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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제8회 지방선거일(지방자치단체장 및 기초의원 선거)이라 휴일이라서 투표를 마치고, 서울 강남구 선릉로 100길 1의 도시공원에 위치한 선릉(宣陵) 과 정릉(靖陵)을 찾았다. 지하철 2호선으로는 분당선 선릉역 10번출구에서 도보 7분 거리이며, 9호선으로는 분당선 선정릉역 3번출구에서 도보 16분 거리이다. 이곳은 조선 왕릉으로 세 개의 능이 있다고 하여 삼릉공원이라고도 불린다. 이 곳에는 조선 제9대 임금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무덤인 선릉과 제11대 임금 중종의 무덤인 정릉이 있다.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합쳐 선정릉(宣靖陵)이라 하는데, 선릉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선릉(宣陵)은 성종과 그의 비 정현왕후 윤씨가 안장된 능이며, 정릉(靖陵)은 중종이 안장된 능이다. 사적인 「서울 선릉과 정릉」은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금싸라기 땅인 서울 도심 강남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어서 수많은 내·외국인의 관광명소이자 지역주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유산이다.

선릉과 정릉은 임진왜란 때 파헤쳐져 재궁이 전부 불타 버렸기 때문에, 선릉과 정릉의 세 능상 안에는 시신이 없다. 이런 슬픈 역사를 다시는 겪지않기 위하여 선조들의 얼과 정신이 깃든 문화유산을 잘 보존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이곳 선릉과 정릉을 방문하는 관람객들에게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관리하겠다며, 1970년5월26일 사적 199호로 지정한 기념으로 대한민국에서 세운 선릉과 정릉 표지석이다.

입구 매표소에서 부터 오뉴월의 무더위가 기를 펼 수 없을만큼 아름드리 나무들이 짙은 그늘을 드리운 오솔길을 따라 걷는다. 수도 한가운데인 도심의 서울에도, 그것도 강남 한복판에 이런 근린공원같은 한가롭고 여유로운 숲길이 있다는게 믿기지 않을 만큼 쾌적하게 맑은 공기가 온 몸을 감싸고 돈다.

초록숲에 묻혀 한방향으로 난 오솔길을 걷다보면, 온통 내 몸이 초록빛 한덩어리로 물들여져 이곳이 파라다이스라는 착각에도 빠지게끔 만들어 준다. 이미 500여년 전에 이곳에 묻히신 분들도 이곳이 천년 명당임을 이미 알아 본 후손들의 지혜에 감탄을 하시지 않았을까... 그런 엉뚱한 생각도 하면서....

정릉에서 선릉으로 돌아서 올라가는 언덕길에 계단으로 만든 데크가 흡사 명인의 작품인 듯 명품으로 느껴진다. 꼼꼼하고 아담하며 오르막에 부담을 전혀 느끼지 않도록 천천히 돌아가도록 부드러운 길을 낸 그 지혜로움에 관람객은 오르내리면서 자연스럽게 감탄하며 문화재 사랑에 그저 감사한다.

정릉은 조선 11대 왕 중종의 능이다. 단릉의 형식으로 왕 한분만 모신 능이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능침은 선릉과 같이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석양과 석호의 전체적인 자세는 선릉과 비슷하면서도 세부적인 표현에 있어서는 조금 더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문무석인은 높이가 3m가 넘을 정도로 큰 편이며, 얼굴의 퉁방울눈이 특이하며 코 부분이 훼손되고 검게 그을려 있다.

1544년(중종 29)에 중종이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545년에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 윤씨의 희릉 서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고 능호를 정릉(靖陵)이라 하였다. 그러나 17년 후인 1562년(명종 17)에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 윤씨에 의해서 중종의 능을 선릉 부근으로 천장하였다. 문정왕후는 봉은사 주지였던 보우와 논의하여, 중종의 능침이 풍수지리상 좋지 않으므로 선릉 동쪽 언덕이 풍수상 길지라 하여 천장한 것이었으나, 지대가 낮아 비가 오면 홍수 피해가 자주 있던 자리였다. 결국 중종과 함께 묻히기를 바랐던 문정왕후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현재 태릉(泰陵)에 능을 조성하였다. 그 후 정릉은 임진왜란 때 선릉과 함께 왜구에 의해 능이 파헤쳐지고 재궁이 불태워지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중종(재세 : 1488년 음력 3월 5일 ~ 1544년 음력 11월 15일, 재위 : 1506년 음력 9월 2일 ~ 1544년 음력 11월 15일)은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의 아들로 1488년(성종 19)에 태어났다. 1494년(성종 25)에 진성대군(晋城大君)에 봉해졌고,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왕위에 올랐다. 중종은 연산군대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 새로운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새로운 개혁정치를 표방한 조광조를 내세워, 훈구세력을 견제하고 사림을 등용하였으나, 소격서 폐지, 위훈삭제 등 급진적인 정책이 큰 반발을 불러와 기묘사화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회적으로는 향약이 전국적으로 실시되어 유교적 향촌질서가 자리를 잡았으며, 인쇄술의 발달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많은 서적이 편찬되었다. 경제적으로도 동전의 사용을 적극 장려하고 도량형의 통일을 꾀하였으며, 사치를 금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544년(중종 39)에 창경궁 환경전에서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성종의 왕비 정현왕후 윤씨(재세 : 1462년 음력 6월 25일 ~ 1530년 음력 8월 22일)는 본관이 파평인 영원부원군 윤호와 연안부부인 전씨의 딸로 1462년(세조 8)에 신창 관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윤창년(尹昌年)이다. 1473년(성종 4)에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淑儀, 종2품)에 봉해지고, 1479년(성종 10)에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폐비되자 이듬해인 1480년(성종 11)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적송이 꼼꼼하게 늘어선 곳을 걸으며 내 어린시절을 생각했다. 우리동네에도 말뫼를 돌아 올라 서당집 선산으로 올라가면 이런 소나무 숲이 있었다. 커다란 고목같은 소나무에 올라가 얼기설기 나무집도 지어 놓고 여름밤을 친구들과 함께 보내다가 나뭇가지가 부러져서 맨땅으로 굴러 떨어지기도 했고, 휴일날이면 나무를 타고 올라가 우둥지 그늘에 숨어 숨바꼭질도 하면서 놀았던 그 때 그 시절.....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폐비된 이후 중전의 자리에 오른 정현왕후는 연산군을 친아들처럼 키웠고, 연산군 역시 정현왕후 윤씨를 친어머니로 알고 자랐다. 그러나 연산군은 즉위 후 성종의 능지문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폐비 윤씨의 아버지 윤기견(尹起畎)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하고는, 자신이 친어머니로 알고 있던 정현왕후 윤씨의 아버지 윤호(尹壕)를 잘못 표기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던질 만큼 폐비 윤씨의 존재를 몰랐다. 이 질문에 승지들이 비로소 윤기견과 폐비 윤씨에 관한 일을 아뢰었고, 연산군은 그때서야 자신의 친어머니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연산군은 정현왕후를 해치지 않았고, 정현왕후의 아버지 윤호가 폐비 윤씨의 복위를 앞장서 반대했음에도 정현왕후에 대한 예우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선릉은 조선 9대 성종과 왕비 정현왕후 윤씨의 능이다.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서쪽)이 성종, 오른쪽 언덕(동쪽)이 정현왕후의 능이다. 폐비 윤씨의 비극적인 최후를 바라본 정현왕후는 성종에게 매우 관대하였다. 이에 성종은 ”다행히 어진 왕비를 찾아 마음이 평안하다.”고 흡족해 하였다. 연산군 즉위 후 자순왕대비가 되었으며, 1506년(중종 1)에 중종반정으로 진성대군의 즉위를 허락하기도 하였다. 그 후 1530년(중종 25)에 경복궁 동궁 정침에서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수복방, 수라간,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성종의 능침은 『국조오례의』의 예를 따라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고,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 석호 등을 배치하였다. 정현왕후의 능침은 병풍석만 생략하였을 뿐 성종의 능침과 같은 형태이다. 난간 석주의 윗부분에는 초기 난간석의 부드러운 맛이 그대로 남아 있고, 문무석인은 윤곽과 조각이 섬세하고 아름답다

1494년(성종 25)에 성종이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495년에 광주 학당리(현 선릉)에 능을 먼저 조성하였다. 원래 이 자리는 세종의 아들인 광평대군묘역이 있던 자리였으나, 선릉이 조성되면서 광평대군묘역은 현재 강남구 수서동으로 이장되었다. 그 후 1530년(중종 25)에 성종의 왕비 정현왕후 윤씨가 세상을 떠나자 선릉 동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다. 선릉은 유독 수난을 많이 겪었다. 그 첫 수난은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선조 26)에 일어났다. 『선조실록』 1593년 4월 13일자의 기사에는 “왜적이 선릉과 정릉을 파헤쳐 재앙이 재궁에까지 미쳤으니 신하로서 차마 말할 수 없이 애통합니다.”라는 경기좌도관찰사 성영의 치계와 “이 서장을 보니 몹시 망극하다. 속히 해조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치하게 하라.”는 선조의 명이 기록되어 있다. 1625년(인조 3)에는 정자각에 불이 나고, 그 다음해에는 능침에도 불이 났다.

성종(재세 : 1457년 음력 7월 30일 ~ 1494년 음력 12월 24일, 재위 : 1469년 음력 11월 28일 ~ 1494년 음력 12월 24일)은 추존 덕종(의경세자)과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의 둘째 아들로 1457년(세조 3)에 경복궁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아버지 의경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할아버지인 세조가 잠시 궁중에서 키웠는데, 성품이 돈후하고 서예와 서화에도 능하여 세조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1461년(세조 7)에 자산군에 봉해졌고, 숙부 예종이 1469년(예종 1)에 세상을 떠나자 할머니인 정희왕후 윤씨의 명으로 예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1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정희왕후 윤씨의 수렴청정을 7년 동안 받았으며, 1476년(성종 7)에 친정(親政)을 시작하였다. 성종은 법령을 정리하여 세조대에 부터 편찬해오던 『경국대전』을 1485년(성종 16)에 반포하였고, 1492년(성종 23)에는 『대전속록』을 완성하여 유교적 통치의 전거가 되는 법제를 완비했다. 세조 측근 공신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신진 사림세력을 등용하여 훈신과 사림 간의 세력 균형을 이루게 함으로써 왕권을 안정시키고, 조선 중기 이후 사림정치의 기반을 조성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 후 1494년(성종 25)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38세로 세상을 떠났다.

성종은 백성들이 사는 것을 둘러보기 위해 미행(임금이 변복을 하고 궁궐 밖에 나가 민정을 살피는 것)을 자주 했다고 전해진다. 사람들은 성종이 궐 밖을 다니며 겪은 일화들을 입에서 입으로 전해왔다. 어느 해 겨울, 성종이 여느 때처럼 미행을 나갔을 때, 남산골 초라한 오막살이에서 글 읽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다. 담은 무너지고 서까래가 썩어가는 누추한 곳이었는데, 『춘추좌전』을 읽는 소리가 물 흐르듯 막힘이 없었다. 성종은 등불이 꺼져 불을 얻고자 한다는 핑계를 들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글을 읽던 선비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가 지은 문집을 읽어본 성종은 선비의 해박함과 그 문집의 명문에 깜짝 놀랐다. 훌륭한 학식을 갖춘 선비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어려운 살림을 하는 것이 안타까웠던 성종은 선비 몰래 쌀과 고기를 그 집에 보내고, 예정에 없던 과거령을 내렸다. 그리고는 그 선비의 문집에서 본 글을 과제로 내걸고, 선비가 과거에 응시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선비의 문집에 있던 글이 제출되자, 성종은 더 살펴볼 것도 없이 그 글을 장원급제를 시켰다. 그런데 글을 지은 사람의 이름이 그 선비의 이름이 아니었다. 이상하게 여겨 장원급제자를 들이라 하였는데, 주인공은 선비가 아닌 새파란 젊은이였다. 자초지종을 묻자 젊은이는 “그 분은 저의 스승이었는데, 이번 과거를 꼭 보시려고 했으나, 며칠 전 굶주리다가 갑자기 먹은 고기 때문에 크게 병이 나서 돌아가셨다.”고 답하였다. 성종은 안타까움에 크게 탄식하였다고 한다.

선릉과 정릉에는 각각 성종과 중종의 시신이 없는 상태이다.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선 조정에서는 일본 측에 선릉과 정릉을 도굴한 범인을 잡아서 압송할 것을 요구했고 그 결과 2명의 도굴범을 잡았다고 대마도에서 도굴범들을 조선으로 보냈지만 모두 가짜임이 드러났다. 그러나 외교적 파장을 생각한 것인지 조선 조정에서 이 쯤에서 덮어두기로 하면서 유야무야 되었고 결국 압송된 대마도민 2명은 참수당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참으로 신비롭게 느껴진다. 선릉의 주변에 심기워진 소나무들이 모두 능쪽을 향하여 가지가 그방향으로만 뻗어 있는 모습이 흡사 당상관들이 임금님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같아서 신기하다. 그 쪽이 햇볕이 잘 드는 동쪽도 아니고, 볕을 잘 받는 남쪽도 아닌데 왜 이 나무들은 한방향으로 모두 능을 향하여 가지를 뻗고 있을까?

왕릉을 지키는 능참봉의 집이란다. 너무 작고 아담하여 흡사 어린이들의 장난감같은 이 모습에서 우리들 후손은 마음이 아파온다. 돌아가신 분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서 살아야만 했던 그 시절의 지위와 신분의 차이가 이처럼 대단했다는, 사실에 역사는 가끔씩 우리에게 만인의 평등이라는 깨달음을 준다.

선릉과 정릉의 역사와 공간, 임진왜란 피해, 선릉과 정릉의 원찰 등이 전시된 역사문화관이다.

선릉로(宣陵路 )는 구룡마을입구 사거리에서 압구정동 한양아파트까지 잇는 도로로, 길이 6.4km, 폭 20m(왕복 4차선)이다. 이 길이 지나는 곳에 조선의 성종과 정현왕후의 능인 선릉이 있어서 선릉로로 명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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