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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새재옛길(聞慶)

영대디강 2021. 2. 28. 05:25

문경새재는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에 있다. 충청북도와 경상북도 경계에 위치한 이화령 휴게소에서 문경으로 3 국도를 따라 6.5㎞쯤 가면 왼쪽에 진안리 검문소와 함께 문경새재 1관문으로 가는 2 시도로가 나온다. 2 시도로를 따라 2.5㎞쯤 가면 1관문 주차장에 도착한. 주차장에서부터는 걸어서 문경새재를 넘어야 한다 1관문 주차장 주변에는 지역특산품을 파는 상점과 음식점 호텔 등이 있다.

‘새재’라는 이름의 유래는 매우 다양하다. 고갯길이 워낙 높아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는 데서 유래했다고도 하고, 고갯길 주변에 (억새) 많아 ‘억새풀이 우거진 고개’라는 뜻이라고도 한다. 또한 하늘재(麻骨嶺) 이우리재(伊火峴) 사이의 고갯길을 의미하는 ‘새(사이)재’에서 연유했다는 주장이 있고, 하늘재를 버리고 새로 만든 고개라는 뜻에서 이름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새재의 어원에는 많은 유래가 있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은 지리학자들이 말하는 ‘새로 고갯길’이다.

문경새재는 영남과 기호 지방을 연결하는 대표적인 옛길이었다. 선비들이 장원급제를 꿈꾸며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넘나들던 길로, 문경(聞慶)이라는 이름과 지명인 문희(聞喜)에서 드러나듯 ‘경사로운 소식, 기쁜 소식을 듣게 된다’는 의미도 과거길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연유로 문경새재는 급제를 바라는 많은 선비들이 좋아했던 고갯길이었다. 그래서 영남은 물론 호남의 선비들까지 굳이 길을 돌아 길을 택하기도 했다. 《택리지》에도 “조선 선비의 반이 영남에서 배출되었다”라는 구절이 있음을 참으로 수많은 선비와 길손들이 이곳을 왕래하였음을 헤아릴 있다.

새재에는 관문이 있다. 영남 선비들이 과거보러 가던 길을 따라, 문경 쪽으로부터 수안보를 향해 주흘관이라는 이름을 가진 1관문, 조곡관이란 현판이 걸린 2관문, 조령관이라 불리는 3관문이 차례로 놓여 있다. 1관문부터 2관문까지는 3.0, 2관문에서 3관문까지는 3.5, 합하면 6.5㎞로 10리에 5리를 가고도 조금 가야 하는 길이다. 새재를 넘는 길은 영남사람들이 서울 가는 방향대로 문경 쪽에서 수안보로 가는 방법이 있고, 반대로 서울에서 문경으로 오는 방향으로 수안보에서부터 넘는 방법이 있다. 문경에서 수안보로 가는 123 관문 차례는 오르막길이고, 반대는 내리막길이다.

새재는 하도 험하고 높아서 대낮이라도 혼자서는 넘지 못하고 반드시 사람이 모이길 기다렸다가 넘었으며, 날이 저물었을 때에는 밑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에야 다음날 낮에 넘을 있다고 하였다. 험준함 때문에 나는 새도 쉬어간다는 뜻에서 이름이 ‘새재’[鳥嶺] 되었다고도 하고, ‘새로 고개’의 뜻으로 ‘새재’로 부른다고도 한다. 한편 조령산과 주흘산의 깎아지른 골짜기 ‘새’로 길이라 ‘샛재’인데 발음하기 좋게 ‘새재’가 되었다고도 한다. 경상도에서 ‘쌔’라고 부르는 억새가 많아서 ‘새재’라 불렀다고도 하는데, 이름에 연유하여 한자로는 ‘초점’(草岾)이라고도 했다. 아마 모두가 저마다 ‘새재’로 부르게 까닭이다.

새재는 동경 128°03, 북위 36°45′에 위치하며, 높이는 642m이다. 마역봉(920m) 깃대봉(835m)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1966년에는 문경 조령 관문이 사적 147호로, 1981년에는 일대가 문경새재도립공원으로 각각 지정되었다. 2007년에는 문경새재가 명승 32호로 지정되었다.

새재 또는 문경새재라고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조령(鳥嶺)이라 하지만 세상에서는 초점(草岾)이라고도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새재는 새나 넘나들 있는 험한 고갯길이라는 뜻에서 붙여졌고, 초점은 풀이 우거진 고갯길이라는 뜻이다.

옛날 문경새재 인근에 살던 큰 부자가 천신마고 끝에 아들을 얻었으나, 너무도 병약하여 문경의 유명한 도사에게 물었더니, '당신의 집을 둘러 싼 돌담이 아들의 기운을 누르고 있으니 아들이 직접 돌담을 허물어 문경새재 책바위 뒤에 탑을 쌓아 치성을 드리면 장원급제를 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도사가 알려준대로 3년동안 돌을 옮겨 쌓는 동안 아들은 건강이 회복되었으며 장원급제까지 하였단다. 이후 지금도 입시철만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책바위' 앞에서 기도를 드린다.

조령원터로 지금은 터만 남아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길가는 관리나 길손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던 곳이다. 원터 안에서 조선시대와 고려시대의 집자리가 발굴되었는데 집에는 온돌시설이 되어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조령관문과 영남로 주변의 유적지들, 조령천 곳곳의 옥녀탕·용추·선녀소 등을 포함한다. 주변에 수옥폭포(漱玉瀑布)·이체불(二體佛)·혜국사(惠國寺)·진남교(鎭南橋) 알려지지 않은 절경이 많다. 동화원(桐華院) 비롯하여 () 군창(軍倉) 경상감사의 신임자와 후임자가 만나 서로 공문서에 날인하였다는 교구정(交龜亭) 등이 남아 있다.

광해군 시절에 서출이라는 이유로 벼슬길이 막힌 박응서를 필두로 7의 서자들이 신세를 한탄하며 북한강 일대에서 '죽림칠현'을 자처하며 시와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생활이 궁핍해지자 결국 도적으로 변하여 이곳 문경 조령 마당바위에서 은신하며 지나가는 상인을 살해하고 수백냥의 은자를 약탈하게 된다. 이들은 곧 포도청에 잡혀왔으나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허위자백으로 많은 사람들이 역모죄로 사사된 '계축옥사'가 벌어지게 되었다.

갑자기 소나기가 퍼붓던 어느날, 문경새재를 지나던 남녀가 각자 비를 피하기 위해 바위굴로 들어 왔다가 우연히 만나 깊은 사랑을 하게 된 후 헤어진 이후에 여인은 홀로 아기를 낳게 되었는데, 아이가 성장하자 새재 바위굴에서 아버지와 만나게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후 아이는 아버지를 찾아 헤매다가 마침 비가내려 이 주막을 찾게 되었다. 이 주막에서 만난 중년의 선비가 중얼거린 한마디에 아버지임을 알아보게 되는데.... "어허! 참. 그 빗줄기가 마치 새재우 같구나!".   

왼편으로 ‘주막’ 표지판이 의젓하게 걸려 있는 채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아픈 다리도 쉬어갈 , 마른 목도 축일 , 새재 넘는 기분도 살릴 기대를 들어서면 안된다. 집은 새재를 넘기 전에 이쯤에서 쉬어갔다는 옛이야기에 따라 어림으로 건물만 덜렁 지어놓았을 뿐이지 술이나 안주를 팔기는커녕 지키는 사람조차 없다.

‘交龜亭址’라는 표지가 하나 있다. 떠나가는 관찰사와 새로 부임하는 관찰사가 업무를 ‘인수인계’하는 장소로 즐겨 이용했다고 하는데 아마 신임 관찰사를 맞아 작은 술자리를 마련했던 곳이 아닌가 한다. 교구정의 건립은 문경관문이 설치된 시기보다 200년이나 앞서는 1484(성종 15) 일이었다. 현감 신승명이 8선녀가 놀았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팔왕폭포(용추) 아름다운 풍광에 이끌려 건립했다고 한다.

소원성취탑을 지나면서 돌하나를 집어올려 놓았을 뿐인데, 교구정터 앞에서 태양이 내 앞길을 화안하게 비추이고 있어서 사진으로 남겼단다.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다. 내게 무슨 소원이 있겠는가? 지금까지의 삶에 감사하면서 전생에 노비였을 것이니 앞으로 남은 인생에서도 더 낮은 자세로 비움, 나눔과 봉사로 살아가게 해 달라는 바람을 마음속에 빌었을 뿐이다. 아마도 그 소원이 이루어 질 거 같다.

2관문은 조곡관(鳥谷關)으로 양쪽 절벽이 깎아지른 솟아 있으며, 지금은 문루가 없어진 관문만 남아 있다. 3관문은 조령관(鳥嶺關)이다. 숙종 북적을 막기 위해 조령산성을 쌓았으며,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육축(陸築) 남은 불타버렸다. 1976 복원되어 사적 147호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영남 제1관문은 한 곳일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문경' '대구', '김천' 3곳이다. 한 곳밖에 없을 것 같은 '영남 제1관문'이 대구·경북에서 3곳이나 되니 관광객들이 헷갈리기도 한다. 그러나 3곳 모두 '영남 제1관문'일 수밖에 없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고 주변에 유서 깊은 문화유산도 많아 관광명소로도 우리나라 제1관문이다.

문경새재는 알려진 고갯길이다. 새재에서 한반도의 서남쪽 끝에 위치한 진도에서 부르는 〈진도아리랑〉에도 사설의 대목으로 등장할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과도 관련이 깊은 곳이다. 새재는 경상북도 문경읍과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에 위치한 고개로 조선시대 영남과 한양을 잇는 1대로였던 영남대로에 위치하고 있다.

중부지방과 영남지방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으며, 험한 지세를 이용했던 군사상의 요충지였다. 본래 양반이 다녔던 옛고개와 보부상들이 다녔던 큰고개·작은고개, 평민들이 다녔던 가장 험준한 하늘고개 4개의 고개가 있었다. 현재 길은 이화령에서 수안보로 통하는 국도가 뚫린 사적지로 바뀌었다. 고개를 이루는 산릉은 남북으로 뻗어 있으며, 동쪽 산곡의 조령천을 따라 있는 길에 1708(숙종 34) 남북 8km 돌로 쌓고 중간에 조령 1·2·3관문을 세웠다.

주흘산과 조령산 일대는 울창한 숲과 계곡이 어우러져 등산객들의 더위를 식혀주며, 특히 가을단풍과 겨울설경이 빼어나다. 3관문이 있는 주흘산에는 혜국사와 여궁폭포 등이 있다. 산의 대표적인 등산로는 1관문-여궁폭포-혜국사-샘터-주흘산 정상-2관문으로 이어지는 길이며, 주변에는 부봉·미역봉·조령계곡·주흘계곡·조령산성·군막터·쌍용폭포·팔왕폭포·대궐터·뱀바위 등이 절경을 이룬다.

교구정터를 지나 올라가면 비뚤어지면 비뚤어진 대로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비석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비석에는 고졸한 필치로 ‘산불됴심’이라고 새겨져 있다. 조선 후기에 세워졌으리라고 여겨지는 비석은 처음 세워진 때부터 여지껏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듯하다. 요즈음에도 흔한 표어 ‘산불조심’ 자체가 낯익기도 하지만, 한글로 새겨져 있어 더욱 이채롭다. 이를 귀히 여겨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226호로 지정했다. 현존하는 유일한 순 한글비석이며, 18세기 당시 산불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문구이면서 구개음화가 활발해진 시대상을 반영하여 역사적 가치가 높다.

관문을 잇는 새재길을 한적한 산속의 오솔길로 연상하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관광지로 개발하면서 5m 안팎의 흙길로 맨발로도 걸을 수 있도록 단장했는데, 옛모습을 고스란히 지닌 부분은 귀하게 되어버렸다. 자동차가 서로 조심스레 엇갈려 지나갈 만한 너른 길이지만 자동차 통행은 금지되어 있다.

수 백년 간 민초들의 발길이 이어져 온 문경새재 황톳길은 과거를 보러가던 영남 선비들도, 문건을 팔러 가던 장돌뱅이들도, 왜적을 막으려고 의연히 일어선 의병들도, 박해를 피해 숨어들던 천주교도들도 저마다의 간절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 지났던 곳이기에, 선조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문경새재 옛길은 숨겨진 이야기마다 가슴에 담고 싶다.

문경에는 약돌한우와 약돌돼지가 약돌타운으로 문경시 가은읍 일원에서만 특화 있으며, 게르마늄 등의 특수 기능성분을 함유한 거정석(화강암) 5g 사료에 첨가해 기른 약돌한우와 약돌돼지로 사육하여 고기색이 진하고 맛이 부드러운 특징이 있다. 또한, 광부들이 먹었다는 족살찌개가 있는데 문경시의 대표 브랜드 음식으로 탄광 막장에서 하루 종일 일하던 광부들이 석탄가루를 씻어내기 위해 즐겨 먹었던 음식으로 지역의 특색을 살린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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