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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효창공원(龍山)

영대디강 2023. 12. 17. 05:08

효창공원(孝昌公園) 조선 제22대 임금인 정조의 첫째 아들인 문효세자(文孝世子)가 5살의 어린 나이에 죽었고, 그의 생모인 의빈 성씨도 몇달  죽음으로 이곳에 묻혔으며, 순조의 후궁 박숙의(朴淑儀) 무덤이 있던 곳으로 원래는 효창원(孝昌園)이었으나, 1944년에 무덤이 서삼릉(西三陵)으로 강제 이장 당하고, 이름도 효창공원이 되었다. 현재는 공원의 북쪽 높은 동산 위에 백범(白凡) 김구(金九) 묘소를 비롯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이동녕(李東寧) , 군사부장 조성환(曺成煥), 비서부장 차이석(車利錫)의 묘소와 윤봉길(尹奉吉), 이봉창(李奉昌), 백정기(白貞基)등  3 의사(義士) 및 안중근 의사의 가묘(假墓) 임시정부 요인들의 묘지가 이곳에 자리하고 있.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백정기(白貞基)  3인의 의사(義士)를 모신 사당 입구인 의열문(義烈門)이다.  분의 묘는 1946 7 9일에 백범 김구(金九) 선생 의하여 이곳으로 이장(移葬)되었고, 1949 7 5일에는 국민장(國民葬) 치른 김구의 유해도 역시 이곳에 안장되었다. 효창공원에는 김구의 유업을 계승하고 추모사업을 봉행(奉行)하기 위해 2002 10월에 개관한 백범김구기념관이 이곳 왼편에 높고 커다란 현대식 건물로 하얗고 커다랗게 자리하고 있다.

효창공원의 면적은 12 3307㎡이다. 이곳은 1989 6 8일 사적 제330호로 지정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구용산고지(舊龍山高地)라고 불렸으며, 일본군이 한때 야영지로 삼기도 했었다. 일본인들이 효창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1894 청일전쟁 일본군 병력이 효창원 송림 안에 만리창(萬里倉) 있던 곳에 야영하면서부터이다. 일제강점기의 경성부(京城府)가 효창원의 일부인 8 1460평을 공원용지로 책정한 것은 1924 6월의 일이며, 순환도로·공중변소 등을 갖추어 일반에게 공개한 것은 같은 해 8월부터였다.

3 의사(義士) 의 묘지이다.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백정기(白貞基) 등의 세 분의 묘소가 이곳에 자리하였다. 왼쪽에 안중근 의사의 가묘가 있다. 1956 정부에서 독립운동가들의 묘를 이장하고 효창운동장을 건립하겠다는 발표를 하자 6 9 대한민국 국회에서 김두한 의원은 "선열에 대해서는 물질보다 추모의 정신으로 보답해야 하는만큼 우선 정부는 분묘에 대한 모든 절차를 결정한 후에 운동장 설비공사에 착수했어야 것이라." 말하고 "효창공원의 선열 묘지는 성묘이다. 성묘를 함부로 파서 헐어 트리는 것은 생명을 조국광복에 바친 선열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라고 피력하였다.

삼의사의 묘 왼쪽에는 1910826일 중국 뤼순 감옥에서 순국한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으면 안장하려고 마련한 빈 무덤으로 표지석만 그냥 서 있다. 삼의사 묘 정문의 안내판에 쓰여진 백정기(1896~1934) 의사는 전북 부안 출신으로 3.1 운동 후 상하이로 건너가 무정부주의자 연맹에 가입하여 노동자 운동과 일본상품 배격운동을 이끌었고, 일본 시설물 파괴 공작과 요인 사살, 친일파 숙청 등을 목표로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 상하이 홍커우 육삼정 연회에 참가한 일본 주중 공사 아이요시를 습격하려다 잡혀 일본 나카사키 법원에서 무기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이듬해 65일 순국하였다.

백범 김구 선생의 묘소 입구이다. 선생은 그 생애를 오직 조국과 민족의 독립과 통일에 바치신 우리 계레의 영원한 스승이시고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이시다백범기념관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높은 문화를 가진 자주 · 민주 · 통일 조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일생을 분투하신, 겨레의 큰 스승 백범 김구선생의 사명감과 사상을 널리 알리고 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20006월 기공하여 20021022일 개관하였다. 기념관 오른편 동산에 선생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백범김구기념관이다. 근 · 현대사 전문 역사박물관인 백범기념관은 격동의 한국 현대사와 함께 한 백범 김구선생의 삶과 사상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와 한국 근 · 현대사를 이해하고, 조국의 자주 · 민주 · 평화통일을 지향하며 민족의 아름다운 문화를 발전시켜 나아가는 온 겨레의 문화적 삶의 공간이다.

백범기념관은 전시관 1층과 2층에 백범 김구선생의 일대기와 한국 근 · 현대사 관련 각종 기록 및 자료를 전시하고 있으며, 전문 자료실과 각종 교육 프로그램 및 문화행사 등에 활용될 수 있는 교육장과 대회의실 그리고 컨벤션홀 등 다양한 교육 문화 공간을 갖추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1919 발표된 삼일독립선언서 3·1운동에 기초하여 일본제국의 대한제국 침탈과 식민통치를 부인하고 한반도 내외의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대한민국의 망명정부이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 임시정부라하여 임정이라고도 부른다. 1919 중화민국하이시에서 수립되었고, 1948 8 15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해산하였다.

이곳 효창공원에는 2015년 08월 15일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의미있는 10개의 태극기를 포함한 태극조형물을 설치하였다. 우리겨레의 우수한 민족성을 나타내는 무궁화 70주를 식재하여 광복70주년을 기념하고, 순국선열의 애국정신을 이어받아 민족의 화합과 자주통일을 염원하며 광복70주년 기념광장을 조성하였다는 내용의 표지판이 광복70주년 기념광장 입구에 서 있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의미있는 10개의 태극기는 1.불원복 태극기, 2.태극기 목판, 3.남상락 자수 태극기, 4.대한민국만세 태극기, 5.김구 서명문 태극기, 6.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 7.유관종 부대원 태극기, 8.경주 학도병 서명문 태극기, 9.건국법정대학 학도병 서명문 태극기, 10.이철희 사변폭발 태극기 등이다.  

겨울이라서 이렇게 공원이 썰렁한게 아닐까 생각할만큼, 시대가 바뀌고 변하면서 점점 희미해져가는 호국·보훈의식은 국가의 미래를 견인하는 핵심가치임에도 국민 전반의 보훈의식 고취를 통한 국민통합 요구가 소리없이 점점 사그라들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그나마 간간이 방문해주던 보훈인물 기념관 방문자 수가 지금은 완전 정체되었고, 급격한 인구감소에 따른 기념관 활성화 필요성이 증가하고 있단다. 학생 젊은층을 포함한 대중적 관심을 유도할 있도록 전국의 보훈기념관 등에 발길이 잦아지길 바란다.

이곳에는 공원을 산책로 삼아 걷는 근처 주민들의 발걸음 뿐이다. 예전처럼 초중고 학생들이 단체로 찾아와서 줄지어 관람하는 역사현장 교육도 없어졌고, 자유민주주의와 자주독립 정신에 투철한 보훈문화 구현을 목표로 효창공원을 찾는 사람들이 해마다 줄어들고 있단다. 안타깝게도 이곳 김구기념관을 찾은 관람객 수가 2016년 173,238명/ 2017년 174,582명/ 2018년 175,205명/ 2019년 199,407명/ 2020년 38,991명/ 2021년 59,223명/ 2022년 83,542명으로 급격히 줄어들고 있단다.

서울의 한복판인 용산임에도 한산한 이곳 효창공원 산책로를 돌아들며 잠시 생각한다. 역사적 경험이 없는 학생 젊은 층의 흥미를 유발할 있는 첨단기술을 활용한 실감형 콘텐츠를 AI로 만들어 무상으로 게임처럼 제공해주면 스마트폰에 흠뻑 빠져있는 미래세대의 보훈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제고하고, 기념관 방문의 촉진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라사랑 정신을 함양하기 위한 그런 대책이 없을까? 를 아무런 능력도 없는 민초가 부질없는 생각이지만 마음 아픈 충정으로 고민해본다.  

예전에는 효창공원을 민족공원화 하려는 계획이 있었단다. 당시 국가보훈처에서 효창공원의 역사적 가치를 복원하고자 효창운동장을 철거하고 자리에 넓은 광장을 조성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공원을 조성하여 관리하려고 하였단다. 그러나 운동장 철거한다는 소식은 당연히 축구계에 커다란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대체 구장을 설치하기 전까지 철거는 절대 안된다고 반대하였단다. 그래서 운동장을 제외하기로 하고 2018 8 16일 국가보훈처는 2019 3.1 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국가가 관리하는 독립운동기념운동으로 재조성하기로 그렇게 결정했단다.

백범 김구기념관 아래에 있는 이봉창의사의 동상이다. 이봉창 의사는 고향이 효창공원 근처. 용산구 효창동 118-1번지에는 생가 표지석이 있으며, 효창공원에서 유일하게 고향에 안장된 독립운동가이다. 이봉창 의사의 생가는 원래자리에 복원이 예정돼 있다. 이봉창(1901 ~ 1932)의사는 서울 용산 출신으로 용산 문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31년 상하이로 건너가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선생과 함께 일왕 폭살계획을 세워 193218일 동경 사쿠라다문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히로히토에세 폭탁을 던졌으나 불행히도 명중시키지 못하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그해 1010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이 사건으로 일본인에게 조선인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한 계기가 되었다.

남산공원에 서 있는 백범 김구 선생 동상이다. 백범 김구(金九, 1876 8 29(음력 711) ~ 1949 6 26)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통일운동가이며 정치인이다. 1949 6 26 안두희에게 총살당하여 사망하였다. 대일 의열단체 한인애국단을 이끌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을 역임하였으며, 1962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되었다.

말죽거리에 있는 매헌 윤봉길 의사의 동상이다. 윤봉길(1908 ~ 1932)의사는 충남 예산 출신으로 3.1운동이 일어나자 덕산보통학교를 자퇴하고 농촌계몽 운동에 힘썼다. 1930년 망명길에 올라 만주를 거쳐 상하이에 도착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김구 선생을 만나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독립운동 대열에 나서게 되었다. 1932429일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왕 생일 겸 상하이 사변 전승 축하 기념식에 참석한 시라카와 대장과 일본 침략 군관 수뇌들을 폭살, 중상을 입힌 뒤 현장에서 체포되어 1219일 일본 가나자와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서울의 서초구 양재동 시민의 숲에 위치한 매헌 윤봉길 의사기념관 역시  2016 92,757/ 2017 93,831/ 2018 47,644/ 2019 163,118/ 2020 32,085/ 2021 56,186/ 2022 73,968명으로 방문자 들의 발길이 연간 십만명도 채안된단다.

아주 오래전 기억이지만, 나때는 과동기들과 졸업여행으로 상해 홍구공원으로 윤봉길 의거 현장을 찾아 갔었다. 당시 홍커우 공원 사건(虹口公園事件) 1932 4 29, 오후 1시경에 세계에 뉴스로 보도되기 시작하여, 세계 각국 주요신문들이 1면에 대대적으로 이를 보도하면서 지구 놀라게 하였다처음 보도되었을 당시에는 대부분 중국인이 일으킨 항일투쟁 내지는 일본인 혁명주의자 활동으로 인식되었으나, 이튿날에 한국청년 윤봉길의 항일운동이었음이 밝혀져 보도되었다. 당시 중국 국민당 총통이었던 장제스(蔣介石)는 윤봉길의커우 공원에서의 폭탄 투척 소식을 전해 듣고 "중국의 100만이 넘는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 청년 윤봉길이 해내다니 정말 대단하다."라며 감탄하였다고 동행한 지도교수가 전해주던 이야기가 새삼 다시 떠 오른다. 

서울 남산에 있는 안중근 의사의 동상이다. 안중근(安重根, 1879.09.02 ~ 1910.03.26) 개명  안응칠(安應七)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 항일 의병장 정치 사상가이다. 세례명은 토마스(음역어 도마사도 도마에서 따옴), 다묵(多默)이다. 동학 농민 운동에서아버지 안태훈(安泰勳) 몇몇 본래의 목적을 가지지 않은 동학군 부대들을 정벌하는 함께 참여하였고, 대한제국 말기에는 학교 설립과 교육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을 하였으며 한때 복권 사업과 비슷한 채표회사(彩票會社)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09 10 26 하얼빈역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등박문을 암살하였다. 이후 러시아제국군 헌병에게 붙잡혀 일본 총영사관으로 옮겨졌고, 재판관할권이 일본에 넘겨졌다. 1910 3 26 오전 10시에 살인의 죄형으로 관동주 뤼순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사망했다

안중근의사 기념관은 안중근(1879~1910)의 삶과 사상을 알리고자 일제 강점기 조선 신궁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19701026일에 개관하였고, 2010년 안중근 순국 100주기와 의거 101주년을 맞아 손가락을 자르는 단지 동맹을 맺은 12명을 형상화한 건물로 새롭게 재개관하였다. 기념관 건물은 서울시 건축상 공공건축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하였다. 기념관에는 안중근의 일생이 소개되어 있으며, 안중근의 업적과 평화사상을 알 수 있는 자료도 전시되어 있다. 상설 전시실 이외에도 다양한 교육프로그램과 문화행사를 위한 체험 전시실, 세미나실, 강당 등이 마련되어 있다. 기념관 앞 안중근 광장에는 안중근의 유묵과 어록을 새긴 석비들이 있다안중근 의사 기념관 역시 2016 100,586/  2017 127,512/ 2018 103,235/ 2019 128,092/ 2020 17,361/ 2021년 25,645/ 2022 44,226명의 관람객 뿐이란다.

1924 6월 경성부는 효창원의 일부를 공원용지로 책정했고, 8월부터는 일반인들이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1940 3 12일 도시계획상의 11번째 공원이 되었다. 1944년 문효세자의 묘를 비롯하여 의빈성씨·숙의박씨·영온옹주의 묘가 모두 이장되었으며 1969년에는 원효대사의 동상과 반공투사위령탑 등이 건립되었다. 당초의 공원면적은 0.317㎢에 달했으나 효창운동장·도로·숙명여자대학교의 부지로 잠식됨에 따라 현재는 0.142㎢로 축소되었다. 현재 공원 내에는 김구(金九) 선생의 묘와 윤봉길·이봉창·백정기 등 3 의사의 묘, 안중근 의사의 가묘 등이 있으며, 공원 주변에는 효창어린이공원과 효창운동장이 있다

조국의 미래 청년의 책임. 그렇다. 우리나라의 미래는 청년의 책임이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에 태어난 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태생이기에, 미군정 체제하의 국적이 없는 백성으로 이곳 효창공원을 찾은 느낌이 남다르게 크고 감성적이다. 625 한국전쟁과 419, 516 등 격변의 정치체제 속에서 절대빈곤을 타개하며 거칠게 살아온 꼰대세대라서 그런지,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애국선열들의 유해를 모신 곳을 찾아오니 더더욱 온몸과 맘이 애국심으로 용틀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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