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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천진암로 1203에 소재한 천진암 성지로 오르내리는 도로가 천진암로(天眞菴路)다. 천진암(天眞菴)은 조선시대 이곳에 있던 암자에 피신해 온 초기 천주교인들을 스님들이 피신시켜 주고 보호해 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많은 스님이 희생되었다. 바로 이런 역사가 있는 천진암에서 한국 천주교 역사가 시작되었다. 지금은 암자터만 남아 있고 이 일대는 천주교에서 성당을 세우는 등 성역으로 개발중이다. 이곳에는 천주교를 창립하는 데 공헌한 다섯 사람의 무덤이 있다.
“장차 너희는 모든 어려움을 딛고 일어나게 되고, 빛을 발하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너희에게 임하며,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할 것이라. 모든 열방이 너희들 앞에 나아올 것이다” 라는 놀라운 축복을 그들에게 약속해 주신 천주교의 성지이다.
천진암(天眞菴)은, 고조선(古朝鮮) 시대 제정일치(祭政一致)의 관습으로, 본래 단군영정(檀君影幀)인 천진(天眞)을 모시고 산제사, 당산제, 산신제 등을 올리던 천진각 혹은 천진당이라는 작은 초가 당집이 오랜 세월 있었던 자리로 추정한다. 일부 선사시대 석조 흔적으로 추정하는 현상을 볼 때, 삼국시대(三國時代) 그 이전부터 소박한 토속신앙(土俗信仰) 의 현장으로 여기며, 훗날 천진암이 되어, 1779년을 전후하여 폐찰이 되었었으니, 정약용 선생 글에, "천진암은 다 허물어져 옛 모습이 하나도 없다, 요사체는 반이나 무너져 빈 터가 되었네(寺破無舊觀,樓前僚舍半虛舊)"하였고, 1797년 당시 홍경모의 남한지에서는, "천진암은 오래된 헌 절인데, 종이를 만드는 곳으로 쓰이다가 이제는 사옹원에서 관리하고 있다(天眞菴爲古寺造紙物今屬司饔院)" 고 함으로써, 사찰로서의 기능을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성 다블뤼 주교는 1850년 경 기록한 글에서, 이벽 성조께서 젊은 선비들과 함께 수도(修道)와 강학(講學)을 하던 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거처(폐가옥)이었다(l'edifice isole et perdu)고 하였다.
폐허가 된 천진암에서는 여럿이 모여 함께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pour s'y livrer ensemble a des études profondes), 천주교 진리를 탐구하고 실천할 수 있었으니, 천진암은 바로 한민족의 유교 선비들이 불교 암자에서 천주교를 연구하고 실천하기 시작한, 유·불·천이 사람과 장소와 사상을 합류한 곳이고, 조선천주교회가 태동된 한국천주교 발상지이다. 한국천주교회 창립자이신 광암 이벽 성조께서 천진암을 근거지로 활동하신 기록이 있으며, 이로 인하여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인 천진암 성지가 되었다.
1779년 이벽 성조 25세, 정약용 17세, 정약전 21세, 이승훈 22세, 이총억 14세, 권철신 44세 등 주로 10대와 20대 젊은이들이 모여서 그 당시 아주 생소하고 이상한 천주교 책을 읽고 토론하는 내용을 일반 유교 서당에서나 정상적인 사찰에서, 또는 일반 가정에서는 실천하기 어려우므로, Daveluy 주교의 기록대로 정약용 선생의 글에 적잖이 보이고 있으니, "1779년에 천진암에서 강학을 할 때(己亥冬講學于天眞菴), 이벽이 밤중에 와서 여럿이 촛불들을 밝히고 경서를 담론하였으며(雪中李檗夜至張燭談經)", 그후 "정사년(1797) 단오날에 두 분 형님들(정약전)과 천진암에 와보니, 이벽의 독서처, 곧 이벽의 수학 도장 건물이 아직도 그저 있구나 !(端午日陪二兄游天眞庵 李檗讀書猶有處)" 하고 시를 읊어 밝히고 있다.
1827년 65세의 노인이 된 정약용 선생은 옛날의 동료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천진암을 찾아와 현장에서 지은 시에서, "이 곳 천진암에 오르는 바윗돌 사이사이로 난 실같은 오솔길은 내가 어린 아이 적에 오르내리며 놀던 길인데(昔我童時遊), 여기서 우리는 중용, 대학, 서전, 주역, 즉 상서를 다 외운 후 불에 태워 물에 타서 마시는 소련을 하였었지(尙書此燒鍊)! 더욱이 저명한 호걸들과 선비들이 모여 강학을 하고, 독서를 하던 곳이 바로 여기였지(豪士昔講讀)!" 하며, 옛 추억을 회고하였다.
마리아( Maria, Μαριάμ, מִרְיָם Miriam, مَريَمْ, مريم Maryām, 기원전 18년경 ~ 서기 41년 경)는 신약성경에서 예수를 낳은 어머니로 등장하는 갈릴래아의 나자렛 출신 유대인 여성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그의 아들 예수가 그리스도(메시야)이며, 강생한 성자라고 믿는다. 천주교에서는 ‘성모(聖母) 마리아’ 또는 ‘복되신 동정(童貞) 마리아’, ‘동정녀(童貞女) 마리아’라고 호칭한다. 천진암 성지에서 기도하시는 모습으로 여기에 계시는 마리아는 황금빛 왕관을 쓰신 모습이라 모태신앙인 내가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그런 마리아의 모습이라 나도 함께 두 손을 모으고 경건하게 기도하였다.
한국천주교회는 조선교구 설정 150년이 되던 1979년 ‘천진암 성지화’를 내걸고 2079년까지 100년 동안 천진암 성지 내에 한국 천주교 사상 최대 규모의 대성당을 짓기로 했다. 104만㎡가 넘는 땅에서 40년 넘게 진행되고 있는 천진암 성지 성역화 사업이 이곳에서 어떤 성당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인지 궁금하기도하고 웅장한 그 모습이 기대되기도 한다.
한국천주교회의 발상(發祥)과 관련되는 사적지로, 이곳에 있었던 천진암은 지금은 폐사(廢寺)되었다. 18세기 중엽 권철신(權哲身)을 중심으로 한 남인계 소장학자들은 경기도 광주와 여주 등지의 사찰에서 강학(講學)을 가졌는데, 그들이 강학한 장소 중의 하나가 바로 천진암이다. 강학의 내용은 주로 유교경전에 대한 연구를 위주로 하였으나 당시 전래된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도 검토되었다. 이들 중 천진암을 자주 방문하였던 인물로는 이벽(李檗)과 정약용(丁若鏞)이 대표적이다. 정약용의『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는 천진암과 관련된 시문이 여러 편 보인다. 그 때 벌써 퇴락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천진암은 그 뒤 폐허가 되었으나 1962년에 남상철(南相喆)에 의하여 절터가 확인되었고, 이후 1975년부터 변기영 묜시뇰의 주도로 천주교 성지로 개발되었다. 천진암의 성지 개발은 천주교사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1779년의 강학이 천진암에서 개최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즉 권철신이 주관한 1779년의 강학에 대해서는 천진암 개최설과 주어사 개최설이 있는데, 천진암설을 주장하는 입장에서 이곳을 성지로 개발했던 것이다. 1979∼1981년 사이에 이벽·정약종(丁若鍾)·권철신·권일신(權日身)·이승훈(李承薰) 등 한국천주교회 초기 인물들의 묘소가 이곳으로 이장되었고, 현재 신도들의 순례에 필요한 각종 시설들이 설치되어 있다.
1925년교황 비오 11세께서는 79위 조선순교자 시복식 강론 첫머리에서, 이벽의 업적과 이승훈의 활동을 거명하며 조선천주교회가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가기 전에 성직자없이 조선 평신도들이 세웠음을 격찬하셨다. 1968년 교황 바오로 6세께서도 한국순교자 24위 시복식 강론 첫 머리에서 같은 내용으로 한국천주교회의 기묘한 창립을 말씀하시며, 전 세계 교회사에 없는 기묘한 위업을 밝히시며 한국교회를 들어 높혀 말씀하셨다. 1984년 교황 요한바오로 2세께는 103위 시성을 계기로 하시는 강론에서 다음과 같은 보다 구체적인 강론으로 한국천주교회의 신비롭고 자랑스러운 한민족의 자발적인 교회창립활동을 강론 첫머리에서 강조하셨다.
이곳을 찾은 것은 광주둘레길이 천진암에서 시작하여 숲사이로 돌아드는 코스라는 약 시오리 내외의 여름에 걷기 좋은 길이라는 유혹에 솔깃해서 찾았는데, 오전 10시 이전에는 천진암성지주차장이 오픈하지 않아서 그냥 길가에 주차를 하고나서 무작정 길을 따라 걸었다. 인도가 없는 포장도로를 위험하게 걷다보니 중간 중간에 아름답게 꾸며 놓은 카페들이 많아서 사진도 찍으면서 여유로운 쉼표를 만들기도 했다.
도로를 따라 그냥 멍때리며 걷자니 이렇게 경비행기 날개를 닮은 조형물도 보이고, 약 6.5Km정도를 오르락 내리락 걸으면서 나름대로 심심치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계곡에서 야영하며 계곡물에 몸을 담근 젊은 가족들의 모습도 보이기에 너무 좋았다.
천진암로 1142에 마련된 웨딩포토존이란다. 아마도 신혼부부들이 이곳에서 웨딩촬영을 하는 곳인가 보다. 아기자기한 신혼부부의 주택같은 건물에 담벼락부터 온통 녹색 식물과 형형색색 꽃으로 장식된 모습이 사진에 담고 싶을 만큼 아름답다.
핑크빛이 아니라도 핑크의 감성이 저절로 우러날 듯 조화로운 곳이다. 유럽의 어느 고색창연한 역사의 이야기가 숨쉬는 곳에 신혼여행차 찾아온 커플들이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을만큼 멋진 사진으로 남길 수 있는 그런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퇴촌이라는 이곳 면의 이름은 태종 이방원의 공신인 조영무가 사직한 후에 말년을 이곳에서 보낸 곳이라 하여 그의 호인 퇴촌에서 따온 것이란다. 또한 이곳 동네이름인 우산리는 마을주변 산의 형세가 마치 소가 누워있는 와우형(瓦牛形) 형세라하여 우산리라고 부르게 되었다는데, 이름 그대로 역시 이곳은 지금도 은퇴후에 살기 좋은 전원지역이라는 생각이 든다.
산에서 흐르는 물이라서 그런지 투명하게 맑은 계곡물이 풍요롭게 흐른다. 천진암 계곡에는 이렇게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을만큼 넓은 교량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어서 야영객들에게 별로 불편함이 없을 것 같다. 걷는 길 내내 푸른 숲이 우거지고 길가에는 카페나 식당들이 줄서듯이 도열해 있어서 언제라도 목마르고 배고플 때면 찾아들 수 있어서 좋았다.
앵자봉(鶯子峰)의 앵(鶯)은 꽤꼬리 앵으로 꾀꼬리가 알을 품고 있는 산세라 하여 꾀꼬리봉으로 불리다가 한자로 표기할 때 앵자봉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옛날에는 각시봉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웃한 양자산을 신랑산으로 보고 두 산을 부부라고 보았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부부가 함께 오르면 부부금실이 좋아진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앵자봉은 능선에서 양자산과 관산으로 연결된다.
천진암에서 나오는 유일한 도로의 마지막 지점인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관음리 572-4에 위치한 대한민국 한식대가 예전 한정식당이다. 고품격 전통 인테리어와 맛 그리고 서비스를 제공하여 고객님들에게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고자 넓은 정원과 홀 룸을 갖추었으니, 전통한옥에서 잊지못할 추억을 만들어 보란다. 고객과 직원이 모두 행복한 곳, 겉모습도 멋진 예전한정식당이다.
한옥고가의 식당 뒷편에서 흐르는 폭포수가 시원스럽게 우릴 반긴다. 폭포옆 쉼터 공간 폭포쪽과 본관앞에 테이블 쉼터와 정원쪽에 벤치들도 마련되어 있으며, 흐르는 물소리 들으며 자연의 소리와 함께 밥을 먹으면서 힐링할 수 있단다. 예전한정식 입구에는 멋지고 웅장한 일주문이 있으며, 일주문 안에 널찍한 주차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예약손님이 아니라서 우린 넓은 홀 식탁에서 소나무들이 즐비한 한옥 정원을 내다보며 식사를 했는데, 음식의 종류에 못지않게 뷰도 정갈하고 맛 또한 일품이라서 기회가 된다면 가족과 함께 다시 찾고 싶어지는 곳이다. 퇴촌의 명품 토마토를 집집마다 풍성하게 실려 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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