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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안산시 성포동에 위치한 노적봉공원은 산의 모양이 노적(露積)가리를 깔아 놓은 것 같은 모습이라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수인로를 따라 도로변으로 넓고 긴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공원에서 노적봉으로 올라가는 산책로가 평탄한 매트길로 잘 조성되어 있으며, 정상인 노적봉에 오르면 서해안의 절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노적봉공원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서 이정을 체크할 수 있도록 주차장 옆 시작지점에 0.0Km로 표시된 이정표가 보인다. 이 산책로를 따라 노적봉 아랫길로 쭈욱 한바퀴를 돌아들면 약 2.4Km이다.
나드리길 이라는 표지판이 보이는 이곳은 수인로를 가로지르는 넓고 큰 교량이다. 반대편 주차장에서 노적봉으로 오를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데, 그 자태가 건축예술가의 예술작품처럼 이 교량을 건너지 않고도 그냥 그쪽을 바라보기만해도 어린시절에 자주 보아왔던 노적가리 형태로 정말 너무 멋지다.
매 주말마다 둘레길과 산책로를 걷는 취미로 각 지방에 조성된 아름다운 곳을 많이도 걸어 봤지만, 이곳의 산책로 걷는 길은 아름답고 편안하게 조성되어 있어서 남녀노소 누구라도 걸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는 생각이 든다. 양옆으로 단풍나무들이 가지런하게 심기워져 있고, 걷는길도 맨땅이 아닌 고무포장재로 푹신하게 조성되어 있으며, 오는길과 가는길을 색깔로 구분해 놓아서 무장애길같은 느낌이 든다.
산책로 주변에 빽빽하게 심기워진 소나무들이 숲을 이룬 모습도 역시 절경이다. 소나무들이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어도 하늘을 향하여 곧게 뻗어 오르는 모습이 우리네 한국인들의 젊고 곧은 정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 물씬 풍긴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먼저 노적봉 정상이라는 표지판을 따라 그 길로 올랐다. 이 산은 안산시 성포동에 위치한 가사미산(해발155m)이며 최고봉이 바로 노적봉이란다. 해발 143m이며, 안산시의 청룡으로 이 산의 지맥은 수리산에서 떨어진 낙맥으로 안산읍지의 청룡말미에 해당되는데 산의 모양이 노적가리를 쌓아 놓은 듯하다 하여 '노적봉'이라 불리었다는데, 내심 생각했던 정상 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어느 산이든 정상에 오르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돌로된 표지석이 없어서 뭔가 좀 허전하고 아쉬운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그냥 봉우리 정상의 바위에 주저앉듯 걸터 앉아 서해바다를 바라본다. 이곳에 오르면 서해안의 경관이 한눈에 들어오고, 철마다 바뀌는 해안과 바다의 모습, 특히 지는 해를 바라보는 낙조는 절경중의 절경이라는데 운무가 낀 날씨탓에 조금 아쉬울 따름이다.
노적봉 도당지(都當址)는 성포동 노적봉에서 1978년까지 마을제(都當祭)를 지냈던 곳이다. 해마다 음력 1월15일 무렵에 마을의 안정과 풍어를 기원하는 도당제를 지냈으며, 1978년 이후로는 그 맥이 끊겨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당집에는 입경업 장군을 모셨는데, 이는 그가 바다에서 싸우면서 양식이 떨어졌을 때 조기를 잡아서 양식으로 삼았다는 전설이 있어 풍어를 담당하는 신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란다. 노적봉의 도당제는 바다와 가까운 안산 지역의 해양 민속 신앙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지금은 '보호수 종합안내판'이 사람들의 출입을 막아선 채 외롭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노적봉 폭포는 국내 최대 규모의 인공 폭포로 너비 133m, 높이 23m로 밤이면 화려한 조명이 드리워 장관을 연출한다. 폭포 앞에 있는 음악 분수, 인공 암벽, 조각 작품, 물 놀이터[도섭지] 등도 색다른 즐거움을 안겨 준다. 공원 안에는 90종 8000그루의 장미가 식재된 장미원과 면적 2,200㎡에 달하는 철쭉원 등이 봄을 기다리고 있다. 각종 야외 운동 시설과 배드민턴장, 농구장도 갖추었다.
이곳 폭포는 4월~10월 10시~18시, 7월~8월 21시 가동하며, 홀수 시간에는 폭포가 흘러내리고 짝수 시간에는 분수가 가동하기 때문에, 지금은 폭포가 가동하지 않는 2월이라서 폭포 아랫길로 조성된 길을 걷다보니 포근한 자태의 한그루 소나무를 만나게 된다. 이 소나무는 수령 약170년으로 국제로타리클럽에서 창립100주년을 기념하여 안산시에 헌수하였다고 적혀 있다.
폭포의 윗쪽으로 난 길을 걷다보니 멀리로 수리산이 보인다. 안산 지역의 산지는 수리산(475m)의 수암봉(395m)이 300m 이상에 해당하며, 그 외의 산지는 300m 이하로 구릉지 또는 저산성 산지이다. 안산시는 광주산맥의 말단부에 해당하여 그 연속성이 약하게 존재한다. 전형적인 노년기 지형으로 해안가에 분포하는 구릉지는 대부분 낮은 산지이며, 대부분 근린공원이나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안산 지역의 대표적인 산지는 약 10개 정도며, 수리산[475m]·마산[246m]·칠보산[239m]·광덕산[209m]·나봉산[135m]·황금산[167.7m]·큰산[106m]과 봉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수암봉[395m]·노적봉(143m)이 있다.
산책로를 걷다보면 만나게 되는 '김홍도 길'이다. 이곳 출신인 김홍도(金弘道, 1745년~ 1806년)는 조선후기 당대의 감식가이며 문인화가인 강세황(姜世晃)의 천거로 도화서화원(圖畫署畫員)이 되었다. 강세황의 지도 아래 화격(畫格)을 높이는 동시에, 29세인 1773년에는 영조의 어진(御眞)과 왕세자(뒤의 정조)의 초상을 그렸다. 그리고 이듬해 감목관(監牧官)의 직책을 받아 사포서(司圃署)에서 근무하였다. 1781년(정조 5년)에는 정조의 어진 익선관본(翼善冠本)을 그릴 때 한종유(韓宗裕)·신한평(申漢枰) 등과 함께 동참화사(同參畫師)로 활약하였으며, 찰방(察訪)을 제수받았다.
산책로 옆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충장로 422 (성포동)에 위치한 김홍도미술관이다. 정조는 “회사(繪事)에 속하는 일이면 모두 홍도에게 주장하게 했다.”고 할 만큼 그를 총애했다. 그리고 강세황으로부터는 ‘근대 명수(近代名手)’ 또는 ‘우리나라 금세(今世)의 신필(神筆)’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편이며, 대체로 50세를 중심으로 전후 2기로 나누어지는 화풍상의 변화를 보인다. 산수화의 경우 50세 이전인 1778년 작인 「서원아집육곡병(西園雅集六曲屛)」(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 말해 주듯이, 주로 화보(畫譜)에 의존한 중국적인 정형 산수(定型山水)에 세필로 다루어지는 북종 원체화적(北宗院體畫的) 경향을 나타내었다. 연풍 현감에서 해임된 50세 이후로는 한국적 정서가 어려 있는 실경을 소재로 하는 진경산수(眞景山水)를 즐겨 그렸다. 그러면서 ‘단원법’이라 불리는 보다 세련되고 개성이 강한 독창적 화풍을 이룩하였다.
미술관은 1관, 2관, 3관의 세곳으로 분포되어 있는데 1관 2관의 두곳은 전시준비로 문이 잠겼고, 3관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호랑이가 귀여운 모습으로 우릴 반갑게 맞이하기에, 호랑이 혓바닥에 내 오른 팔을 넣고 왼손으로 호랑이의 윗입술을 치켜 올리는 모습으로 재밋는 자세를 연출하면서 호랑이 조각작품과 어울려 사진을 남겼더니 역시 작품놀이는 재밋다.
단원미술관은 조선후기의 천재화가 단원 김홍도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미술관이다. 김홍도는 안산에 스승인 표암 강세황이 살았기 때문에 7~8세 때부터 20세까지 그의 집에서 살며 그림과 글을 배웠다고 한다. 그래서 안산에서는 단원 김홍도의 예술혼이 서려있는 이곳에 단원미술관을 건립하였다.
단원 김홍도의 대표작으로는 『단원풍속화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제527호)을 비롯해서 『금강사군첩(金剛四君帖)』(개인 소장)·「무이귀도도(武夷歸棹圖)」(간송미술관 소장)·「선인기려도(仙人騎驢圖)」·「단원도(檀園圖)」(개인 소장)와 「섭우도(涉牛圖)」·「기노세련계도(耆老世聯稧圖)」·『단원화첩』(삼성미술관 소장)·「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 등이다.
김홍도의 스승인 강세황(姜世晃, 1713년 7월 13일(윤5월 21일 ) ~ 1791년 2월 25일(음력 1월 23일 ))의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광지(光之), 호는 표암(豹菴)이다. 서울에서 강현(姜鋧)의 3남 6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61세가 되던 해 영조의 배려로 처음 벼슬길에 올랐다. 64세에 기로과(耆老科)에, 66세에는 문신 정시에 수석 합격하였다. 관직은 영릉 참봉(英陵參奉), 사포 별제(司圃別提), 병조 참의,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등을 두루 거쳤다. 69세에 정조(正祖) 어진 제작의 감독을 맡았다. 이 때 당시 화원 한종유(韓宗裕), 이명기(李命基)에게 초상을 그리게 하였다. 할아버지 강백년(姜柏年), 아버지 강현에 이어 71세 때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감으로써 이른바 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의 영예를 얻었다.
산책로를 따라 이리저리로 난 길을 돌아들고, 김홍도미술관을 두루두루 관람하고 인공폭포도 위아래로 넘나들면서 걸었음에도 걸음수는 9천보 남짓에 겨우 미친다. 그런 이유로 만보에 미달하는 걸음수를 채워넣기 위해 시작점에서 다시 출발하여 나드리길 교량을 건너 반대편 주차장으로 향한다.
노적봉을 바라보는 홍도랑이다. 단원 김홍도가 말년에 이르러 명승의 실경에서 농촌이나 전원 등 생활 주변의 풍경을 사생하는 데로 관심이 바뀌어 그가 그린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러한 사경(寫景) 산수 속에 풍속과 인물·영모 등을 가미하여 한국적 서정과 정취가 짙게 밴 일상사의 점경으로 승화시키기도 하였다. 그는 산수뿐만 아니라 도석인물화에서도 자신만의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였다. 전기에는 도석 인물 중 주로 신선도를 많이 다루었다. 굵고 힘차면서도 거친 느낌을 주는 의문(衣文: 옷자락 무늬), 바람에 나부끼는 옷자락 그리고 티 없이 천진한 얼굴 모습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이 시기의 신선 묘사법은 1776년에 그린 「군선도병(群仙圖屛)」(삼성미술관 소장, 국보 제139호)에서 그 전형을 찾아볼 수 있다.
김홍도의 단원이라는 호는 명나라 문인화가 이유방(李流芳)의 호를 따라 ‘단원’이라 자호하였다. 1788년에는 김응환(金應煥)과 함께 왕명으로 금강산 등 영동 일대를 기행하며 그곳의 명승지를 그려 바쳤다. 그리고 1791년 정조의 어진 원유관본(遠遊冠本)을 그릴 때도 참여하였다. 그 공으로 충청도연풍 현감에 임명되어 1795년까지 봉직하였다. 연풍 현감 퇴임 후 말년에는 병고와 가난이 겹친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여생을 마쳤다.
이곳을 노적봉이라 부르게 된 유래는 옛부터 어업을 생계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바다에 나가기전 반드시 사해용왕과 산신에게 무사할것을 기원하기 위해 당집을 찾았는데, 어느날 당집에서 치성을 드리던 무녀의 꿈에 신령이 나타나 ‘너희가 매일 나에게 드리는 정성이 모여 산만큼 커질 것이니 이 산의 이름을 노적봉이라 부르라’고 하였던 전설이 있으며, 산의 모양이 노적(露積)가리를 쌓아놓은 듯 하여 노적봉이라 불리워지고 있다. 이러한 안산의 지세를 『경기지(京畿誌)』의 ‘명산(名山)’조에서는 “수리산의 한 맥이 남쪽으로 굽어 돌아 군내면의 노적봉(露積峯)이 되어 성곶포(聲串浦)에서 그치며, 또 다른 한 맥은 북쪽으로 뻗어 초산면의 응봉(鷹峯), 잉화면의 마하산(麻霞山), 마유면의 군자봉(君子峯)이 되었으며, 와리면의 옛 소릉(昭陵)을 이루고 성두(城頭)에서 그친다.”고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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