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황성옛터(慶州)

영대디강 2021. 10. 23. 05:12

황성공원(皇城公園, Hwangseong Park)은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공원 및 스포츠 시설단지이며, 숲으로 조성된 시민공원의 시설이 아주 잘 갖춰져 있다. 경주시에서 열리는 많은 행사들이 이 곳에서 진행된다. 숲 사이로 자동차 3~4대 정도 너비의 아스팔트로 포장된 넓다란 길과 맨발로 걷는 황토산책로가 있으며, 다른 공원에서는 찾아볼 수 없도록 이렇게 넓은 산책로를 따라 30여 종류의 운동시설도 있다.

한민족이라는 개념이 정립되기 전에 한반도에 자리 잡은 고대 국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은 서로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끊임없이 싸웠다. 그런데 그러한 관계에 종지부를 찍고 삼국통일을 이룩한 나라가 바로 신라이며, 이곳 경주는 신라의 수도이다.

김유신이 활동한 시기의 신라는 진흥왕의 전성기가 끝나고 반복되는 실정, 외교적 고립, 신라 내부의 반대 세력으로 국가적 위기에 처해 있었는데 그런 신라를 존속시킨 핵심 인물로 넓게 보면 향후 수천년 한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한 명. 장수의 이미지가 강해서 묻히기는 하지만 정치가로서의 영향력도 제법 높았던 인물이다.

김유신(金庾信)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을 통일하는 데 가장 큰 업적을 남긴 명장이다. 삼국의 역사를 이끈 인물들을 소개한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에서도 김부식은 김유신을 가장 큰 비중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니 신라의 영웅인 김유신이 집중 조명받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특히 당대에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왕과 여러 귀족들,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있는 불교 지도자들을 제치고 무장인 김유신이 최고의 위인으로 소개된 것은 그만큼 그가 가진 영향력이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유신은 백제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당나라와 연합해 고구려의 멸망을 촉진시켰다. 그는 백성들의 신망을 받았으며, 조정 대신들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8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살며 5명의 신라 왕을 섬겼다.

김유신은 성골 왕통의 단절로 인한 극도의 정치 불안정 속에서 약화된 신라군을 이끌고 재앙에 가까웠던 백제의 대침공을 몇 번이나 막아내는가 하면 꾸준히 일어났던 서라벌 귀족들의 반란을 연거푸 진압하는 등 망국의 단계에 돌입한 신라를 지켜내는데 큰 기여를 했고 무엇보다 삼한통일의 대업을 이룬 영웅으로 한국의 역사에서 왕자이기는 커녕 경주김씨조차 아님에도 사후 당대에 대왕으로 추존된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맥문동(麥門冬)은 겨우살이풀·계전초(階前草)·도미(荼蘼)·마구(馬韭)·문동·문동불사초·불사초·애구(愛韭)·양구(羊韭)·오구(烏韭)·우구(禹韭)·인릉(忍凌) 등의 수많은 별칭이 있다. 맥문동이라는 이름은 그 뿌리가 보리의 뿌리와 같은데 수염뿌리가 있어 붙여진 것이라고도 하고, 부추의 잎과 같고 겨울에도 살아 있어 불리게 된 것이라고도 한다. 뿌리줄기는 옆으로 뻗지 않으며 짧고 굵다. 수염뿌리는 가늘고 긴데 어떤 것은 굵어져서 뿌리 끝이 커져 땅콩 같은 덩이뿌리가 된다. 덩이뿌리를 말리면 반투명의 연한 황색이 된다. 덩이뿌리를 대엽맥문동(大葉麥門冬)이라고 한다. 약으로 쓸 때는 탕으로 하거나 환제 또는 산제로 하여 사용한다. 술을 담가서도 쓴다. 술이나 쌀뜨물에 하루 저녁 담가 두었다가 부드러워지면 사용한다. 복용 중에 무·마늘· 파·오이풀을 금한다.

경주는 신라 천년의 고도,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적인 역사 도시, 어느 땅을 파도 신라시대 유물이 출토되는 곳으로 유명하다. 사방이 경주국립공원으로 둘러쌓인 경주시에서 황성공원은 문화유적 답사에 지친 여행자들의 발을 편하게 해주는 쉼터 구실을 한다. 경주시 북쪽에 있는 공원으로 신라시대에는 화랑들의 훈련장으로 쓰였던 곳이다. 공원 안에는 공설운동장, 충혼탑, 높이 16m의 김유신장군 동상, 박목월 시비 등이 있으며,공원 주위는 온통 숲으로 덮혀있다. 황성공원에 조성된 ‘천년 맨발길’에 하루 1000여 명이 찾고 있다. 입소문을 타고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찾아온 시민들은 소나무숲 속에서 맨발로 황톳길을 걸으며 스트레스를 풀고 건강도 챙긴다.

길게 펼쳐진 철로를 따라 양옆으로 숲속을 걷는 숲길이 마련되어 있다. 남쪽으로는 알천(북천)을 경계로 성건동과 마주보고있고 개인사유지가 공원의 반을 감싸고 있고 925번 지방도와 7번 국도를 경계로 각각 황성동 시가지 동천동 시가지와 마주보고 있다. 이렇게 걷는 숲길 중간에는 운동기구도 있어서 시민의 건강을 챙기고 있다.

표암은 서기전 69년에 6촌장이 여기에서 모여 화백회의를 열고 신라건국을 의결했으며, 그 뒤 서기전 57년에 신라가 건국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표암은 경주이씨의 혈맥의 근원지인 동시에 신라 건국의 산실로서 화백이라는 민주정치 제도의 발상을 보인 상서로운 곳이다. 1806년(순조 6)에 유허비가 세워졌고 1925년에는 표암재가 건립된 뒤 매년 3월이면 중정에 향사를 하고 있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54호. 지정면적 41,168㎡. 동쪽으로는 명활산성(明活山城), 남쪽은 남산, 서쪽은 선도산(仙桃山), 북쪽은 소금강산(143m)의 전형적인 분지형태로 이 산은 본래 북악으로 불리던 명산이다. 신라의 4영산중의 하나이며, 산의 정상에는 이차돈(異次頓)과 관계있는 백률사(伯栗寺)가 있으며, 서쪽에는 굴불사지석불상이 있다.이 산의 동쪽과 서쪽에는 석탈해왕릉과 고분군의 동천동지구, 소금강산의 서북과 용강동 평지에도 신라시대의 석실고분군이 있는 용강동지구로 개발계획이 있다. ‘박바위’ ‘밝은바위’를 뜻한다. 이곳은 신라6촌 가운데 근본이 되는 밑돌부라는 부명이 붙여진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의 시조 알평공(謁平公)이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다.

탈해왕릉은 1969년 8월 27일에 사적 제174호로 지정되었으며 대지 면적은 3만 7,993㎡이다. 위치는 경주시의 북쪽을 건너 약 1㎞ 가량 떨어진 곳으로 백률사가 있는 소금강산의 남록 낮은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이 왕릉은 20세기 초에 석씨 일족이 석탈해의 능으로 비정함으로써 현재까지 탈해왕릉으로 불리게 되었다.

탈해왕의 성은 석씨(昔氏), 이름은 탈해(脫解, 혹은 吐解)라고도 하며, 제3대 유리왕(유리이사금)의 유언으로 왕위에 올라 62세에 왕이 되었다. 왕비는 아효부인(阿孝夫人)이다. 재위 23년간 왜구(倭寇)와는 친교하고, 백제와는 자주 다투었다. 계림(鷄林)을 국호로 하였으며 가야와 싸워 크게 이겼다. 서기 57년에 왕이 되어 80년에 승하하였으며 죽은 뒤 경주에 있는 양정(壤井)의 언덕에 장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의 탈해왕릉에 대해서는 그 위치비정을 부정하는 시각도 있다. 즉, 위치와 지리상으로 볼 때 초기의 고분권 지역인 경주평야 중심지를 벗어난 변두리 산록으로 옮겨졌다는 점에서 서기 1세기대가 아닌 신라고분 중기인 통일기 전후의 고분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또한 분구의 규모가 소형급이며 묘제가 굴식돌방무덤이란 점에서 통일기 전후의 무덤과 상통한다는 점, 아울러 소상(塑像)을 만들어 토함산에 안치하였다는 석탈해설화 내용으로 볼 때 왕릉 내부에는 유골이 없다는 점, 그리고 유골을 어떠한 사유에서든지 옮긴 묘는 보존하지 않는다는 점 등을 제시하고 있다.

경주 이씨(慶州 李氏)는 경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로, 시조는 신라의 건국 신화에 나오는 사로 (斯盧) 6촌 중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의 촌장으로 전해지는 표암공(瓢巖公) 알평(謁平)이다. 《경주이씨 대종보(大宗譜)》 상계편에 의하면 알평은 6촌 촌장의 수장으로 화백회의를 주재하고 박혁거세를 옹립하여 신라 건국의 원훈으로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고, 아찬(阿粲)에 올랐다고 한다. 32년(유리이사금9년) 알천양산촌은 급량부(及梁部)로 개칭되었고, 이씨(李氏) 성을 사성(賜姓)받았다고 한다.

돌방무덤은 돌로 널을 안치하는 방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쌓아 올려 봉토를 만든 무덤이다. 널길이 달려 있고 천장 구조가 다양하다. 옛 용어는 석실묘(石室墓)이다. 지하에 묘광을 판 후 돌을 이용하여 무덤방을 만든 다음, 측면에 입구를 만들어 출입시설을 마련한 무덤 유형이다. 이 묘제는 묘·장제적으로 선행 묘제와 큰 차이가 있는데, 특히 장제적으로 이전의 단장묘(單葬墓) 대신에 합장(合葬) 혹은 다장(多葬)을 전제로 하는 무덤이다. 돌방무덤의 발생은 선행 묘제의 진화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새롭게 외부에서 유입된 것이다.

이 무덤 양식은 우리나라와 중국·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사회 대부분에서 확인되는데, 특히 우리나라 삼국의 모든 영역에서 확인된 묘제이다. 3∼4세기 대에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5세기말 혹은 6세기 무렵에 신라와 가야지역에 시간차를 두고 새롭게 등장하였다. 일반적으로 삼국이 국가체제를 정립할 즈음 주묘제로 자리 잡은 후, 전 사회의 보편적 묘제로 자리매김 되었다.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에 있는 철기시대 이후 독무덤·널무덤·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유적이 위치한 덕천리의 북쪽은 해발 423m의 벽도산에서 여러 갈래로 뻗어 내린 나지막한 구릉지대가 있으며, 동쪽은 서에서 동으로 이조천이 굽이쳐 흘러 형산강과 합류하면서 넓은 충적대지를 형성한다. 발굴조사 결과, 청동기시대 장방형주거지와 석관묘, 삼국시대의 제철유구, 통일신라시대의 도로 등이 확인되었으며, 조사된 분묘는 석관묘 1기, 목관묘 14기, 토광묘 2기, 목곽묘 122기, 옹관묘 66기이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이렇게 드넓은 주차장이 단체관광객을 실어나를 수 없게되어 이처럼 비어 있다. 시티투어 코스마다 안내표지판만 신경주역 앞 광장을 외롭고 쓸쓸하게 지키고 있다. 어느 곳이든 도시 전체가 온통 문화재인 이곳 신라천년의 고도 경주를 찾는 사람들이 줄지어 늘어서길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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