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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법천사지(原州)

영대디강 2025. 1. 1. 17:01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산70-1 법천사지(法泉寺址)는 명봉산(鳴鳳山) 기슭에 위치한 통일신라 시기에 창건된 법천사의 절터이다. 신라말 고려 초기 대표적인 법상종(法相宗) 사찰로 법천사가 융성할 당시에는 마을 전체가 사찰일 정도로 사세(寺勢)가 컸고, 그래서 마을 이름도 법천리다.

이 사찰은 고려시대에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다가 임진왜란 때 불탄 이후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커다란 느티나무 고목이 보이면 그 일대가 모두 절터다. 아직까지 발굴조사가 진행 중이라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지 못했지만,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가 서 있는 낮은 산자락 주변은 석축부터 깔끔하게 복원되었다.

오늘은 원주굽이길 10코스 법천사지길 17.5km를 새해 첫날걷기 목표로 삼아 이곳으로 찾아왔다. 이곳은 폐사지이다. 폐사지(寺地) 란 ‘사찰이 허물어져 흩어진 터’를 말한다. 한마디로 망해버린 옛 사찰이라는 뜻이다. 흥법사지와 거돈사지, 그리고 법천사지가 그렇다. 세곳은 모두 신라 말기에 창건해 번영을 누리다가 임진왜란 등을 거치며 사라진 옛 사찰터다. 엄청난 세월을 느끼게 해주는 커다란 고목나무안에 몸통을 넣고 인증사진을 남긴다. 천년고찰 법천사의 역사를 대변해 주는 듯한 외관에서 세월의 두께를 느끼게 한다. 고목나무와 더불어 옆에 서 있는 특이한 모양의 돌기둥으로 인해 토속적인 분위기가 감돈다.

사찰의 본존인듯 기단석만 즐비하게 줄지어 앉아있는 이곳 법천리 서원의 법천사지는 1965년에 발굴 정리되었다. 당시의 유물은 불상광배, 불두, 연화문대석, 용두, 석탑재 등의 석조물이다. 본존 왼쪽에 지광국사 현묘탑비가 현재도 서 있는데, 이곳을 법천골이라고 옛부터 일러오고 있다. 신라 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법천사가 있었으므로 이곳 지명을 법천골이라 하였다가 법천리라는 지명이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곳은 고려 문종때 국사(國師)이며 법상종의 고승인 지광국사 해린(984년 ~ 1070년)의 탑비로 1962년 12월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59호로 지정되었다고려 문종 24(1070년) 지광국사가 법천사에서 입적하자 그 공적(公的)을 추모하기 위해 선종2년(1085년)에 사리탑인 지광국사현묘탑과 함께 이 비를 세워놓았다. 

현묘탑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법천사지유적전시관으로 옮겨졌고 탑비(塔碑)만이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 비문에는 지광국사가 불교에 입문해서 목숨을 다할 때까지의 행장(行狀)과 공적을 추모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정유산(鄭惟産)이 짓고, 글씨는 안민후(安民厚)가 중국의 구양순체를 기본으로 삼아 부드러운 필체로 썼다.

나라를 대표했던 고승의 업적을 담은 비석인 만큼 돌을 한땀 한땀 따내려간 석공들의 지극한 정성이 곳곳에 배어 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돌을 세우고 왕관 모양의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거북은 목을 곧게 세우고 입을 벌린 채 앞을 바라보고 있어 용맹무쌍한데, 얼굴은 거북이라기보다 용의 얼굴에 가까운 형상으로, 턱 밑에는 길다란 수염이 달려 있고 부릅뜬 눈은 험상궂다.

독특한 무늬가 돋보이는 등껍질은 여러 개의 사각형으로 면을 나눈 후 그 안에 왕()자를 새겨 장식하였다. 비몸돌에서 눈에 띄는 것은 양 옆면에 새겨진 화려한 조각인데, 구름과 어우러져 여의주를 희롱하는 두 마리의 용이 정교하고도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머릿돌은 네 귀가 바짝 들린 채로 귀꽃을 달고 있는데, 그 중심에 3단으로 이루어진 연꽃무늬 조각을 얹어 놓아 꾸밈을 더하고 있다

그러나 비석의 뒷면으로 발길을 옮겨 보니까, 625전쟁 와중에 유탄 폭격을 받아서 12,000개가 넘는 조각으로 나눠지고야 말았다고 한다. 이후에 복구 논의가 있었지만, 묵살이 된 채 그냥 방치가 되었다가, 1954년 베트남 대통령이던 응오딘지엠이 방한하면서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경복궁과 경회루를 둘러보던 중 부서졌던 이 탑을 봤고, 이에 노발대발한 이승만 대통령의 노기를 풀고자 부랴부랴 복원에 나섰던 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보았던 이 승탑의 모습이라고 한다.

또 하나의 폐사지인 거돈사지(居頓寺址)를 찾아가려고 이정표를 따라 걸었다. 부론면 현계산 기슭의 작은 골짜기를 끼고 펼쳐진 곳에 있는 절터로,1968 12 19일 대한민국 사적 168호로 지정되었다이 절터는 현재 남아있는 3층석탑(보물 제750)으로 신라시대에 처음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1탑식 가람 배치를 하고 있는 이 절터에는 높은 축대 위에 중문을 세운 자리가 있으며, 그 뒤로 3층석탑과 금당터, 강당터가 남아 있다. 금당은 절의 중심건물로, 규모가 전면 6, 측면 5칸으로 되어 있다. 이 안에는 2m 정도 높이의 화강암으로 만든, 부처님을 모시던 불대좌가 있다. 금당의 오른쪽과 뒤로는 석축을 쌓고 건물을 지었던 흔적이 있으며, 우물터도 발견할 수 있다.

법천사지에서 자작고개를 넘어 부론면 정산리의 4.3Km를 걸으면 또 다른 절터, 거돈사지(사적 제168)를 만난다는 기대를 갖고 오솔길을 걷는다. 황학산과 현계산 사이의 낮은 산자락 아래 넓은 터에 제법 절터다운 모습을 하고 있다.

길의 끝자락에서 만나는 거돈사지는 커다란 막돌을 쌓아 만든 긴 석축 위로 기나긴 세월 동안 한자리를 지켜온 느티나무가 가장 먼저 반긴다. 계단을 오르면 넓은 절터에 삼층석탑(보물 제750), 금당 터와 석불대좌가 있고, 동쪽 언덕에 원공국사탑, 길의 끝자락에는 원공국사탑비(보물 제78)가 있다.

이정표가 없어서 이리저리 오락가락 걷다가 법천사지로 돌아오니, 우등이 부러진 나뭇가지의 향나무를 만나게 된다. 향나무는 측백나무에 속하는 나무이다측백나무과 향나무속 나무들 중 향나무, 가이즈카향나무, 눈향나무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들이다향나무속 나무들이 생각보다 많다. 늘푸른 바늘잎나무로 키는 15~25m에 이르고 온 몸에서 향이 나는 나무로, 오래 산다. 나무껍질은 회갈색 또는 흑갈색, 적갈색으로 오래 되면 세로로 얕게 갈라진다. 어린 나무는 원추형으로 자라며 줄기가 곧지만 나이가 들면서 주변의 조건에 맞게 비틀어지고 구부러진다.

휴무일인 법천사지유적전시관에 전시된 이 탑은 고려시대의 승려 지광국사 해린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원래 법천사터에 있던 것인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오사카로 몰래 빼돌려졌다가 반환되었으며, 경복궁 경내에 있다가 보존처리를 위하여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옮겨졌으며, 기단 네 귀퉁이에 있던 사자상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해오다 탑과 함께 옮겨졌다.

일반적으로 통일신라 이후의 탑이 8각을 기본형인데, 이 탑은 전체적으로 4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는 새로운 양식을 보여준다. 바닥돌은 네 귀퉁이마다 용의 발톱같은 조각을 두어 땅에 밀착된 듯한 안정감이 느껴지며, 7단이나 되는 기단의 맨윗돌은 장막을 드리운 것처럼 돌을 깎아 엄숙함을 느끼게 한다. 탑신에는 앞뒤로 문짝을 본떠 새겼는데, 사리를 모시는 곳임을 표시하기 위함이다. 지붕돌은 네 모서리가 치켜올려져 있으며, 밑면에는 불상과 보살, 봉황 등을 조각해 놓았다. 머리장식 역시 여러 가지 모양을 층층이 쌓아올렸는데, 비교적 잘 남아있다.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사지길 50-15의 법천사지 유적전시관의 1층 전시실에는 법천사지실을 비롯하여 열린 수장고와 기획전시실이 조성되어 있다. 1층 기획전시실에서는 법천사지와 거돈사지, 흥법사지 등과 관련된 남한강의 주요 폐사지 유적 특별전이 개최될 것이란다2층 전시실에는 넓은 공간에 법천사지 석조공양보살상만이 전시되어 있다석조공양보살상은 2003년에 처음으로 다리 부분이 출토되고, 2010 10차 발굴조사에서 몸통이 확인될 정도로 훼손이 심한 상태였단다탑전 석조공양보살상은 법천사지 외에는 개태사와 신복사지, 월정사 등 4군데 밖에는 남아있지 않아서 귀하단다.

넓다란 법천사지(法泉寺址)는 지금도 대부분 개인소유지이므로 일괄적으로 유적지 정리가 어렵다는 이곳에 눈에 뜨이는 당간지주(幢竿支柱)가 보인다. 당간지주는  법천리 74-2번지 법천사지 경내에 있다. 1984년 6 2일에 문화재자료 제20호로 지정되었으며, 높이 3.9m로 고려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법천사지에서 1.8Km 거리인 법천소공원으로 왔다. 이곳은 남한강과 연결된 법천을 끼고 가람이 조성되어 있어 거돈사지와 섬강을 끼고 조성된 흥법사지(興法寺址) 그리고 여주의 고달사지(高達寺址)와 함께 한강변 수상교통과 관계 깊은 사찰로 추정된다. 주변에 법천사 도요지가 있는 점등으로 미루어 보면 사역(寺域)이 상당했고 사원촌(寺院村)이 조성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동편 명봉산자락에 조성된 가람으로 서향을 하고 있는 당간지주와 지광국사 현묘탑비의 이격거리가 상당한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 최대규모인 경기도 양주군 회암사지(檜巖寺址)에 버금가는 규모의 사지였다고 추정된다. 

남한강대교를 건너니 이곳은 충청북도 충주시란다. 태극기를 바라보며 오늘은 을사년의 첫날이라서 우리의 아픈 역사인 을사조약(乙巳條約) 또는 을사늑약(乙巳勒約)을 떠 올리게 한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제국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일본군을 동원하여 강제로 체결한 조약이다. 대한제국의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제국의 주한 공사 하야시 곤스케에 의해 체결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은 1905년 7월 가스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일본 제국의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받았으며, 8월에는 영국으로부터도 한국에 대한 지도 감리 및 보호의 권리를 인정받은 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이 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60년이 지나고 을사년인 1965 6 22일에 박정희 정부 일본정부는 한일 국교를 정상화하는 한일기본조약의 제2조를 통해 이 조약이 이미 무효임을 상호 확인하였다. 4개 협정과 25개 문서로 일본에서 사용하는 명칭은 일본국과 대한민국과의 사이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日本と大韓民との間の基本係にする (にほんこくとだいかんみんこくとのあいだのきほんかんけいにかんするじょうやく)이다. 대한민국과 일본은 1951 이후 5차례에 걸쳐 회담을 가졌지만 상호 의견이 엇갈려 제대로 되지 않았다. 우선 일본은 개인 배상을 제안했지만 정부는 이것을 거부했다. 반대로 정부는 국가에 대한 배상을 일본에 요구하고 논의가 진행되었다. 결국 1965 박정희 군부 정권은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으며, 그 대가로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지급받기도 하였다. 또 60년이 지나간 올해 을사년이 다시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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