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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서희 묘, 이포보(驪州)

영대디강 2020. 9. 27. 05:45

 

고려 시절 외교관의 대명사쯤으로 알고있는 인물로, 신라의 김춘추, 조선의 최명길, 이예 등과 함께 한국 외교사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외교관이란 인식이 강하지만, 실제 서희는 외교관 뿐만 아니라 재상까지 지낸 장기적인 안목을 지닌 전략가이자, 원칙과 책임 의식을 지닌 정치인이기도 했다.

서희는 무관직을 제수한 적이 없기 때문에 장군이 아니다. 서희가 받은 병관어사(兵官御事)상서성 소속의 문관직이며 여요전쟁 당시 받은 중군사(中軍使) 직은 고려가 임시 군단을 조성한 뒤 비상설직으로 봉하는 지휘관 정도의 직위라 정식 무신 직위에 임명된 적이 없다. 고려시대 군권은 문신들에게 있기 때문에 이런 오해가 생겼다고 본다. 1980년대 ~ 1990년대에 나온 역사 만화 등을 보면 서희는 갑옷을 입은 장군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고, 아직도 여주에 있는 서희 묘 안내판에도 '서희 장군'라고 쓰여 있다.

당시 거란의 주적은 고려가 아닌 연운 16주를 사이에 두고 격전을 벌이던 이었고, 고려 침공은 송나라와의 본격적인 전쟁에 앞서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시행된 사전 정지(整地) 작업이었다. 회담은 고려가 어느 나라를 계승했으며(역사적 연고권), 왜 고려가 가까운 요나라가 아니라 송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느냐(외교 문제)는 이야기를 주된 화두로 삼았다.

소손녕: 고려는 옛 신란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영토의 대부분은 우리 영역 안에 있는데 어찌하여 옛 신라땅에서 일어난 나라가 옛고구려의 영토를 가지고있는것이요? 우린 이미 옛 고구려땅의 대부분을 차지했단 말이요.
서희: 그건 말이 안되는 거 같소. 우리는 고구려
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고려라고 이름을 지었고, 수도가 평양인 것도 고구려를 이으려는 것이다. 그러니 따지고 본다면 거란의  동경(지금의 랴오양)도 우리의 땅인데 누가 누구한테 침략을 한다는 것이오?
소손녕: 그럼 도대채 왜 우리 요나라
랑 더 가까운 위치이면서 송나라 하고만 교류를 하는 것이오??
서희: 요나라와 교류를 못 한 건 여진족
이 가로막고 있어서 그러하오. 여진을 몰아내고 그 땅을 우리한테 준다면야 어찌하여 요나라와 교류를 아니하겠소?

이 회담으로 요군은 물러갔고 고려는 지금의 평안북도 서쪽 일대인 강동6주를 얻게 되었다.

위의 대화는 꽤나 간략하지만 서희가 거란 진영에 머무른 시간은 7일이었다. 다만 실제 담판 시간 자체는 그리 길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서 현대의 외교 협상에서도 5(~)짜리 협상을 한다 했을 때, 협상 수석대표들이 실제 담판을 하면서 협상의 큰 틀을 짜는 시간은 1일 중 길어야 2~3시간밖에 안 된다. 나머지는 본국과 연락하며 협상 조건이 본국 방침에서 수용 가능한 것인지 확인하는 작업과, 수정 제안을 위해 회담 실무진과 수석대표 간 사전조율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서희와 소손녕의 담판 내용은 요약된 것일지언정 그리 많이 축소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기록에 남은 공식회담 외에 치열한 막후협상이 있었을 것이다. 이는 과거나 현대나 외교전에서 변함이 없다.

어쨌든 회담 이후 이 지역을 요새화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느라 너무 무리한 탓인지 성종 15년부터 자리에 눕게 되었고 개국사라는 절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성종은 직접 문병을 가고 서희의 쾌유를 위해 지극정성을 다했지만 997년에 되려 성종이 먼저 승하했고, 서희는 성종이 죽은 이듬해인 998년에 57세로 돌아가신다.

회담은 처음부터 서희와 소손녕의 기 싸움으로 시작되었다. 소손녕 "나는 큰 나라의 귀인이니 그대가 마땅히 뜰에서 큰 절을 해야 한다"라고 하며 서희에게 절을 하라고 하지만 서희는 "신하가 임금을 대할 때 뜰에서 절하는 것은 예법에 있는 일이지만, 양국의 대신이 대면하는 좌석에서 절을 한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라고 되받아쳤다. 이 과정을 두 세 번 반복해도 소손녕이 계속 이를 고집해서 서희는 화가 나서 숙소로 돌아와서 나오지 않았다. 결국 소손녕은 서희의 인품에 감탄하여 서로 맞절을 하고 동서로 마주 앉았다고 한다. 사실 협상은 현대 국가에서도 협상 전의 기 싸움이 적어도 결과의 절반 이상을 결정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기 싸움의 의미는 상당히 크다.

본관 이천(利川). 자 염윤(廉允). 시호 장위(章威). 960(광종 11) 문과에 급제,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郞)에 이어 내의시랑(內議侍郞)이 되었다. 982년 송나라에 가서 중단되었던 국교를 트고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尙書)가 되어 귀국했다.

993(성종 12) 거란(契丹)의 내침 때 중군사(中軍使)로 북계(北界)에 출전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조정에서는 항복하자는 안()과 서경(西京) 이북을 할양하고 강화하자는 안 중에서 후자를 택하기로 했으나 이에 극력 반대, 자진해서 국서를 가지고 가 적장 소손녕(蕭遜寧)과 담판을 벌였다.

이때 옛 고구려 땅은 거란 소유라는 적장의 주장에 반박, 국명으로 보아도 고려는 고구려의 후신임을 설득, 거란군을 철수시켰다. 994년 평장사(平章事)로 청천강 이북의 여진족(女眞族)을 축출, 장흥진(長興鎭) ·곽주(郭州) 등을 축성, 압록강 진취의 전략기지로 삼았다. 또 압록강 문제를 전담할 압강도구당사(鴨江渡勾當使)를 두게 했으며, 이듬해 안의진(安義鎭: 安州) 등지에 축성하고 선주(宣州: 宣川) 등지에 성보(城堡)를 쌓아 지금의 평북 일대의 국토를 완전히 회복했다.

태보내사령(太保內史令)을 지내고 신병으로 개국사(開國寺)에서 임종하였다. 이곳에 묻힌 서희는 성종 묘정(廟庭)에 배향, 덕종 때 태사(太師)가 추증(追贈)되었다. 거란(契丹)의 내침 때 서경(西京) 이북을 할양하고 강화하자는 안에 극력 반대, 자진해서 국서를 가지고 적장 소손녕과 담판을 벌여 거란 군을 철수시켰으며, 그 후 여진을 몰아내고 지금의 평북 일대의 국토를 완전히 회복한 우리나라의 역사적인 인물이다.

아들인 서눌(徐訥)도 재상 자리에 올라서 이 집안은 살아서는 3대가 재상을 지낸 빵빵한 집안이 되었고, 죽어서는 3대가 모두 왕과 함께 종묘에 배향되는 영예를 누렸다. 그리고 서눌의 딸은 현종 6비 원목왕후인데, 자식은 두지 못했다.

반만년의 우리 역사 속에서 우리조상들은 단 한번도 영토를 넓히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저 침략해오는 외적을 막아내기에만 급급했던 민족이었기에, 우리 영토를 확장한 역사상 단 한 분이 여기 잠들어 계시다. 싸우지 않고도 적을 물리치신 분, 우리들의 우상이신 충무공과 비교해도 전혀 아쉬움 없는 분이시기에 오늘 여기에 존경과 감사로 참배한다.   

우리나라 역사인 국사를 배우면서, 어린 시절에도 나는 왜 우리 조상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볼 요량도 없이 그냥 나라를 송두리째 내어줬는지 을사오적의 양반의식을 비통하게 생각했다. 그런 식민지 백성의 자손들이 지금은 친일이 어떻고.. 하면서 아픈 역사를 자꾸 들춰낸다. 그런 바보같은 우리들의 조상으로 인한 비참한 역사가 있었기에 후손들은 지금도 여기 계신 장군님의 업적이 뼈에 사무치게 감사하다.   

 

이포보(梨浦洑, Ipobo)는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과 대신면에 있는 남한강의 보로서 4대강 정비사업 과정에서 부설되었다. 이포대교의 조금 북쪽에 있다.

경기 여주 남한강에 위치한 이포보는 금사면 이포리와 대신면 천서리에 걸쳐 있다. 이포보는 길이 591m로 홍수조절 기능이 탁월한 곳이다. 이 보를 만든 정권을 부정하는 세력은 4대강 사업의 폐해가 이미 자료와 연구로 증명됐다고 지적하는 한편, 옹호하는 세력은 4대강 사업의 홍수 방지 효과를 주장함과 동시에 현 정부의 태양광 개발 문제를 파고 들며 아직도 이 사업의 정당성에 대한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속좁은 인간들이 편가르기와 패싸움을 하든지 말든지 여기 경기도 여주시 남한강에 흐르는 물은 이 아름다운 계절에도 강물을 유유자적 흘려보내고 있다.

남한강 자전거길이 푸른 녹지와 잘 어울리며, 윗쪽으로 올라가면 팔당대교 방면이고, 아랫쪽은 충주댐까지 갈 수 있고, 충주댐을 지나, 부산까지도 갈수 있다. 핑크빛 하트속에 새겨진 '어떠한 심포니보다 더 아름다운 당신의 심장소리' 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거나 그냥 걸어서 지나는 사람들의 심장소리로 들린다. 

 

남한강이 흐르는 여주에는 강천보,여주보, 이포보 3개의 보가 있으며, 이포보는 수문이 6개가 있고, 백로의 알은 수문을 작동하는 권양기가 들어 있다. 권양기는 기중기라 생각하시면 된다. 무거운 물건을 끌어 올리는 기능을 하는 장비다.

이포보 우측에 있는 조형물은 여주시의 상징인 백로와 백로의 알을 형상화 했다. 백로의 알이 7개나 있다.

이포대교는 길이가 796m 1991년에 준공되었으며, 대신면 천서리 인근에는 당남리섬과 오토캠핑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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