 ~ 홍주의사총 ~ 매봉재 ~ 홍주향교 ~ 대교공원 ~북문터 ~ 서문터 ~ 홍주성벽 ~ 남문 ~ 홍주성역사관 ~ 홍성군청 ~ 동문 ~ 명동상점가 ~ 당간지주 ~ 뽕뽕다리 ~ 홍성천벽화 ~ 홍성전통시장 ~홍성역으로 거리 8km, 소요시간은 약 3시간이다.

이곳은 오랜 역사만큼이나 유명한 위인도 많이 난 곳이다. 생가가 남아 있는 김좌진 장군, 만해 한용운뿐 아니라 고려 말의 명장 최영 장군, 사육신 성삼문이 태어난 곳도 홍성이다. 긴 역사를 자랑하는 홍성에는 홍주성을 중심으로 천년 역사를 가늠해볼 수 있는 홍주성 천년여행길이다.

김좌진장군은 1920 10 20일부터 26일까지 있었던 청산리전투를 총지휘하여 일본군 제1921사단을 상대로 격전을 벌여 3,300여 명의 일군을 섬멸시키는 독립군 사상 최대의 전과를 올렸다. 그 뒤 부대를 흑룡강 부근으로 이동,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하여 부총재를 지냈다.

만해 한용운은 1879 8 29 충남 홍성군(洪城郡) 결성면(結城面) 성곡리(城谷里) 491번지에서 아버지 한응준(韓應俊) 어머니 온양 방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정옥(貞玉), 속명은 유천(裕天), 계명은 봉완(奉玩), 법호는 만해(萬海)이다. 그의 가문에서는 이름있는 무장이 많이 배출되었다. 부친 응준은 5품의 충훈부(忠勳府) 도사(都事) 선략장군행충무위부사용(宣略將軍行忠武威副司勇) 지냈고, 조부 영호(永祜) 4품의 선략장군행훈련원첨정(宣略將軍行訓練院僉正) 지냈으며, 증조 광후(光厚) 2품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가선대부행용양위호군(嘉善大夫行龍驤衛護軍) 지냈다. 그가 태어날 무렵 집안은 얼마간의 경제적 실력과 유교적 교양을 지닌 농촌중산층 정도였다. 부친 응준은 동학농민운동 동학군을 진압하는 행목사(行牧使) 임명되었다.

성삼문은 1418(태종18)출생하여 1456(세조2)에 유명한 사육신으로 죽음을 당했다. 외가인 홍주(洪州) 노은골에서 출생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 하고 묻는 소리가 3번 들려서 삼문(三問)이라 이름지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조선 세조 때 단종의 복귀를 꾀하다 죽은 사육신 중 한 사람으로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근보, 눌옹, 호는 매죽헌이며 세종 17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식년시에 응시해 하위지와 함께 급제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 정인지, 신숙주 등과 함께 이를 도왔고, 신숙주와 함께 명나라와 왕래하며 정확한 음운을 배우고 제도를 연구하는 등 훈민정음 반포에 큰 공헌을 했다.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단종복위운동을 결심하고 세조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김질이 세조에게 이를 밀고하는 바람에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체포돼 고문을 당하고 후에 성승, 하위지 등과 함께 능지처형을 당했다.

최영(崔瑩)장군은 1316년 동주 최씨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동주는 철원의 옛 이름이고 동주 최씨의 시조 최준옹은 왕건을 도와 고려를 세운 건국 공신이다. 아버지 최원직은 16세의 최영에게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최영은 평생 그 유언을 지켰다. 최영은 청렴한 인물의 대명사로 알려졌지만, 1388년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파에게 반역죄로 개경에서 처형당했다. 그는 죽음에 임해서 "내가 평생에 만약 탐욕의 마음이 있었다면 무덤 위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그의 무덤위에는 풀이 나지 않았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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