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장

일본과 나

영대디강 2023. 4. 9. 05:14

요즘 일본과의 외교관계가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용어로 길거리에서 현수막에 붙어 곳곳에서 회자되고 있다. 과연 우리나라는 반만년 역사속에서 언제 한번이라도 이웃나라에게 가해자 노릇을 해 본 역사가 있었을까? 지금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나라들은 미국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와 일본의 세계 4대 강국의 힘센 나라들 틈사이에서 두곳의 민주진영과 두곳 사회주의 나라인 그네들과 어떻게 관계설정을 맺고 잘 살아갈 수 있을까? 대륙으로 통하는 길은 이미 남북이 휴전선으로 갈라져 맞대고 있어서 섬이 되어버린 작은 나라 국민된 삶을 치열하게 살아온 나는 개인가족력의 역사적으로 나와 일본과의 관계를 잠시 생각해 봤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 내 조상으로 중시조인 국자박사(國子博士) 계용(啓庸)은 고려 원종 통신사 서장관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그런 연유로 1274(고려 원종 5) 10월 원나라가 일본을 정복하려 할 때 동행 참가하였으며, 이때 원나라는 원수 흔도(炘都)의 지휘하에 25,000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제1차 일본 원정을 단행하였고, 고려도 연합군으로 참전하여 군사 6,000명과 뱃사공 6,700명 및 전함 900척과 군량미를 부담하였다.  합포(마산)에서 출발한 연합군은 쓰시마, 이키섬을 정벌한 후 기타규슈(北九州)의 다자이부를 공략하기 위해 히젠에 도착하여 하카타, 하코자키, 이마쓰 등지에 상륙하였다. 연합군은 도처에서 전과를 올렸으나 마침 강한 태풍이 불어 많은 함선과 병사를 잃고 합포로 철수하였다. 일본 정벌에 실패하고 돌아와 계용은 진산부원군에 봉해졌으나 일본정벌 실패의 책임을 지고 벼슬도 내려 놓은 채, 두문동에서 왕이 불러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두문분출하여 고집쟁이의 대명사로 불리우는 성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이후 조선시대인 1624년(인조 2년)에 조선의  3 통신사 17세손 홍중(弘重)은 도쿠가와 이에미츠 취임식에 460명의 사절단을 이끌고 일본을 다녀왔고, 그로부터 줄줄이 대를 이어 세월의 흐름속에 칠백년을 내려와 그의 25세 종손인 내 아버지 만술(萬術)은 징용으로 일본땅을 밟게 되었단다.

1944년 9월 아버지 만술(萬術)은 오사카의 미쓰비시조선소에 강제 징집당했다. 일제는 대동아공영권을 꿈꾸며 대동아전쟁을 구실로 삼아서 군함을 만드는 노무자로 식민지 조선의 젊은 인력을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강제 징집으로 동원하였단다. 당시 면사무소에서 가정을 꾸리지 않은 총각들을 모이라 한다고 전영진, 강성희와 함께 한동네 동갑내기 세 친구가 더불어 면사무소에 찾아갔다가 그 길로 바로 징집당하여 떠난다는 인사도 못하고 곧장 일본행으로 소식이 끊겼단다.

만술(萬術)은 유교적인 집안에서 가장 귀한 외아들로 종손의 벼슬을 달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 영주교를 신봉하던 할머니가 종갓집 맏며느리로 딸 넷을 낳은 후 42세의 늦은 나이에 천지신명님께 기도하여 늦둥이로 얻는 가문을 이어줄 종손이었단다. 당시에는 식량공출로 먹거리 조차도 구하기 어렵고 힘든 시절이라 식구들이 가마솥에 시커먼 보리밥 삶아 끼니로 삼을때, 가마솥 아궁이 옆에 땅굴을 파고 그 위에 나뭇단과 볏집으로 덮어 숨겨둔 귀한 쌀로 삼베 주머니에 한웅큼 쌀밥으로만 보리한톨 안섞이게 먹여서 키운 그런 아들이 어느날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졌다며 육십넷 할머니는 밤잠도 안자고 기도하며 금식하셨더란다. 그때 그 시절에도 한 집안의 대를 이어줄 외아들인 독자는 징용대상이 아니었는데, 당시 면서기이던 한동네 사는 임찬세가 풍천임씨 자기집안 사람이 아니라고 그렇게 징집대상으로 둘러 씌웠단다. 24세손은 오랜 친구 배씨가 북만주 땅으로 농사지으려 멀리멀리 이주한다해서 이사비용으로 쌈짓돈 몇푼 쥐어 주었는데, 그 돈이 독립자금이라고 모함했단다. 독자인 아들 징용과 독립군자금을 이유로 할아버지는 똥두깐에서 그렇게 원인도 모르게 급사하셨단다. 

1948년 8월15일 해방 후 면서기에서 면장이 된 임찬세의 아들 재명이와 완명이는 만술의 장남인 26세손과 국민학교 동기동창이다. 세살 위 재명이 형과는 같은 반이었고, 완명이랑 나는 국민학교와 중학교까지 매일 매일 등하교를 함께 하면서 소나무위에 얼기설기 나뭇집도 지어놓고 한방에서 먹고자고 놀면서 그렇게 친하게 지냈었다. 그럼에도 할머니와 아버지는 징용보낸 그런 사람의 아들이랑 가까이 지내지 말라는 한마디 언질조차 않으셨다. 그런가하면, 그 면장 찬세의 아들 박명이 사범학교 마치고 첫 부임으로 내 동생 담임선생이 되었을때, 국민학교 4학년임에도 한글을 깨우치지 못한 동생을 다잡아 기필코 글을 깨우치게 가르쳤고, 또한 면장의 유복자인 도명은 은광여고 국어교사로 만술 할아버지의 세찌손녀 문학지도 교사였었다. 이렇게 얽히고 설킨 이웃으로 살아온 이것이 바로 세상일에는 공짜도 없고 외상도 없다는 인연이 아닌가?.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서 함께 징용으로 끌려갔던 동네친구들은 모두 돌아 왔는데, 만술(萬術)은 소식이 없었단다. 동네 친구들에게 소식을 물어도 모른다는 대답 뿐 이었단다. 그길로 할머니는 매일 매일 후리의 집에서 징게 기차역까지 매일 왕복 오십리 길을 끼니도 거른채 날마다 걸어서 오가며 새벽 첫차부터 늦은밤 막차까지 만술이 돌아오기를 바라며 그렇게 맨발에 고무신을 끌고 눈물로 돌아오시곤 했단다. 내가 국민학교 3학년때 77세로 돌아가신 할머니와 한방을 쓰면서 가끔 들어야 했던 이야기로는, 그 해 여름에 오두막집 방문 창살에 붙였던 모기장을 그대로 둔채 혹독한 겨울추위를 지낼만큼 할머니는 맨정신이 아니었단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일본이나 면장을 가해자라고 원망하거나 욕 하는걸 단 한번도 기억하지 못했었다. 다음해 8월 한여름이 돼서야 만술(萬術)은 그렇게도 애타는 엄마 품으로 돌아 왔단다. 가난했어도 귀하게 자란 탓에 조선소의 노역과 배고픈 설움을 견디다 못해 도망쳐 나와서 일본땅을 전전하며, 해방후에도 귀국선인 부관연락선(부산-시모노세키) 배삯인 여비를 마련하지 못해서 그렇게 귀국선을 탈 준비하는 시간이 일년이 넘도록 유리걸식하며 돈을 모아 겨우 돌아왔더란다.

일본의 징용에서 돌아온 만술(萬術)은 농산물검사소의 검사원이 되어 이름이 봉희(鳳熙)로 항렬에 따라 바뀌었단다. 그로부터 면서기에서 면장이 된 가해자 창세는 피해자 봉희에게 부탁하는 입장으로 바꾸었다더라. 당시 추곡수매법에 따라서 농민들은 농사를 지어서 시장에 내다 팔 수 없으므로,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농산물 공판장에서 가마니와 곡식(나락과 보리 등)은 검사원의 손에서 매겨지는 등급을 받아야만 했단다. 그렇게 자빡이 찍힌 가마니에 1등, 2등, 3등, 등외.... 자빡을 찍어주는 검사원의 권위가 대단했단다. 내 어린시절에 저녁이면 선물을 싸들고 우리집에 찾아와서 낼 어느 장날에 볏가마를 몇십개 낼테이니 잘 좀 봐달라고 그렇게 사바사바하던 어른들 모습을 많이도 봤었다. 대농인 창세도 그렇게 입장이 바뀐 채 몇해가 지나지 않았지만 창세는 세상을 떠났고, 그럼에도 봉희는 창세네가 공판을 내는 날에는 항상 품질과 무관하게 1등 도장만 찍어줬더란다.

1982년 8월에 26세손인 나는 혼자서 11박12일의 일본 공무 출장 여행길에 올랐었다. 1982 7, 1983 4 이후 사용될 일본의 ··고교 역사 교과서에서 한국의 고대사, 근대사, 현대사 등을 모두 왜곡 기술하여 한일관계가 극도로 악화된 시기였다. 역사교과서에 특히 현대사 부분을 가장 심각하게 왜곡하였다. 예를 들어 한국침략진출, 외교권 박탈과 내정 장악을접수, 토지 약탈을토지소유권 확인, 관유지로의 접수’, 독립운동 탄압을치안유지 도모등으로 호도하였다. 이외에 조선어 말살정책을조선어와 일본어가 공용어로 사용’, 신사참배 강요를신사참배장려등으로 왜곡 기술하였다. 우리 국민감정이 극도로 악화된 시기에 홀로 출장지인 동경에서 나는 일본어를 잘 모르기도 했지만, 당시 일본에서는 국수주의 영향으로 영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으려 했던 일본인에 대한 대응으로 우리말만 사용했었다. 꼬박 이틀간의 보안교육을 마치고 기관장에게 출국인사를 하였는데, 절대로 한국인의 품위를 잃지 말고 돌아올때는 귀국선물이랍시며 볼펜 한자루도 사들고 오지말라고 당부하였다. 하네다 국제공항에 도착시 부터 나는 무슨 배짱이었는지 입국장에서 소지품검사부터 일본어를 전혀 모른다면서 마냥 우리말로 버텼다. 출국시부터 돌아오는 날까지 동경에서의 일과는 조종련 관계까지 겹쳐서 많이 힘들고 어수선했지만, 나는 한국인이라는 뱃짱하나로만 버텼다. 그렇게 똥배짱으로만 일관되게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 하네다 공항 출국장에서 우리말로 내 이름을 호명하며 나를 찾는 안내방송이 흘러 나왔다. 귀국후 나중에 주일대사관 직원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지만, 하네다 공항이 개청이래 한국어로 방송이 나온 일은 처음으로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단다. 순전히 젊은 혈기로 바보같은 짓이 애국인 걸로 생각하며 객기를 부린 사건이라서 지금도 그 시절을 반성한다.

이후 27세손인 원지, 승우, 호준, 진석으로 이어져 가까운 이웃에서 공부하고 일하며 일본에서 산다. 26세손의 여인들은 담 월요일에 또 오끼나와로 건너가서 호준의 가이드로 렌트카를 몰고 자유여행 길에 오른다. 지금에와서 아쉬움이라면, 이렇게 25세손 만술(萬術)의 자손은 모두 일본을 이웃집 드나들듯 잘 사는데, 92세까지 건강하게 사시다 돌아가신 그분의 추억을 회상할 오사까 미쓰비시조선소를 한번쯤 둘러보시라고 모시고 찾지 못한게 크게 맘에 걸린다. 너무 많이 죄송하다. 아버지는 밥상머리 교육으로 사농공상(士農工商)을 머릿속에 외우듯 살았던 이 나라에서, 칠백년 전 1세 조상은 중국 원나라의 연합군으로 일본을 정벌하려 했었고, 25세손은 일본의 노무자로 잠시 살았음이 가해자와 피해자의 모습일까 아니면 애증관계의 이웃 모습인가? 지금도 일본의 극우세력은 조선에서 일본으로 사절을 파견한 반면 일본에서 조선으로 파견하지는 않았으니 "조선이 일본에게 조공을 했다" 주장하며, 이를 교과서나 서적에서 그대로 차용한 탓에 조선이 굴욕적인 조공외교를 했다는 설이 일본 국내에서는 팽배해 있다. 

지금도 남북은 총구를 겨누며 주적으로만 대하고, 남쪽은 동서로 갈라서 으르렁 거리며 정치인들의 당파 싸움에 하루도 편안함이 없는 이 작은 나라의 후손들을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정답은 개인이든 국가든 힘이 있어야 한다. 스스로를 방어하고 지킬 힘도 없으면서 사색당쟁으로 몰락했던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 하지 말자. 솔직히 36년간의 일제강점기가 우리가 일본과의 무력전쟁에서 패하여 그들의 식민지가 되었는가? 이제 우리는 아픈 역사를 디디고 교훈삼아서 우리 지도자들이 솔로몬의 지혜와 늑대의 통합 리더십으로 모두가 하나로 똘똘 뭉쳐서, 작은 고추가 맵다는 속담처럼 힘센 이웃나라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우리 후손들이 세계속의 한국인으로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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