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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옛길은 남한산성의 역사 테마길로, 남한산성의 세계유산적 가치를 체험할 수 있도록 주제별로 구성된 역사 탐방로이다. '하늘이 만든 성'으로 알려진 사적 남한산성과 행궁을 비롯한 수많은 국가 유산이 있으며, 백제 시조 온조왕, 병자호란 등 역사적 의미를 많이 간직한 장소이다. 탐방객은 관심분야와 여건에 맞는 길을 선택하여 체험할 수 있다. 남한산성 옛길 노선안내도에는 동문노선 9.5km, 북문노선 5.8km, 서문노선 2.1km, 남문노선 6.5km로 총 23.9km의 거리를 안내지도에 표시하고 있다. 걷기코스로 남한산성 옛길은 5개의 주제별로 제1코스는 '장수의 길'이며 산성로터리-북문(0.4km)-서문(1.1km)-수어장대(0.6km)-영춘정(0.3km)-남문(0.7km)-산성로터리(0.7km)의 3.8km로 약 1시간20분 소요된다.
남한산성 역사 테마길 2코스는 '국왕의 길'로 산성로터리-영월전(0.4km)-숭렬전(0.2km)-서문(0.7km)-수어장대(0.6km)-산성로터리(0.9km)까지 2.8km로 약 1시간 정도, 3코스는 '승병의 길'로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현절사(0.1km)-벌봉(1.8km)-장경사(1.5km)-망월사(1.1km)-동문(1.0km)-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까지 5.7km로 약 2시간 소요, 4코스는 '옹성의 길'로 산성로터리-남문(0.7km)-남장대터(0.6km)-동문(1.1km)-지수당(0.5km)-개원사(0.3km)-산성로터리(0.6km)의 3.8km이며 약1시간 20분 소요, 5코스는 '산성의 길'로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동문(0.4km)-동장대터-북문(0.4km)-서문(0.4km)-수어장대(0.4km)-영춘정(0.4km)-남문(0.4km)-동문(0.4km)-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의 7.7Km로 약 3시간 20분이 소요된다.
남한산성(南漢山城)은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에 있는 남한산을 중심으로 하는 산성으로 경기도의 도립공원이다. 남한산성은 성곽과 함께 각종 시설이 잘 보존되고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이 아주 잘 정비된 곳으로 손꼽히며, 험한 지형을 활용하여 성곽과 방어시설을 구축함으로써 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축성술의 시대별 발달단계를 잘 나타내는 좋은 성벽자료로 인정받아서 2014년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016년 11월 9일 남한산성의 문화재 관리기관이 종전의 (재)경기문화재단에서 경기도지사로 변경되었다.
남한산성 옛길은 또한 벚꽃길로 유명한 곳이라서 수도권에서 아름다운 벚꽃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수도권의 숨은 명소이다. 가로수인 벚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이곳을 '남한산성 벚꽃길'이라고 부른다. 남한산성과 팔당호에는 지금 한창으로 만개한 벚꽃을 만날 수 있다. "광주시 벚꽃 길은 드라이브 코스로 일품"이라며 " 광주시는 남한산성 도립공원을 관통하는 지방도로변 8㎞와 팔당호를 따라 퇴촌면과 남종면에서 양평으로 이어지는 337번 지방도로에 벚꽃길을 1997년부터 공을 들였다"고 소개한다.
로터리 주차장이 공사중이라서 광주방면으로 조금 더 내려가 무료무차장에 차를 세우고 천천히 걸어 올라오다 보니 '흔남 중의 흔남'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보통사람들의 롤모델인 흔남 중의 훈남이 바로 서흔남이란다. 서흔남은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이 포위되자 연락병으로 자원하여 각종 신분으로 위장해서 외부를 드나들며, 지방에서 올라오는 장계등의 연락책을 담당하였고 청군의 진영을 염탐하며 급박한 경우에는 적병을 암살하기도 했단다. 당시 수어청을 비롯한 조선의 5군영은 상비군과 인력을 모집하였는데 모집대상에는 귀천(貴賤)을 가리지 않았으며, 공을 세우는 경우 면천의 특혜가 주어졌단다. 서흔남은 병자호란에서의 활약 덕분에 실제로 면천이 되었으며, 벼슬을 받아 무려 당상관까지 오르게 되었단다. 서흔남의 이런 행보는 백성들의 귀감이 되었고, 남한산성에는 서흔남을 기리는 묘비가 남아 있으며, 광주시는 이를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고 한다.
산성 로터리의 입구에서 바로 만나게 되는 역사유적으로, 남한산성면 산성리의 남한산성 주변에 있는 조선의 행궁(行宮)인 남한산성 행궁이다. 이곳은 '광주행궁(廣州行宮)'으로도 불렸다. 사적 제480호로 지정받았으며, 인조2년(1624년)에 조선 16대 임금인 인조의 명으로 착공하여 2년 후인 1626년(인조 4년)에 완공했다. 완공이후 잘 보존되던 행궁을 일제가 이유없이 행궁과 관아에 방화하여 행궁이 모두 불에 타 소실되어서 행궁지로만 남아있다가, 문화재청에서 2011년 행궁구역의 대부분을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한남루는 행궁의 정문이며, 이곳은 입장료를 징수하므로 반드시 입장권을 구매하여야만 이 문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 문은 1층 문과 2층 누각으로 되어있으며, 1798년 광주유수 홍억이 건립하였다. 외면의 기둥에 써놓은 주련(柱聯)이 보인다. "守一城講龍虎韜(수일성강용호도) : 한 성을 지킬 용호영에 병법을 강의하고, 鎭百里閱豼貅士(진백리열비휴사) : 백리를 진압할 군대의 군사를 열병한다. 良刺史宣上恩德(양자사선상은덕) : 덕(德)있는 자사는 임금 은덕을 베풀고, 大將軍御下威信(대장군어하위신) : 대장군은 위신(威信)으로 부하를 다스린다."는 기둥이나 벽에 세로로 써서 붙이는 문구(주련)의 내용이다.
남한산성 행궁이 역사적으로 가장 주목받던 시기는 병자호란 때 원래 강화도로 피난을 시도하려던 인조가 강화도 피난이 좌절되면서 결국 남한산성으로 옮겨 1636년 12월 14일부터 1637년 1월 30일까지 이곳을 임시 궁궐로 사용했던 것이다. 인조는 먼저 봉림대군과 인평대군 등의 왕자를 먼저 강화도로 피신하게 하고 조정 또한 강화도로 피난하려 했으나, 청군의 선발대가 이미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가로막으면서 강화도를 포기하고 남한산성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남한산성 안에는 13,000 여명의 군사가 방어를 하고 있었고, 양곡 14,300여 석과 소금 90여 석이 있어 겨우 50일 분의 식량이 비축되어 있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지리적으로 세종대왕의 영릉(英陵)과 17대 효종의 영릉(寧陵)이 있는 여주시와 근접하여서 제19대 숙종, 21대 영조, 22대 정조 등이 영녕릉 참배를 위해 이곳 행궁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에 20개소 정도의 행궁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이 광주행궁만이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을 두었다(左廟右社). 이곳이 비상시에 예비 수도로서의 기능을 했기에 필요한 모든 시설을 갖추어 놓았다. 원래 건물은 상궐 72.5칸, 하궐 154칸으로 모두 226.5 칸의 규모였지만,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헐어버려 행궁터만 남아있었다. 2002년부터 내행전을 비롯하여 일부 부속건물들을 복원하기 시작하여 2012년 5월 252.5칸의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행궁에서 남한산으로 오르는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 난 이길은 제2코스 국왕의 길로 산성로터리 -> 영월전(0.4km) -> 숭렬전(0.2km) -> 서문(0.7km) -> 수어장대(0.6km) ->산성로터리(0.9km)까지 약 2.8km이다. 남한산성 내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남한산의 수목에 대한 벌목을 금지하는 법령이 만들어졌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전쟁과 민간의 난방연료 수요로 인해 남한산의 식생은 비교적 황폐하였다. 이에 따라 산사태가 빈번해지자 조선의 철종 연간에 산성마을의 유지가 사재를 출연해 10,000여 그루가 넘는 소나무를 식재했으며, 고종 때에도 성내 산사태 피해지와 인근 민둥산에 1만 5천주의 소나무를 심었다.
남한산성의 전반적인 지형은 청량산(497m)과 남한산(480m)을 중심으로 급경사로 된 화강편마암의 융기 준평원으로서, 주봉인 청량산(482.6m)을 중심으로 북쪽의 연주봉(467.6m), 동쪽으로 남한산의 주봉인 벌봉(522m)과 망월봉(502m), 남쪽으로 한봉(414m)을 비롯한 몇 개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은 성이다. 남한산 주변은 서고동저(西高東低) 기복을 형성하며, 서쪽은 대체로 경사가 급하고 험하지만, 내부의 평지를 지나 동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대체로 완만한 편이다. 산정을 중심으로 서쪽 낮은지대에는 한강의 지류인 탄천, 동쪽에는 또다른 지류인 광안천이 북으로 흘러 본류와 합류한다. 결코 완만하지 않은 산 자체의 경사가 성벽과 결합하여 단단한 자연 방어선을 이루는 관계로 공격자의 입장에서 굉장히 공략하기 어려운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이곳에서 40일간 항전하였으나 결국 성문을 열고 청에게 항복한 치욕적인 역사로 유명하다. 원성은 높이가 약 3~7m 내외로 다른 성곽에 비해 전체적으로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이것은 이 산성이 조선 시대부터 국가의 총력을 기울여서 여러 차례 수축이 되어왔고, 1971년 산성 전역이 도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성벽에 대한 보수작업이 지속되어 왔기 때문이다. 성벽은 지반 위에 잘 다듬은 장대석을 쌓고 막힌줄눈 바른층쌍기를 하였다. 성돌은 지대석의 크기가 50 cm × 30 cm 정도이고, 그 위로 두께 20 cm 내외에 폭 30~50 cm 정도 크기의 면석을 정다듬하여 쌓았다
인조 5년(1627년)에 발발한 정묘호란 이후 후금이 조선에 대해 무리한 요구와 이에 대한 조선의 대항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후금은 조선의 왕자를 보내고 사죄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이를 거절하였고 이에 따라 청태종 황태극이 12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였다. 침공 직전 청으로 국호를 개칭한 황태극은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넌 후 한양을 향해 진군하였다. 청군은 큰 저항을 받지 않은 채 남한산성에 당도해 산성 밑의 탄천 부근에 포진하였다. 이에 전국의 구원병들이 출병하였지만, 모두 남한산성에 당도하기 전에 궤멸되었다. 성안의 조정에서는 강화론이 제기 되었다. 주화파와 주전파 사이에 여러차례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지만, 이듬해 1월 22일 강화도가 청군에 함락당하고 강화도에 피신해 있던 왕자와 군신들의 처자 200여 명이 청군의 포로로 잡히면서 대세는 강화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남한산성의 주민들을 지키는 이희 장군이 쌓은 성곽의 모습이다. 주민들이 신으로 받들어 보실만큼 장군은 남한산성의 역사에서 특별한 인물이다. 이희 장군은 성의 남쪽 성벽을 쌓는 도중에 공사비를 빼돌렸다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남한산성 서장대 앞에서 참형을 당했다. 나중에 조정에서 관원을 파견하여 조사한 결과, 이희 장군이 쌓은 남쪽 성벽은 미완성이나 견고하게 축성된 것으로 밝혀 졌단다. 열심히 산성을 쌓았으나 억울한 누명을 쓰고 결국 처형을 당한 이희 장군의 전설은, 성을 쌓은 백성들의 삶에 큰 공감을 불러 일으키며 신성한 인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에 수많은 백성들의 공감을 얻어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고, 사당인 청량당을 만들어 이희 장군을 모시고 있다.
수어장대는 수어청의 장수(將帥)가 군사를 지휘하던 군사시설이다. 서장대라고도 불렸으며, 남한산성의 서쪽 주봉인 청량산 정상에 자리하여 성의 안쪽과 바깥쪽을 굽어볼 수 있는 관측소의 역할을 하였다. 수어장대는 1624년(인조2년) 남한산성을 개축할 때 함께 건립되었다. 당시 조선의 상황은 후금의 군사적 압박, 이괄의 난 등으로 국내외적으로 불안한 상태였다. 이에 조정은 왕실의 보전과 한성의 수비를 위한 보장처(保障處: 전쟁 시 임금과 조정이 대피하는 장소)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고, 한성과 가깝고 방어요새로 적합한 남한선성을 왕실의 보장처로 삼았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면서 남한산성의 5개 장대 모두 붕괴되어 터만 남게 되었고, 이후 1751년(영조27년) 유수 이기진이 왕명으로 이층누각으로 증축하고 안쪽에는 '무망루(無忘樓)', 바깥쪽에는 '수어장대(守禦將臺)' 라는 편액을 내걸었다. 이후 1896년(고종1)에 광주유수 박기수에 의해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이곳 성루에 서서 한양땅을 바라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당시 남한산성에서 청군은 화포를 쏘아대어 성벽의 일부를 무너뜨리는 등 압박을 가하였고, 조선의 사신이 협상을 위해 청 진영에 도착했을 때 청군은 강화에서 포로가 된 왕자를 대면시켰다. 이에 조선은 더 이상 버틸 힘을 상실하고, 1월 30일 인조가 45일 만에 식량 부족으로 성문을 열고 나가 삼전도에서 항복의 예를 갖게 되었다. 이 곳에서 인조는 소복을 입고 청나라 황제 황태극은 높은 단상에 앉아서 '삼궤구고두의 예' 를 받았다.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 또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는 신하나라가 큰 나라를 만났을 때 머리를 조아려 절하는 예법이다. 삼궤구고두는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여진족의 의식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중앙군이 5군영 체제로 정비되면서 수어청이 남한산성을 담당하며 수도외곽의 수비를 전담했다. 남한산성의 방어는 수어청에 소속된 5개 영이 일정 구간을 전담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산성의 수비에는 승군 또한 참여하였다. 승군은 남한산성 내에 있던 9개의 사찰에서 주재했다. 사찰에는 무기와 탄약을 보관하는 병기고와 화약고가 설치되었으며, 배속된 승려가 관리를 맡았다.산성의 수축이 완료된 이후 산성에 주둔하는 수어청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재원의 확보가 중요하게 되었다. 일찍부터 하삼도에서 올라오는 조세의 일부를 비축하고 둔전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지속되었다. 한강수로를 타고 올라온 조세미는 창모루와 둔지나루터에 하역된 후 마차나 등짐으로 사창리를 통해 산성 안으로 운반되어 비축했다. 또한 산성내의 토지의 전세와 대동미는 서울로 올려 보내지 않고 산성 안에 비축하였다.
남한산성 서문(南漢山城右翼門)은 남한산성을 처음 쌓았을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정조 3년(1799)에 개축하여 우익문(右翼門)이라 부른다.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세자와 함께 청나라 진영으로 들어가 항복할 때 이 문을 통과했다고 한다. 서쪽 경사면이 가파르기 때문에 물자를 이송하기는 힘들지만 서울 광나루와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성문은 반원형 홍예문이며 높이 2.5m·폭 2.1m로 작고 좁다. 문 안쪽에는 2짝의 목재 판문이 있다. 정면 3칸·측면 1칸의 문루는 겹처마의 팔작지붕 양식이다.
이곳을 우람하게 지키고 서 있는 적송들이 우리의 아픈 역사를 나타내려 하는듯 서울을 향하여 소나무 가지들이 모두 한쪽으로만 우산처럼 펼쳐진 모습이 신비롭다고 느껴진다. 조상들이 어떻게 지켜온 나라인지를 깊이 깨달아 알고, 우리 후손들에게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꾸짖는 듯한 모습으로 보여진다. 이곳 남한산성의 식생은 주로 활엽수로 구성되어 있으며, 조림군락이 분포한다. 남한산성에는 신갈나무와 갈참나무, 서어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밤나무, 잣나무, 아까시나무 등이 조림군락을 이루고 있다. 2007년에 실시된 남한산성 북사면의 산림식생에 관한 연구에서는 남한산성 북사면에 총 137종, 평균 약 22종의 식생이 분포한다고 보고했다고 한다.
서울에서 남동쪽으로 25km 떨어진 산지에 축성된 남한산성(南漢山城)은 조선시대(1392~1910)에 유사시를 대비하여 임시 수도로서 역할을 담당하도록 건설된 산성이다. 남한산성의 초기 유적에는 7세기의 것들도 있지만 이후 수차례 축성되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17세기 초, 중국 만주족이 건설한 청(淸)나라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여러 차례 개축되었다. 남한산성은 승군(僧軍)이 동원되어 축성되었으며 이들이 산성을 지켰다. 남한산성은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전해온 성제(城制)의 영향과 서구의 화기(火器) 도입에 따라 변화된 축성 기술의 양상을 반영하면서 당시의 방어적 군사 공학 개념의 총체를 구현한 성채이다. 오랜 세월 동안 지방의 도성이었으면서 아직도 대를 이어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도시인 남한산성의 성곽 안쪽에는 당시에 만들어진 다양한 형태의 군사·민간·종교 시설 건축물의 증거가 남아 있다. 남한산성은 한민족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남한산성 북문(南漢山城全勝門)이다. 한산성 북쪽 해발 365m 지점에 있는 북문으로, 이 문을 통해 세곡을 운반하였다. 인조 2년(1624)에 신축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정조 3년(1779)에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한 후 전승문(全勝門)이라 이름 붙였다. 현재 편액은 걸려 있지 않다. 성문은 홍예기석 위에 10개의 홍예석을 쌓아 만든 홍예문으로 높이 3.65m·폭 3.25m이다. 성벽의 두께는 7.1m에 이른다. 단층의 문루는 정면 4칸·측면 2칸 규모이며 겹처마를 두른 팔작지붕을 올렸고, 주심포 양식의 민흘림 기둥을 세웠다.
남한산성의 산성리는 한양 다음으로 큰 소비도시였다. 조선시대 한양은 20만명이 넘는 인구를 가진 도시였다. 18세기 후반 산업혁명 시기 영국 런던의 인구가 5만명 이었다는 사실과 비교해보면 한양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남한산성 옛길이 위치한 산성리 지역은 한양에 인접한 소비도시였는데, 토박이 주민의 제보에 따르면 산성 내 주민들이 주변 마을 사람들을 촌놈 취급했다는 일화가 남아있을 정도이다. 1627년 광주부의 읍치(행정중심지)를 산성 내부로 옮기면서 산성리의 인구는 폭증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1895년 갑오경장 이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광주유수가 폐지되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기능을 상실하면서 인구가 줄어들게 되었다. 이후 한강 이남에서 가장 번성했던 지역 중 하나였던 남한산성은 한적한 마을로 변화하여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 길에 있는 벚꽃길로 광주시가 1997년부터 산벚나무를 심어 조성한 길이다. 남한산성 동문부터 남한산성 입구까지 하천을 끼고 약 8Km 가량 이어져 있으며 팔당호 주변 10Km의 팔당호 벚꽃길까지 이어진 드라이브 코스는 경기도 Top 5에 들 정도이다. 4월 중순 경부터 약 1주일가량 절정을 이루며 하천 모습과 벚꽃 가로수가 조화롭게 펼쳐져 봄이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이제는 꽃잎들이 봄바람에 흩날리우며 우리네 인생도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임을 생각하게 만들어 준다.
과거 한양을 지키던 4대 요새 중 하나인 남한산성을 품고 있는 남한산성도립공원이 있다. 4대요새는 북쪽의 개성, 남쪽의 수원, 서쪽의 강화, 동쪽의 광주였다. 동쪽의 광주에는 이곳 남한산성이 있었다.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24km, 성남시에서 북동쪽으로 6km 정도 떨어져 있는 남한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길이는 총 12.4km(본성 8.9km, 외성 3.2km, 신남산성 0.2km), 높이는 7.3m이다. 원래 2천여년 전,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백제의 시조 온조의 왕성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한산주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기록도 있다. 그 옛터를 활용하여 후대에도 여러번 고쳐 쌓다가, 조선조 광해군 때(1621) 본격적으로 축성하였다 한다. 석축으로 쌓은 남한산성의 둘레는 약 12k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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