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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용의 해라는 올 해의 만보걷기코스 첫나들이는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용설리의 저수지인 용설호(龍舌湖)를 찾았다. 이 저수지는 총저수량 3,020천 m2이며 만수면적: 53.8ha, 수혜면적 402ha, 제당 연장 459.0m, 높이 19.0m로 중급 규모이다. 1982년에 착공하여 1985년에 준공된 저수지로 안성시 죽산면 일대 죽산평야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설되었고, 저수지 주변은 남산과 산박골산, 죽림산 등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남북으로 길게 생긴 용의 혓바닥 형상으로 남쪽에서 북쪽 둑방이 있는 곳까지 길이 약 1.3km에 이른다. 저수지를 한바퀴 돌아드는 거리가 약4.1Km라서 걷기에 딱 좋은 곳이다.
용설호수의 상징인 이 석조작품은 박장대소(拍掌大笑)라고 이름한 이정무 조각가의 작품이다. 이곳에는 2008.12월에 작품이 세워졌다고 쓰여있다. 이 작품의 설명서를 읽어보니, 용설저수지를 상징하는 둥근 좌대와 주변의 산과 같은 표석을 공연무대처럼 배경에 두고 그 중심에 용이 또아리를 트고 있는 모습으로 단을 형상화 했단다. 그 위에 마을 주민을 상징하는 캐리커쳐 인물들이 아주 크게 웃는 모습으로 박장대소를 하며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순간들을 마치 연극의 한 장면처럼 표현하였단다.
반듯하게 닦여진 저수지의 둑방길 모습이다. 황톳길로 조성된 이 길은 맨발로 걷는게 훨씬 더 좋을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서서 아늑한 저수지의 모습을 바라보니 흡사 용의 혀 같다는 느낌도 든다. 이 용설이라는 이름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용암과 설동마을이 합쳐지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주변에는 팬션과 음식점 및 카페들이 한겨울이라서 그런지 문을 닫은채 썰렁하게 주욱 버티고 있으며, 인근의 토지는 농경지와 임야로 이용되고 있다. 이 저수지의 건너편은 높이 351m의 죽림산이 보인다.
여기는 낚시터로 유명한 저수지라서 호수의 이곳 저곳에 낚시터가 조성되어 있다. 사방댐으로 둑방에서 서쪽에 홍수여수로가 설치되어 있으며, 낚시가 가능하기 때문에 방갈로와 좌대가 설치되어 있다. 용설호수는 16만명의 중형급 호수라서 1시간 이내 거리의 교통이 편리한 수도권에서도 몇개 안남은 토종 붕어 낚시터란다. 오염원이 전혀없고 주변이 모두 황토로 되어 있어서 붕어, 잉어의 지생력이 왕성하단다. 또한 주위경관이 조용하고 아늑하여 가족단위 낚시터로 안성맞춤이란다. 호수를 돌아드는 배방둑을 좌우로 일주할 수 있게끔 콘크리트 도로가 개설되어 있어서 시원스레 드라이브도 즐길 수 있다.
산책로로 조성된 길을 따라 호수 주위를 따라 조용히 걷다보니 탄성이 절로 나올듯한 아름다운 주변 풍광을 마주하게 된다. 소나무 밑에 만들어 놓은 쉼터 의자에 앉아 용설이라는 청룡의 혀를 바라본다. 얼어버린 수면위에서도 물오리 떼들이 줄지어 노닐고 있는 한가로운 모습에서 이곳이 바로 지상 천국이라는 느낌으로 어우러져 나도 모르게 용설과 함께 무심한 시간을 잠시 흘려보낸다.
호숫가에 건축한 멋드러진 팬션 앞에서 경기둘레길 39코스와 만난다. 광천마을버스정류장에서 칠장사까지 약18Km의 산책로이다. 광천마을 버스정류장에서 한양과 부산 동래를 잇던 영남길을 만나고, 며느리의 소원을 들어 줬다는 갓바위를 지난다. 이후 천주교 죽산성지를 들어섰다가 나서면서 영남길과는 다른 루트로 길이 갈라진다. 용설저수지 연안을 끼고 이어진 길을 걸으면 어느새 숲길로 들어서게 되고, 한남금북정맥 루트를 따라가다 보니 금방 칠장사에 닿는길이 바로 경기둘레길 39코스이다.
문화마을에는 제1회 용설문화축제 초대 시인의 시가 조각되어 있다. 芝軒 강병숙의 " 용설 호수의 꿈"이다. 천년의 기다림 끝에/ 드디어/ 용이 승천하는날// 혀를 길게 내밀고/ 한껏 웅비하려는 찰나/ 아래를 내려다 본 것이 화근이어라// 수려한 강산에 홀려/ 그만 주저앉고 말았네// 그렇게 태어난 땅 용설리// 기름진 풍요의 땅 거머실 기곡/ 자자손손 평안과 한가로움의 한실/ 느티나무 우거져 늘 푸르른 설동/ 글 읽는 소리 낭랑한 서당 뒤편 당북/ 그렇게 도란도란 터 잡아/ 푸른 꿈 키워왔지// 장수바위 용바위 천년 세월의 배나무/ 쌍가마 타고 오르내리던 옻샘이/우리를 지켜왔네// 또 한 번의 용트림으로/ 커다란 호수가 솟아나니/ 그 이름 용설호// 봄이면 빗장 풀어/ 가을 황금들녘 꿈꾸게 하고//
뭇 고기들의 잉태를 돕는/ 섬세하면서도 영원한 생명력/ 어머니 자궁 같은 안식처// 이제 우리/ 이 안식처에 새로운 꿈을 담고자 하네// 둘레길 만들어 / 쌀밥 같은 토끼풀꽃/ 흐드러지게 너울대는 개망초꽃/ 벌겋게 타오르는 자운영 꽃머리/ 무수한 들꽃들의 합장소리 이어지는 길/ 물오리와 함께 걷는 길// 아/ 수 천개의 꽃불 이어지는/ 흰 무궁화 꽃을 벗하며/ 보리밭 지나 연꽃 너울대는/ 확 트인 둑방길도 걸으리// 때로는 사물놀이패의 우렁찬 메아리/ 때로는 시가 흐르는 호수/ 춤추는 이의 추임새가 되어주고/ 물감 풀어 한 폭 수채화가 되는// 우리는 그렇게/ 사람 자연 문화가 어우러져/ 영원히 춤추리라.//
죽림산 아래 죽산천으로 유입되는 얼어붙은 호수를 바라보며 죽산성지에서 목숨을 바쳐 신앙을 지킨 선조들을 생각하며 걷는다.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죽산성당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수많은 천주교우들이 처형되고 심문과 고문을 하던 관아터가 자리하고 있다. 척화비를 세우고 오가작통(五家作統)으로 사학 죄인을 색출, 무차별적으로 순교자들이 얼마나 많은 목숨을 잃었는지는 셀 수 조차 없다.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은 순교의 터는 오늘도 그 옛날 굳건한 신앙을 지켜갔던 신앙 선조들의 숨결을 간직하고 있다.
충청·전라·경상도로 갈라지는 주요 길목인 죽산은 지리적 조건 때문에 조선 시대에 도호부가 설치되었던 곳이다. 현재 죽산면사무소 자리에서 천주교인들이 참담한 고문 끝에 처형되었다. 여기에서 치명한 순교자들은 「치명일기」와 「증언록」에 그 이름이 밝혀진 사람만해도 25명에 이른다. 병인박해를 지나면서 이진(夷陳)터는 “거기로 끌려가면 죽은 사람이니 잊으라.” 하여 "잊은 터"로 불리게 됐다는 것이다. 죽산에는 또 두들기라는 곳이 있다. 죽산 읍내에서 15리쯤 지금은 삼죽면 소재지로 80여 호가 사는 큰 마을이지만 옛날에는 인가가 드문 작은 주막거리였다고 한다. 이 주막거리는 용인, 안성, 원삼 등지에 사는 교우들이 포졸에게 잡혀 가는 호송길에 잠시 쉬어 가는 곳이 되곤 했단다.
수변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니 새로운 데크산책로를 조성하는 공사가 1월15일까지 시행중이라서, 다른 길로 돌아가는 안내표지판을 만난다. 호수 주변을 따라 걷다가 산길로 화살표 표지판을 따라 오르니 아담한 규모의 대한불교 조계종의 대중사가 나타난다. 안성시 죽산면 용설리 259에 위치한 이곳 대중사에서는 조계종의 역사와 문화를 배울 수 있는 종교문화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단다.
조계종(曹溪宗)은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한 종파이다. "조계"라는 낱말은 중국 선종 6조인 혜능(慧能)의 별호에서 유래하였다. 조계종의 정체성은 비구 승단, 비구승 수행의 중심인 선(看話禪)을 표방하는 성격이 있다. "선종(禪宗)"에 교종(敎宗)을 합하여 단일종(單一宗)으로 만들었다. 이때 혜능선사가 있었던 조계산이라는 이름을 빌려다 조계종이라 명명하고, 태고국사 보우(普愚: 1301-1382)를 종조(宗祖) 또는 중흥조(中興祖)로 삼아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계종단에는 스님이 사유재산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며 사후에는 스님의 사유 재산을 종단에 귀속한단다.
점심식사를 위해 이 지역의 맛집을 검색하여 찾아가다가 한적한 시골도로에서 우뚝 솟아있는 동상을 만났다. 송문주(宋文胄, 생몰년 미상) 장군의 동상이다. 송문주 장군은 고려 후기의 무장으로, 몽골군의 1차 침입 당시(1231년, 고종 18년) 귀주성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고려 고종 때 각 도의 산성을 방어하는 방호별감(防護別監)으로 이곳 죽주산성에서 몽골군의 공격법을 알고 대비해 주민과 유일하게 산성을 지킨 인물이다. 당시 죽주산성 내의 군사들은 몽골군의 공격 전법이 송문주의 말과 실제로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고 송문주를 '신명(神明)'이라 불렀다고 한다. 동상은 기단 포함 총 11m로 키 5m, 팔 2.8m, 어깨 폭 1.9m, 발 폭 2m의 규모이다.
죽주산성(竹州山城)의 입구이다. 이곳에서 몽골군을 격퇴한 송문주 장군과 물이 발견된다. 성 안에서는 신라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사용된 계단식 저수시설 8기가 출토되어 복원되었다. 물의 낙차를 고려해 계단식 저수시설을 두되 나름 조경도 꾸미고 물을 활용했다. 수조터에서 다양한 시대의 기와와 토기, 무기, 공구류 등이 출토되었다. 프랑스 남부 골 지방에 가면, 계단식 물레방아를 8단으로 놓고 하루 4.5톤의 밀을 빻은 고대 로마 시대 제분공장 유적이 있는데, 죽주산성에도 마찬가지로 8단의 크고 작은 계단식 저수조를 두었다. 하남 이성산성은 저수지가 큼지막하게 2군데 있었는데, 여기는 8단 저수조니 사용자 계급이나 용도에 따라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외벽을 따라 외항(해자)을 두른 것도 산성에는 흔치 않은 예다. 그만큼 죽주산성에는 물이 흔했던 모양이다.
이곳 안성의 옛이름인 죽주(竹州)는 본래 백제 개차산(皆次山郡)이었지만 통일 신라기 경덕왕이 개산군(介山郡)으로 고쳐 한주(漢州) 아래 두었다고 세종실록지리지는 썼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고구려 내혜홀(奈兮忽)’이란 표현이 보이고, 최근 연구 결과 진흥왕 시절 신라 영토로 편입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고려 태조 때 죽주라 부르기 시작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죽주 대부분이 안성군 ‘죽일면(竹一面)’, ‘죽이면(竹二面)’으로 나뉜다. 그러나 발음이 좋지 않아 일죽, 이죽이 되고, 후에는 일죽, 죽산으로 다시 바뀌었다. (‘죽일’, ‘죽이’ 몹시 거북하다. ‘이죽’도 어감이 나쁘다.) 신라 말 궁예(弓裔)가 처음 이곳의 기훤(箕萱)에게 귀의했으나 푸대접받자, 5년 후 북원(北原: 원주)의 양길(梁吉)에게 갔다는 기록도 있다.
죽주산성은 장사 남매의 내기로 쌓은 성이라는 설화가 있다. 옛날 홀어머니 밑에 두 남매가 살고 있었다. 두 남매는 성장해 가면서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 사람들은 장사 남매 라고 불렀단다. 남동생이 열여섯살 되던 해, 큰 전쟁이 나서 전쟁터로 나갔다가 패하고 도망쳐 왔으며 이를 용납할 수 없었던 누나는 자결을 권하려 했으나, 대신 내기를 해서 이기면 살고 지면 죽을 것이라는 약속을 했다. 일주일 동안 누나는 죽산에 산성을 쌓고, 남동생은 나막신을 신고 송아지를 끌고 임금님이 계신 도성까지 다녀오는 것이었다. 내기를 시작하고 엿새째 되던 날 누나는 벌써 성을 거의 다 쌓고 서남쪽으로 여섯자 정도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이를 지켜 보던 어머니는 아들을 살리기로 결심을 하고 팥죽을 쑤어 딸에게 먹였다. 무더운 여름에 뜨거운 팥죽을 먹는 것이 쉬운일이 아니었다. 팥죽을 먹으며 천천히 성을 쌓는 사이에 동생이 돌아 왔고, 내기에 진 누나는 약속대로 자결하였다. 누나가 자결하자마자 몸에서 세마리의 파랑새가 날아 올랐고, 후에 남동생은 훌륭한 장수가 되어 나라에 크게 공헌하였다고 전한다.
난공불락의 요충, 죽주산성은 『선조실록』에 사간(司諫) 이덕형(오성과 한음의 한음 대감)은 “죽산 취봉(鷲峰)은 형세가 매우 든든하여 한 명의 군사로도 길을 막을 수 있는 험한 곳”이라 상소를 올렸다고 나온다. 그 말대로 죽주산성 포루에 서면 안성벌과 이천·장호원이 한눈에 잡힌다. 죽산은 영남대로가 조령과 추풍령 방면으로 갈라지는 분기점으로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조까지 전략적 요충지다. 조선시대에는 한양과 삼남대로(三南大路)를 잇는 중요한 교통 요지였다. 오늘날에도 평택항에서 충주를 거쳐 태백, 동해항을 잇는 주요 산업도로(38번 국도)와 한반도의 대동맥 경부선이 이곳을 지난다.
태평미륵이 등을 기대고 서 있는 매산리 비봉산에 죽주산성이 있다. 죽주산성은 신라때 내성을 쌓고, 고려때 외성을 쌓았다. 언제 쌓았는지 알 수 없는 세겹의 석성이 지금도 남아 있고 보전상태가 좋다. 죽주산성은 특히 임진왜란때 격전지였다. 죽주산성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것보다는 산성을 따라 산책하듯 걸어보는 맛이 일품이다. 주변의 울창한 소나무와 침엽수들이 길동무를 해주어 상쾌한 발걸음을을 재촉한다.
죽주산성은 삼국시대 신라가 북진하던 가장 이른 시기, 대중국 교역항인 당항진(남양만)으로 진출하는 거점으로 처음 축조했다. 전체 둘레 1천688m로 원래 높이 6∼8m(내성과 복원 성벽은 2.5m). 신라(中城 ), 고려(外城), 조선조(內城)의 세 시대에 걸친 삼중구조로, 대부분 3차례 이상 수축한 흔적이 보인다. 따라서 시대별 성벽 축조 방법과 활용 변화를 잘 살펴볼 수 있는데, 전반적으로 영남의 신라산성이 한강 유역으로 북상하는 과도기적 성격을 띤다. 고려와 조선의 성벽은 신라 체성벽 상면에 축조되었는데, 대부분 무너지고 일부에 흔적만 보인다. 체성벽은 성벽의 높이와 너비가 거의 1대 1 비율로 구조적으로 탄탄하다.
안성(安城), ‘위태롭지 않고 편안하며 무탈한 성’이란 뜻이다. 안성에는 극적루(克敵樓)라는 특이한 이름의 누각이 있다. 조선의 개국공신 권근(權近)은 《신증동국여지승람》10권에 실린 극적루 기문(記文)에서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에 송도가 함락되고 임금이 다른 곳으로 옮겨갈 때, 풍문을 듣고 근처 30여 고을이 의기를 분발하여, 항복을 위장해 잔치를 벌인 뒤 취한 적군을 섬멸하니, 적의 위세는 끊기고 더 이상 남으로 내려가지 못했다. 이에 국가에 공을 세운 사실을 적고 누각의 현판도 극적루로 지었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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