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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사랑의 길(龍仁)

영대디강 2024. 8. 4. 04:35

한국의 '산티아고 길'이라 불리는 '청년 김대건길'은 제1구간이 은이성지에서 출발하여 미리내성지까지 10.3km를 걷는 길이며, 이 길을 '사랑의 길-마을길'이라고 명명하였다. 은이 성지에서 미리내 성지까지 걷는 길에는 험한 고개 셋이 있다. 이 고갯길은 한국인 첫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교우들에 의해 사목적 열정을 불태우던 사목활동로(司牧活動路)이며,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이민식 빈첸시오가 미리내에 안장하기까지의 시신이장로(屍身移葬路)이다. 

은이(隱里) 는 조선시대 고지도에 ‘언리(里), 어은리(御隱里), 은리( 隱里)등으로 표기되었다. 모두가 숨겨진 동네, '숨어있는 마을을 의미하는데, 이곳에 박해를 피해 숨어 살던 천주교 신자들의 은신처로서 일찌기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이후 은이는 지역 신앙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하면서 유서깊은 신앙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은이성지(隱里聖址)는 김대건 신부가 사제 서품을 받은 중국 상해 김가항성당이 2001년 상해 정무위 도시개발계획에 따라 철거되자, 철거직전 성당에 대한 실측을 실시하고 김가항성당의 기둥과 대들보 등 일부 부재를 가져와 2016 9월 이곳에 김가한성당을 복원하였다.

은이성지는 한국 최초의 사제요, 순교자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1836년 모방 신부에게 세례성사와 첫 영성체를 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된 곳으로, 한국 천주교회에서 첫번째로 사제 성소(聖召)의 열매가 맺어진 자리이다. 1845년 조선인 최초로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한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활동은 은이공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이곳에서 순교전 공식적인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였다. 즉, 은이성지는 김대건 신부의 성장(산 너머 골배마실), 세례성사, 신학생 선발, 사제서품 후 사목활동의 직접적인 장소로서 한국 천주교회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장소이다.

은이성지 입구에서 출발하여 마을길로 들어서니, 마을 집 앞에서 은행나무 가지 사이에 얼기설기 멋지게 지어 놓은 여름 놀이터 오막살이 집이 보인다. 이 놀이터로 오르내리는 사닥다리도 보이지 않고 오막살이집에 올라앉은 사람도 보이지 않지만, 꼰대의 어린시절에 이렇게 만들어 놀았던 기억이 새롭게 솟아 올라서 추억을 소환하며 걸어간다. 은이마을은 박해시대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자들의 눈을 피하여 모여 살게 되면서 형성된 교우촌으로서 은이(隱里)라는 글자 그대로 숨어 있는 마을이란 뜻을 저렇게 상징적으로 나타낸 걸까 그런 생각이 든다.

등산로 안내판(은이성지-미리내성지)이다. 삼덕고개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1821 - 1846) 신부가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하자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이민식 빈첸시오 신부(1829-1921)가 미리내 성지로 모시고 올 때 숨어 걸었던 일부 구간이다. 삼덕이란 말은 향주삼덕(向主三德)의 준말로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필요한 믿음, 소망, 사랑의 세가지 덕목을 말한다,

김대건길을 걷으면서 중간 곳곳에 설치된 명언명구들을 읽으며 지루하지 않게 걷는다. 청년 김대건 길 5. "열정도 닮는다. 함부로 쓰다보면 정말 써야 할 때 쓰지 못하게 된다. 언젠가는 열정을 쏟을 일이 찾아올 테고 그때를 위해서 열정을 아껴야 한다. 그러니까 억지로 열정을 가지려 애쓰지 말자. 그리고 내 열정을 내가 알아서 하게 가만 놔뒀으면 좋겠다." 하완 -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1886 1 13, 프랑스 선교사로는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모방(Maubant, )신부가 그해 4월경 이곳을 방문하여 당시 15세인 소년 김대건(金大建, 1821 ~ 1846)에게 안드레아라는 세례명으로 세례성사와 첫 영성체를 주고, 신학생으로 선발한 곳이다. 성지 기념관 앞 옛 은이공소지로 전해지는 곳에 소년 김대건이 세례받은 형상의 조형물을 설치해 놓았다신학생으로 선발된 김대건(안드레아) 7 11일 서울 모방 신부댁에 도착하여 이미 선발된 동료 최양업( 崔良業 토마스), 최방제( 崔方濟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등과 함께 라틴어를 배우다가, 123일 중국 마카오의 파리방전교회 극동 대표부 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은이성지에서 미리내 성지까지 걸어가는 길에는 험한 고개 셋이 있는데, 옛부터 교우들은 이 고개를 신덕고개( 信德 은이고개), 망덕고개( 望德 헤살이 고개), 애덕고개(愛德 오두재고개)라고 부르며 지금껏 도보 순례를 하면서 그의 고귀한 순교신앙 정신을 기리고 있다. 김대건 신부는 1925 7 25일에 로마에서 시복되었고, 1984 56일에 교황 바오로 2세에 의해 서울에서 시성되었다.

신덕(信德)고개 표지석에 성 김대건 신부 사목활동 길순교 후 유해 운구 길이라고 쓰여 있다. 김대건 신부의 유언이다.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았으니 여러분은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한 것은 내 종교와 내 하느님을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믿으십시오. 천주께서는 당신을 무시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벌을 주시는 까닭입니다."

김대건이 태어날 때 이미 증조부와 작은 할아버지가 순교한 천주학 집안이어서 가세는 기울대로 기울었고, 박해를 피해 할아버지 김택현은 김대건이 7살이 되던 해에 경기도 용인시 내사면 남곡리 '골배마실'이라는 산골로 이사하였다. 15살 때인 1836년 피에르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최양업(토마스)과 최방제(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했고 상해(上海) 진쟈상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1845 8 17 사제로 서품돼 그 해 10월에 귀국한다.

은이봉 정상에 섰다. 은이산 363.3m. 중3인 손녀 나윤이가 할아버지는 걷기를 너무 많이 좋아해서 이 무더운 여름날에 꼭 필요하실거라며 목걸이 선풍기를 선물해 줬다. 흐르는 땀방울이 주체하지 못할만큼 줄줄 흘러내림에도 이 사랑의 손녀 나윤의 마음바람이 할아버지 얼굴을 식혀주고 있다. 땀방울 대신에 손녀의 마음 씀씀이의 깊은 사랑으로 감사의 마음이 산기운으로 더 많이 줄줄 흘러 내린다. 

이렇게 산 숲길을 걷노라면 머리에 흐르는 땀 방울 냄새를 겨누고 달려드는 하루살이떼들이 득실 거린다. 산길에서 만나는 이름모를 벌레들과 숲속 적막감과 고요함을 선풍기로 날려 쫒아내는 윙윙소리로 달래며 섭시34도의 한여름 무더위속을 즐겁게 걷는다. 그렇게 한적한 길로 마냥 걷다보니 이정표가 없는 산속으로 자꾸만 들어서며 길을 잃었다. 그래도 쉬지않고 걸으며 가파른 산길을 마냥 줄레줄레 걷는다.  

엉뚱한 길로 돌아돌아서 이정표에 나타나는 와우정사(臥牛精舍)에 왔다. 와우정사는 경기도 용인시 해곡동 연화산의 48개 봉우리가 마치 병풍처럼 둘러쳐진 곳에 위치한 사찰로 1970년 실향민인 해월삼장법사(속명 김해근)가 부처님의 공덕을 빌어 민족화합을 이루기 위해 세운 호국사찰이며 대한불교 열반종의 본산으로 3천여 점의 불상이 봉안되어 있는 사찰이다.

절 입구에 돌로 불단을 쌓고 그 위에 모셔 놓은 높이 8m의 불두(佛頭)는 미완성으로 차차 시주가 모이면 전체를 완성시킬 예정이란다. 와우정사에는 인도·미얀마·스리랑카·중국·태국 등지에서 모셔온 불상 3천 여점이 전시되어 있어 세계 각국의 불교문화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이 세계만불전(萬佛殿)은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뜻을 담고 있다. 와우정사는 삼보(三寶)를 다 봉안하고 있다. 인도·스리랑카·미얀마에서 들여온 석가모니 불진신사리(佛眞身舍利), 파리어 대장경과 산스크리스트어 장경(藏經) 등이 봉안되어 있다

소싯적 내가 13년간 후암동에 살때는 와우정사 앞으로 거의 매일처럼 지나다녔기에 그 이름만 들어도 반갑고 정겹다. 와우정사는 대한 불교 열반종의 총 본산으로 1970년 실향민인 해월 삼장법사가 민족 화합의 염원을 담아 세운 사찰이다. 누워 있는 부처상인 와불(臥佛)과 철로 만든 불두(佛頭)로 유명하다

세계 각국의 크고 작은 불상들을 전시해 놓은 세계만불전, 백두산과 히말라야, 불교 성지 등에서 가져온 돌과 세계적인 고승들, 불교 신자들이 가져온 돌을 쌓아 만든 통일의 탑도 흥미롭다. 여느 사찰과는 달리 마치 공원처럼 꾸며진 와우정사는 일반인들에게도 많은 볼거리를 제공해주는 곳이다. 미륵반가사유상은 세계최대의 미륵반가사유상으로, 청동으로 조성된 6m의 명상하는 형태의 불상이다.

대한불교 열반종은 1978년 와우정사를 총본산으로 정했다. 1986년 ‘한국불교 와우정사’를 재단법인으로 문공부에 정식 등록했다. 1991년 대한불교 열반종이라는 종단 이름도 등록했다. 1992년 한국불교종단협의회에 가입했다. 조직은 최고 지도자인 종정(宗正) 아래 총무원, 포교원, 교육원 등 3개 원으로 구성되었다. 와우정사에 누워 계신 부처님이다. 이 와불은 인도네시아에서 들여온 향나무를 깎아 만든 것으로 길이가 12m, 높이가 3m에 이른다. 세계 최대의 목불상으로 영국기네스북에 기록되었다. 

고려시대에 성립된 종파에서 열반종은 보이지 않는다. 개성 흥왕사(興王寺)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의 묘지(墓誌) 열반종은 계율종(戒律宗), 법상종, 법성종, 원융종(圓融宗), 선적종(禪寂宗)과 함께 육학종(六學宗)의 하나로 나온다. 당시 육학종은 불교의 전공분야였다. 중국의 남북조시대에도 열반종은 학종(學宗)이었을 뿐 하나의 종파로 성립되지는 못했으며, 열반경이 우리나라의 삼국시대에 전해진 것은 맞지만  종파로까지 발전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 따라서 열반종은 종파가 아니라 당시 승려들의 전공분야인 학종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초 사랑의 길을 미리내 성지까지 완주하는 걸음이 목표였는데, 엉뚱한 은이봉 산길로 들어서서 무덥고 습한 숲길을 헤메이다가 이곳 와우정사에 들어오니까 몸과 맘이 모두 지쳐 버렸다. 주차장의 매점에 앉아서 냉커피를 마시며 돌아가는 택시를 콜했다. 이곳에서 은이성지 입구까지 택시를 타고 돌아가니 요금이 20,100원이 나온다. 대전에서 돌아와 오늘은 멀고 험한 사랑의 길을 오랜만에 지치도록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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