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나의 이야기

갈산공원(楊平)

영대디강 2022. 6. 12. 05:04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양평체육공원길 24에 있는 갈산공원이다. 갈산(葛山)은 칡이 많다고 하여 붙은 양평읍의 옛 이름이다. 남한강변에 위치한 양평 생활체육공원을 갈산공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양평역에서 약1km 떨어진 공원으로, 봄이면 벚꽃의 명소로도 아주 유명하다.

갈산을 지나는데/ 풍광이 몹시 아름다웠다// 유리처럼 맑은 강물이/하얀 모래에 넘실대고// 오리와 갈매기는 햇빛을 쬐다가/옅은 노을로 날아가네// 강가운데에서 뱃시공은/ 잠시손을 멈추고// 웃으면서 용문산을 가리키는데/달 그림자 비끼어 있네//.

이곳의 하천은 북한강이 서쪽에서 남서류하고 남한강은 남서 지역을 북서류하여 양수리에서 합류하여 한강의 본류로 흐른다. 북한강은 지류로 수입천(水入川)·문호천(汶湖川)이 있고 남한강 지류는 흑천(黑川)이 있다.

양평역에서 원덕역까지 10.8km의 트레킹 코스인 물소리길이 있다. 남한강변을 따라 조성한 산책로는 자전거 길의 일부이기도 하다. 대중교통으로도, 자전거로도 접근하기에 아주 좋은 공원이다. 체육공원 내에는 축구장, 게이트볼장, 배드민턴장, 탁구장 등의 시설이 있다.

물소리길은 남한강과 북한강의 맑은 물소리와 자연의 소리를 느낄 수 있는 걷는 여행길이다. 아늑한 옛 고향의 따스함처럼 여유로운 삶의 행복을 느껴보려면 이 길을 걸으면 된다. 물소리길 도보여행 시간은 08:00~18:00(동절기 17:00)까지 이며, 코스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확인하고 표식이나 안내지도 및 앱을 이용하여 지정노선을 벗어나지 않도록 걸어야 한다.

갈산공원에 세워진 월남참전 국가유공자 기념비는 국가의 명령을 받고 세계 평화와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UN의 참전국 일원으로 미국, 호주, 뉴질랜드, 한국군은 공산국가인 북월맹군이 남월남을 침공하여 공산화하려는 것을 막기 위해 건국 이래 1964.7월 대한민국 국회가 의결하여 1964.9.11부터 1973.3.23.일까지 8 8개월 동안 연인원 50,000여명 총 인원 324,000명이 파병되었다.참전군인 중 전사 5,099, 부상 11,232, 실종 4명이 발생하였고 159,232명이 고엽제 등으로 인한 후유증을 앓고 있는 참전용사가 발생하였다. 그중 양평군 월남전 참전용사 724명의 희생을 기리고자 월남 참전 기념비가 세워졌다. 그들이 모두 내 친구들이기에 함께 앉아 동상 친구가 내 어깨를 감싸안고 사진을 찍으면서도 가슴속에 만감이 교차함을 어쩔 수가 없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모를/ 이름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되어 맺혔네./ 궁노루산 울림 달빛 타고/ 달빛 타고 흐르는 밤/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이곳의 역사는 양평읍 회현리, 강상면 병산리, 양동면 단석리, 용문면 삼성리 등지에서 긁개찍개·사냥돌 등이 출토되어 한강변을 중심으로 하여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은 용문면 광탄리에서 빗살무늬토기와 석부가 발견되었다.청동기시대의 유적은 강상면 병산리·대석리, 강하면 전수리, 양서면 대심리, 서종면 수릉리, 개운면 앙덕리 등지에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으며, 개군면 상자포리, 강하면 전수리·양수리에서 민무늬토기와 석기 등이 발견되었다.

삼국시대의 이 지역은 백제에 속했으나 475(장수왕 65) 고구려의 남진으로 고구려의 양근현(楊根縣)이 되었다. 551(진흥왕 12) 신라의 정예군단이 한강 유역의 고구려 영토를 공략하여 그 세력이 지금의 충주·양평·여주·포천의 남한강과 북한강 유역에 미쳤을 때에는 신라의 지배권 내에 들어갔다.

삼국통일 후 경덕왕 때는 빈양현(濱陽縣)으로 개명되어 기천군(沂川郡: 지금의 여주시)의 영현이 되기도 하였다. 889(진성여왕 3)에는 궁예가 이 지방을 공략하여 그들의 활동무대로 삼기도 하였다. 지평군은 고구려시대에는 지현현(砥峴縣)으로 불리다가 삼국통일 후 경덕왕 때 지평현(砥平縣)으로 개칭되어 삭주(朔州: 지금의 춘천)의 영현이 되기도 하였다.

940(태조 23) 옛 지명이 회복되어 양근현으로 되었다. 1018(현종 9) 잠시 광주목(廣州牧) 영내에 소속되었다가 1175(명종 5) 양근현에 감무가 파견되었다. 1257(고종 44) 영화(永化)로 개칭되었으며 고종 연간에 있었던 여러 차례의 몽골병 침입 때에는 지금의 철원·춘천·충주와 함께 몽골병에 유린되는 참화를 겪었다.

1269(원종 10) 익화현(益和縣)으로 개칭되었는데 이는 권신 임연(林衍)·임유무(林惟茂) 부자의 반란사건을 진압하여 공을 세운 위사공신(衛社功臣) 김자정(金自廷)의 고향이므로 승격된 것이다. 1356(공민왕 5)에는 다시 양근군으로 승격되었는데, 이것은 보우대사(普愚大師)와의 인연에 따른 은전이었다. 공민왕은 또 보우대사가 우거한 미원(迷原)고을을 현으로 승격하고 감무를 두었다가 얼마 뒤 다시 익화현의 속현으로 하였다.

지평현은 1018년 양근과 함께 광주 임내에 속하였다. 우왕이 즉위한 뒤 그의 유모 장씨의 고향이라 하여 따로 감무가 두어졌다가 1388(우왕 14) 혁파되었다. 1391(공양왕 3) 채철장(採鐵場)이 설치되어 철장감(鐵場監)을 겸무하도록 하였다. 양근군은 조선시대에도 별 다른 개혁 없이 그대로 존치되었으나, 지평현은 1413(태종 13) 전례에 의해 현감이 두어졌다가 숙종 연간에 잠시 양근군에 합쳐진 뒤 곧 분리되어 현감이 배치되었다. 1594(선조 27) 지평현에 운계서원(雲谿書院)이 건립되어 1714(숙종 40) 사액되었다.

1895년 양근군과 지평군으로 개편되었으며, 1908년 양근군과 지평군이 병합되어 양평군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남종면을 광주군으로 이속하였다. 1938년 갈산면을 양평면으로 고쳤다. 1942년 군행정구역변경 때 설악면이 가평군으로 이속되었다. 1860년대 근세유림의 중망을 받던 이항로(李恒老)가 위정척사의 학문적 이론을 이룬 곳이 서종면 노문리 벽계이다. 이항로의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사상은 최익현(崔益鉉)·김평묵(金平默)·유중교(柳重敎)·유인석(柳麟錫) 등의 문인(門人)에 의해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의병항쟁으로 승화되었다.

을미의병운동의 효시를 이룬 이춘영(李春永)·안승우(安承禹)와 평민출신 의병장 김백선(金百先)이 모두 이 지방 지평면 출신이다. 임진강연합 의병전선의 용장으로 활약한 의병장 이은찬(李殷瓚)과 기미독립운동의 33인 중 한 사람으로 활약한 박동완(朴東完)도 이 고장 출신이다. 3.1운동 때는 3 10일 서종면 문호리에서 200, 청운면에서 150, 3 23일 양근면에서 1,000, 3 30일 양평읍 도곡리에서 130, 용문면에서 2,000, 4 3일 양근리에서 4,000, 4 4일 양동면에서 3,000명 등 1 3000여 명이 시위에 가담하여 격렬한 만세 운동을 벌였다.

6·25전쟁 때인 1951 2월 지평면 지평리에서 중공군의 2월공세에 맞서 유엔군이 중공군 3개 사단의 집중공격을 막아내었는데, 이 전투로 유엔군은 한국전 참전 이후 최초로 전세를 만회하여 재반격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1963 1 1일 여주군 개군면이 편입되었고, 1973 7 1일 서종면 삼회리와 노문리 일부가 가평군 외서면과 설악면으로 각각 편입되었다. 1979 5 1일 양평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89 4 6일에는 양서면 국수출장소가 설치되었다. 2006 12 1일 지제면이 지평면으로 개칭되었다.

건강, 넌 나의 희망이야~ 그래 맞다. 오로지 내 희망은 건강, 오로지 하나뿐이다. 갖지 못해서가 아니라 갖고 있으면서도 더 잘 지켜야 한다. 세상에서 그 어떤 다른 모든 일들은 내가 아니라도 대신할 누군가가 있지만, 내 건강은 내가 관리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으니 건강은 건강할 때 내가 지켜야 한다. 그 건강 하나를 지키기 위하여 오늘 예정된 OB모임 불참까지 양해를 구하고 오늘도 걷는다. 

경기옛길 평해길 중 제6길 거무내길은 양평역에서 용문역까지 걷는 길이다. 양평역에서 시작하여 남한강과 흑천을 따라 원덕역, 용문역에 이르는 코스로, 양평 물맑은시장과 푸른 남한강, 호젓이 걸을 수 있는 숲길, 그리고 거무내길의 이름이 유래된 흑천 등 다채로운 볼거리가 가득한 길이다

흑천은 용문면 삼성리에 거무내마을이 있는데, 이 냇물 바닥의 돌이 검은색으로 물빛이 검게 보인다 해서 흑천이라고 하며 양평군 청운면 성지봉에서 시작하여 용문과 원덕 개군면 대명콘도를 지나 회현리에서 남한강과 합류하는 하천이다.

걷기코스의 구간별 거리별 소모 칼로리가 어떻게 알았는지 내 체중을 기준으로 만들어 놓았다. ㅎㅎ 걷기 운동 정보 안내에 따라서 올바른 걷기 자세를 따라 그렇게 걸어야겠다. 

강하면 동오리에는 장사복이라는 한 무관에 관한 이야기가 전한다. 이 무관은 서울에서 말단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천기를 볼 줄 알아 어느 날 본가에 도둑이 드는 것을 알았다. 축지법을 써서 본가에 도착한 장사복은 소외양간으로 머리를 들이미는 도둑을 향해 화살을 날려 죽여버렸다. 분이 안 풀린 그는 돌아가는 길에 도둑의 시신을 끌고 가 한강물에 던져버렸다. 그 도둑은 장씨집안의 충직한 머슴으로 해산한 아내에게 끓여줄 미역과 식량이 떨어져 주인 몰래 얼마간의 쌀을 가져다 아내에게 해산 뒷바라지를 하려던 참이었다. 너무나 가혹한 장사복의 처사에 하늘이 노했음인지 차츰 가세가 기울어 후손마저 사방으로 흩어져 망했다고 한다.

한강 종주 자전거길은 한강에 있는 자전거 도로이다. 이곳은 26.8km 자전거 전용도로이며, 4.5m 양방향 자전거가 통행할 있도록 만들어졌다. 한강 자전거길과 이어지는 남한강 자전거길은 주변 경관이 아름답고 기존의 철로와 간이역사, 터널, 북한강 철교를 그대로 살린 점이 특징이다

양평군 옥천면의 원퉁이 마을의 지명유래담은 시주온 중에게 야박하게 굴다가 집안이 망한 내력이다. 김씨네집에 중이 동냥을 오자 주인이 일을 하지 않고 얻어먹는다며 바가지를 깨뜨려버렸다. 중은 절로 돌아가 풍수에 대한 공부를 하여 김씨네가 원퉁이 골짜기에 산소를 잘 써서 부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뒤 다시 김씨에게 온 중은 산소를 이장하여야 더욱 번성한다고 일러주었더니, 곧 바위를 깨고 이장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깨어진 바위에서는 피가 솟았고 파헤쳐진 산소에서는 학이 날았다. 그 뒤로 집안은 점차 기울었고 당시의 일이 원통하다 하여 이 골짜기를 원퉁이라 하였단다.

양평은 동쪽에는 성지봉(聖地峰, 791m), 북쪽에는 화야산(禾也山, 755m)·통방산(通方山, 652)·소리산(小理山, 479m)·갈기산(葛基山, 685m), 남쪽에는 양자산(楊子山, 710m)·파사산(婆娑山, 231m)·우두산(牛頭山, 460m)·당산(塘山, 541m) 등의 산이 자리하고 있다.

옥천면 옥천리에는 며느리의 효행을 기리는 비석이 있는데, 여기에는 가난한 허씨댁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봉양하기 위해 애쓴 사연이 전한다. 항상 끼니거리를 걱정할 만큼 가난한 집에서 며느리가 방아를 찧어주고 쌀을 얻어 아침밥을 해드리려고 일을 나가다가 개의 변으로 나온 보리쌀을 보고 우선 가져다가 씻어 밥을 해드렸다. 그랬더니 하늘에서 벼락을 치고 비가 쏟아지므로 며느리가 죄책감으로 마당에 돗자리를 펴고 무릎을 꿇고 사죄를 했는데 오히려 벼락 서슬에 그 언저리가 모두 황금으로 변해버렸다. 부자가 된 허씨네는 그 일대를 모두 사들여 들판을 허문앞이라 부르게 되었고, 사람들이 돈을 거두어 며느리의 효행을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한다.

이 고장에는 효자·효부설화, 아기장수설화, 역사적 인물 전설, 자연물관련 전설 등이 전한다.  이괄(李适)에 대한 전설로, 아버지의 시신을 거꾸로 놓지 않고 바로 놓았기 때문에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다는 이야기와, 죽은 이괄의 묘를 열두 군데나 만들어 나라에서 시신을 못 찾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괄의 난(李适ㅡ亂)은 1624년(인조2년)에 이괄이 조선 왕가 종실 흥안군 이제를 천립하며 일으킨 반란이다.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무고를 당하자 난을 일으켜 한양 까지 함락시켰다. 조선대의 내부 반란으로서는 처음으로 왕을 도성으로부터 피난시킨 전무후무한 난이기도 하다. 이후 길마재 전투에서 패배하여 진압되었다.

민요의 논매기소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보시오 농부님네/ 어럴리 상사디야// 농부소리를 지어보세/ 어럴리 상사디야// 상사디소리 두세마디/ 어럴리 상사디야……저기가는 저할머니/ 어럴리 상사디야// 딸이나있거든 사위나삼아요/ 어럴리 상사디야// 딸은하나 있것마는/ 어럴리 상사디야// 나이어려서 못삼겠네/ 어럴리 상사디야// 여보할머니 그말씀말아요/ 어럴리 상사디야/ /고추가작아도 맵기만해요/ 어럴리 상사디야// 참새가작아도 알만나요/ 어럴리 상사디야…….

영호정(暎湖亭) 은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양근리(楊根里) 40-2에 있는 정자이다조선시대의 영호대가 폐허가 되자 1930년 마을사람들이 세웠다. 본래 조선시대에 관에서 세워 풍류를 즐기던 영호대가 있었으나 세월이 지나 폐허가 되자 1930년대에 이범기(李範基) 등 마을사람들이 뜻을 모아 건립하였다일제가 신사를 세우기 위하여 정자를 동쪽 능선으로 옮긴 뒤 관리 소홀로 붕괴된 것을 1946년에 지역주민 김연수(金連洙) 등이 신사를 헐고 옛 터에 정자를 재건하였다. 이후 6·25전쟁 당시 다시 소실되었으나 1991 11월에 양평군청에서 고증에 따라 복원하였다. 정면 3칸·측면 2칸의 직사각 모양의 건물로 팔작지붕에 한식골기와를 얹은 홑처마이고 내부에는 누마루를 깔았다. ‘영호정(暎湖亭)’이란 제액(題額)은 일정(一靜) 조영기(趙永基)가 썼다.

밭갈 때의 「소몰이소리」는 다음과 같다. “와냐 와냐(왼쪽으로 가라)/ 마라 마라(오른쪽으로 가라) 호호/ 이려(앞으로 계속 가라) 마라 마/ 와냐 와냐 마라/ 도보 신어라 호호(걸어가는 소리)/ 이려 마라 마냐(들어서거라)/ 이려 마라 마…….

걷기 코스의 종점이다. 출발지점이 갈산체육공원이라서 5.8Km를 완주한건 아니지만, 오늘도 건강을 위한 보약을 한걸음 한걸음으로 꾸준하고 규칙적인 관리로 유지하고, 아름다운 풍경과 더불어 웃으면서 즐겁게 시간을 먹으며 재밋고 보람찬 하루를 이곳 양평에서 얻어간다. 

양평군은 동쪽은 강원도 횡성군과 원주시, 서쪽은 북한강을 건너 남양주시, 남쪽은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광주시, 북쪽은 가평군·강원도 홍천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7°18′∼127°51, 북위 37°21′∼37°40′에 위치한다. 면적은 877.80㎢이고, 인구는 10 8316(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11개 면, 265개 행정리(110개 법정리)가 있다. 군청은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양근리에 있다.

갈산(葛山)은 양평읍 지역의 옛 이름으로 칡이 많았다 하여 칡미라고도 부른다. 1747(조선 영조 23)에 군소재지가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 양평의 정치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갈산면(양평읍)이 설치되고 갈산시장(양평시장)이 호황을 누리면서 양평 중심지를 일컫는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양강(楊江, 남한강)을 두르고 용문산으로 병풍을 삼은 갈산의 풍광은 예로부터 유명하였다. 특히, "용문산을 감싸 안은 푸른 개 형상의 구름" "양강의 금빛 모래밭에 쏟아지는 화살 같은 햇살"이라 묘사한 옛 싯구절은 갈산의 풍경을 잘 표현하는 말이라 하겠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 신사가 있었다고 하나 해방 후 파괴되었고, 현재는 조선시대 영호대(映湖臺)를 재건한 영호정과 6·25전몰 용사를 기리는 충혼탑, 반공지사 변종식 충혼비, 반공위령탑등이 있다. 갈산 서남쪽에 양근나루가 있으며 주변 일대는 갈산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헬로시티둘레길(大田)  (0) 2022.07.03
삼선산수목원(唐津)  (0) 2022.06.26
동탄호수공원(華城)  (0) 2022.06.07
선정릉(江南)  (0) 2022.06.02
청댕이 둘레길(牙山)  (0) 2022.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