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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광어낚시(靈興島)

영대디강 2024. 5. 26. 04:40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면()의 주도()인 영흥도의 진두항 선착장이다. '친구따라 강남 간다'는 속담 그대로 나는 친구따라 광어 낚시하러 이곳에 왔다. 새벽 4시반 출항전에 승선해야하니 집에서 2시간전 출발하였다. 이곳은 조선시대에는 남양부에 속하였고, 1914 3 1일 경기도 부천군에 소속되었다가 1973년 옹진군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 인천광역시로 통합, 편입되었다. 역사적으로 1270(고려 원종 11년)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진도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영흥도를 기지로 삼아 70여 일 동안 항몽전을 벌였으며, 625전쟁때에는 인천상륙작전의 전초기지로 활용된 역사적인 장소이다.

새벽 4시 반, 아직은 잔어둠이 남아있는 진두항을 출발한다. 이곳은 안산시 대부도에서 서쪽으로 30리쯤 떨어진 연흥도()였다. 지금은 영흥도로 이름이 바뀌고 선재도와 대부도를 잇는 영흥대교가 건설되어 섬 아닌 섬이 되었다. 고려 말에 종실()이었던 익령군 기()는 고려가 장차 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름을 바꾸고 온 가족과 함께 바다를 건너 이 섬으로 숨어들었다. 그래서 고려가 망한 뒤 대다수의 왕씨들과 달리 죽임을 당하는 화를 면하였고, 자손은 그대로 이 섬에 살 수 있었다. 지리서인 『택리지』 저자 이중환의 시대에 오면 그들의 신분마저 낮아져서 말을 지키는 목동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탄 어선에서 20개의 낚시견지대에 줄줄이 낚싯대를 걸쳐 놓고 달리는 망망한 바다를 바라보니 오래된 기억속의 감회가 새롭다. 직경이 오리나 되는 큰 방죽 근처 동네에 살면서 어린시절부터 낚시를 즐겼던 나는 첫 직장에서도 낚시동호회장으로 주말이면 민물과 바다의 조황이 좋다는 낚시터를 찾아 직장동료들과 함께 집을 나서곤 했었다. 그렇게 지내다가 어느날 갑자기 정신이 번쩍들면서 부자들 흉내내며 가랭이 찢어지는 줄 모르고 이대로 살다가는 대가족인 우리모두 거렁뱅이 될까 그런걱정이 생겼다. 하루빨리 외벌이 가장의 책임과 노후준비를 해야겠다는 독한 맘을 먹고, 낚시와 골프도구를 모두 버리고 공대에 편입하여 그길로 평생 프로패셔널 엔지니어의 삶을 살아왔다.

영흥도 주변의 바다에는 낚시배들이 포인트라며 이곳저곳에 줄줄이 자릴잡고 있다. 집과 일터만 오고가는 일버러지 쳇바퀴 일상에서 모처럼 이렇게 넓은 바다를 마주하니 그냥 가슴이 확 트인다. 이곳은 인천항에서 남쪽으로 26km 해상에 위치한다. 최고봉은 중앙에 솟은 국사봉(:127.7m)이며, 동쪽에 대부도(), 북쪽에 무의도(), 서쪽에 자월도()가 있다. 이 섬의 원래 명칭은 연흥도()였으나 고려 말 익령군() ()가 정국의 불안으로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온 식구를 이끌고 이곳으로 피신하면서 익령군의 영()자를 따서 영흥도()라고 칭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영흥도에는 익령군이 머물던 3칸짜리 집이 엄중하게 잠겨 있어 누구도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방 안에는 서책과 기명()을 쌓아두었으나 어떤 물건인지 알지 못한다. 예전에 한 관리가 바람을 쐬러 이 섬에 왔다가 잠깐 문을 열어보고자 하였다. 그러자 목장의 말을 치던 여러 남녀가 애걸하면서 이렇게 호소하였다. “이 문을 열면 번번이 자손 중에 누군가 죽게 되는 변고가 일어났습니다. 그 까닭에 서로 경계하여 열어보지 못한 지가 3백 년이나 되었습니다.” 말을 들은 관리는 문 여는 것을 그만두었다.

배위에는 승선 예약시에 이미 지정된 각자의 번호가 있어서 그곳에서만 낚시를 해야 한다. 자리에 서서 낚싯줄을 풀어 바닥에 닿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루어(가짜미끼)가 물고기인것처럼 광어가 착각하도록 살살 움직여 줘야 한단다. 그러다가 뿌웅뿌우~ 선장이 뱃고동을 울리면 다른 장소로 이동한다는 신호이므로 낚시를 빨리 거둬야 한다. 왕초보인 나는 두번씩이나 이런 신호를 감지하지 못하고 배가 출발하는 바람에 낚싯줄을 잘라서 바다에 버려야하는 실수를 감수했다. 애당초 아무런 채비도 없이 맨몸으로 따라나선 나에게 알파와 오메가까지 모두 챙겨주고 뒷바라지 해주는 반백년지기 친구에게 너무 고맙고 미안하다. 

커다란 광어를 들고 내가 낚아올린 것처럼 사진을 찍었다. 광어는 우리나라 연근해 수심 20~40m의 바닥에 넓게 분포해 있다. 바닥면과 구별되지 않은 보호색을 띠고 납작하게 엎드려 있어 경험이 많지 않은 낚시인들은 찾기가 힘들다광어는 눈이 한쪽으로 몰려 있어 중국에서는 비목어()라고 불린다. 그런데 이들이 태어날 때부터 눈이 한쪽으로 몰려 있는 것은 아니다. 태어날 때는 머리 양측에 한 개씩의 눈이 있고 다른 물고기와 같은 방법으로 수면 가까이에서 헤엄치지만 성장하면서 눈이 한쪽으로 몰리고 삶의 터전도 바닥으로 옮겨간다광어는 다른 물고기처럼 공간을 3차원으로 이용하지 않고 거의 수평이동만 하기에 도망간 방향을 따라가면 멀지 않은 곳에서 다시 납작 엎드려 있는 광어를 다시 찾을 수 있단다

우리배에 승선한 낚시인 16명이 꼬박 12시간 동안 낚시로 수고하여 건져올린 광어다. 광어는 넙치가 표준말이고 광어가 사투리였지만 광어라는 이름으로 널리 불리면서 광어도 표준말로 대접받게 되었다. 넙치라는 이름은 넓적한 생김새에서 파생된 말이며 광어는 (넓을 광)자에 (물고기 어)자를 붙여 만들어졌다. 광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횟감 중 하나이다. 고기 맛이 좋은데다 대량 양식에 성공하면서 대중화된 결과이다. 그런데 광어회를 좋아하기는 북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1996년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 당시 생포된 승조원 이광수는 체포 후 심문과정에서 심경의 변화를 알리며 ‘광어회가 먹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우리 속담에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번다'는 그 말 그대로 나는 친구 덕택에 모든걸 받아 챙기는 빈대가 되었다. 맨몸으로 집에서 나와 친구가 운전하는 차로 이동하여 낚싯배에 오르고, 친구가 챙겨온 낚시도구와 아울러 간식과 음료까지 먹으면서 신선한 바닷공기를 마시며 오래 찌든 삶의 찌꺼기를 바다에 내다버리는 빈 낚시를 즐겼다. 친구의 옆자리에 앉아 솜씨좋은 친구가 잡은 광어 두마리를 모두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와 염치없는 모습으로 쫄깃거리는 자연산 넙치회를 고마움과 미안함을 버무려 질겅질겅 맛있게 씹는다. 저 바다 같은 마음을 가진 반백년 친구의 모습을 EverGreen 사랑으로 생각하며...     

영흥도에서 출발하여 포인트를 찾아 옮겨가면서 점점 이동하다보니 눈앞에 보이는 이곳은 영흥도 북쪽에 있는 무의도란다. 여길 지나면 영종도가 나온다. 『고려사지리지』나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같은 지리지에는 영종도가 자연도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다. 고려 때 이 섬은 송나라와 문화 교류를 하던 명주 항로의 거점이었다. 명주 항로는 예성강 포구에서 영종도를 거쳐 고군산도와 흑산도를 거쳐 중국의 명주에 이르는 뱃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영종도에는 인천국제공항이 만들어져 세계 교역의 중심 공항이 되고 있다. 한편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백령도나 대청도 등 서해 지방의 섬은 원나라에서까지 그 나라 사람들을 귀양 보내던 귀양지라고 한다.

진두항에 정박한 광어잡이 낚시어선들이다. 광어의 대량 양식법이 개발되면서 서민들도 부담 없이 광어 맛을 즐길 수 있게 되었지만 자연산만이 전부이던 시절 광어는 대단히 귀한 물고기였다. 자연산만을 고집하는 미식가 중 입맛으로 자연산을 구별해 낸다고들 하지만 사실 자연산과 양식을 구별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잡힌 지 오래된 자연산 광어는 수족관 안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스트레스로 양식 광어보다 육질이 떨어질 때도 있다. 굳이 구별한다면 양식 광어는 배 밑면에 푸른색 이끼가 있는 반면 자연산은 배 밑면에 이끼가 없고 흰 편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양식 광어가 사람이 뿌려주는 사료를 먹고 성장하기에 이빨이 잔잔하고 고르다면 자연산은 약육강식의 야생에 적응하느라 이빨이 크고 불규칙적인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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