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모락산둘레길(義王)

영대디강 2022. 1. 9. 06:03

경기도 의왕시 모락산은 주민들이 산보하듯 오르내리는 나지막한 동네 뒷산이다. 한 해 줄잡아 35만여명이 즐겨 찾는 모락산을 한바퀴 돌아드는데 약 20km에 이르는 4~5시간 코스의 둘레길이다. 

근래 발행된 지도에는 모락산(帽洛山) 으로 표기 되어있지만 모락산(慕洛山)이 옳은 이름이라는 주장도 있다. 해발 385m의 모락산은 절벽과 기암괴석, 암릉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시대 세종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이 매일 이 산에 올라 서울을 향해 망궐례(멀리 있는 궁궐을 바라보고 행하는 예)를 올려 '서울을 사모하는 산'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설과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이 산에서 사람들을 몰아 죽였다는 데서 모락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오래 걷지 않아도 도심이 내려다보이는 탁 트인 전망과 마주하니, 모락산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서울을 사모하는 산'이라는 이름이 더 맞지 않을까 싶다.

모락산은 비교적 낮은 산이지만 둘레길 따라 암봉이 연이어 솟아있고, 길 양옆으로는 숲이 우거져 있어 암봉을 오르내리는 아기자기한 산행의 멋을 느낄 수 있다. 고스락에 서면 조망이 좋아 북쪽의 관악산, 동쪽의 청계산, 백운산, 광교산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고 서쪽으로 수리산이 손에 잡힐듯 건너다 보인다.

조선시대 제7대 임금인 세조가 12세에 등극한 단종을 사사하고 왕위에 오른 것을 목격한 임영대군(1418~1469 세종대왕의 넷째아들)은 왕위도 좋지만 혈족간에 살생까지한 세조에게 반감이 생겨 매일 이산에 올라 옛 중국의 수도인 낙양을 사모하여 소임하였다하여 모락산이라 부르고 있다고 또하나의 다른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그럴듯한 모락산 이름의 유래는 또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인근의 백성들이 모두 왜병을 피해 모락산의 한 굴에 피난을 갔다고 한다. 하지만 한 어린이가 빠져 이 아이는 가족을 잃고 울고 있었다. 결국 왜병은 이 아이를 발견하고 굴에 불을 질러 굴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몰살시켰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산은 사람들을 '몰아서 죽였다'는 의미로 모락산이 되었다고 한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너무나 끔찍한 전설이다.

또 효성이 지극했던 정조는 수원 화산에 있는 자기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 융륭에 일년에 한번씩 성묘를 다녔다. 정조의 능행은 과천의 남태령을 넘어 인덕원에서 잠시 쉬고난 후, 모락산 아래를 지나 1번 국도 수원과 의왕 경계의 지지대고개를 넘어 수원으로 들어가는 노정이었다. 그 당시 발간된 원행정례(園行定例)와 전주 이씨 임영대군파 족보에는 한결같이 모락산(慕洛山)으로 표기되어있다.

수도권에서 북한산, 도봉산, 관악산, 수락산에 이어 다섯 번째로 조망이 좋은 산이라고도 하는 모락산은 갈림길마다 안내판이 있고 위험한 곳에는 밧줄도 매어져 있다. 도시 가운데 위치한 산이라 여러 곳에 갖가지 운동기구와 의자등 쉴 수 있는 시설도 있다. 오르막길에는 계단도 설치되어있고 그늘이 없는 쉼터에는 차양막까지 갖춰져 있다.

절터약수터이다. 우뚝한 바위 절벽 아래 몇 곳의 자그마한 평탄지가 있다. 석축도 남아있고 무수히 많은 기와편도 밟힌다. 경일암(擎日庵)터다. 절의 연혁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임영대군의 원찰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한국전쟁 이전까지 존속했으니 500년 도량(道場)이 빈터로 남은 것이다. 지금도 두 개의 샘이 마르지 않고 이렇게 약수터로 흐른다.

1940년 봉은본말사지 경일암 편을 작성할 때까지도 이곳의 절은 온전히 존속했었다. 약사여래, 지장보살, 독성상이 석상으로 온전히 남아 있었고, 1866년 (同治 5년) 대모산 불국사에서 제작한 신중탱화를 비롯하여 탱화도 여러 점 있었다. 게다가 석두사(石頭寺)에서 발행한 1547년(가정 26년) 능엄경 전5권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으니 찾기만 한다면 아마도 보물급일 것이다.

1839년에 선기화상(善基和尙)은 인근부락에서는 드물게 임종에 처한 최중손(崔重孫)이란 분의 50금(金) 시주를 받아 경일암을 중건할 수 있었다. 그렇게 중건하고 지켜 나가던 절이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터만 남았다. 성주회공(成住壞空)이며 흥망성쇠가 번갈아 바뀐다 했으니 경일암이 아담하게 다시 자리잡으면 좋을 것 같다. 약수터 위로 우뚝솟은 바위는 인봉(金+刃, 峰)이라는 이름이다. 인봉에는 옥관자송(玉冠子松, 별명 當選松)이 있는데 정조가 현륭원을 행차하다가 고송(孤松)이 우뚝한 것을 보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봉하고 옥관자를 내렸다 한다.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그 후손들인가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으니 언젠가는 뒤를 이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락산은 갑자기 생명력이 넘치는 산이 될 것인데… 경일암 터를 내려다보니 만감이 무상하다.

모락산 전투(慕洛山 戰鬪)는 경기도 의왕시 오전동의 모락산에서 1951년 1월 31일 부터 2월3일까지 한국군 1사단 15연대와 단대호 미상의 중공군 1개 연대간 치열하게 벌인 전투이다. 수원에서 북쪽으로 달려 지지대고개를 넘어서면 좌전방에 수리산이, 우전방에 백운산과 모락산이 우뚝 솟아있다. 안양지역을 안전하게 통과하고 측후방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전술적으로 반드시 확보되어야 할 중요한 지역이다.

중공군은 이 산악지역을 이용하여 유엔군의 진출을 저지하려 하였다. 유엔군은 터키여단을 좌측에 미25사단 35연대를 중앙에, 한국군 1사단 15연대를 우측에 배치하여 1월 31일 공격을 개시하였다. 한국군 1사단 15연대는 1월 29일 연대지휘소를 수원 북쪽의 정자리로 옮기고, 1월 31일 제1대대를 우측에, 제2대대를 좌측에 배치하고 3대대를 예비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중공군은 오전동지역의 무명 237고지에 1개 대대, 백운동지역 무명 213고지에 1개 대대, 모락산 정상부근에 1개 대대를 배치하여 아군의 진출을 저지하였다.

제1대대장(유재성 중령)은 왕곡리- 백운사 일대로 진출한 다음 1:00시경 제2중대를 우측에, 제3중대를 좌측에 배치하여 박격포와 기관총의 지원을 받으며 공격을 실시하여 13:50에 무명 213고지, 217고지, 220고지를 점령하였다. 한편 제2대대장(대대장 최병순)은 통산-곡정일대에서 공격을 시작하였다. 우측 공격제대인 6중대는 무명 237고지의 적을 정면으로 공격하고, 좌측 공격제대인 제5중대는 내곡을 지나 237고지의 서쪽 기슭을 공격하였다. 이때 적은 모락산에 있는 1개 대대의 화력지원을 받으면서 집요하게 저항하였다. 그러나 대대는 15:00경에 적 진지에 제압사격을 가하고 200m 능선까지 진격한 다음 일제히 적진을 돌격하여 20분간의 육박전을 전개하여 고지를 점령하였다.

나흘간의 혈전에서 한국군 1사단 15연대는 중공군 663명을 사살하였으며 90명의 포로를 획득했다. 한편 한국군도 전사 70명, 부상 200여명의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유엔군은 1번국도와 47번국도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안양을 지나, 인천, 영등포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게 된다. 또한 한강 이남선에서 주저항선을 형성하여 수도 서울을 사수하려는 중공군의 의도를 무산시켰다. 여기에서 전사한 분들의 유해발굴이 한창이라서 출입금지 저지선이다.

사인암이다. 이 산은 낮은 산이지만 정상에는 큰 평탄지가 자리잡고 있다. 안내문에 따르면 4~5c 백제시대에 평탄지를 에워싸고 모락산성(城)을 쌓았다고 한다. 퇴메식 산성으로 길이가 878m나 된다고 한다. 발굴해 보니 문이 있던 자리 2개소, 공격하기 좋게 삐죽 나오게 쌓은 치성(雉城) 4개소, 망대 2개소, 건물지 6개소가 나타났고 백제시대 경질토기파편이 많이 나왔다 한다. 한성백제 시대 하남위례성의 배후를 지키는 주요한 성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봉은본말사지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이곳에 일병들이 진을 쳤다 해서 아마장터라 불렀다는 것이다.

모락산성... 산의 정상부위에 우뚝 선 정자이다. 이곳에는 조선시대 이전부터 한국전쟁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간이 공존한다. 고대 고분으로 추정되는 유적이 있고, 조선 세종의 아들 임영대군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국전쟁 당시 정상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이곳 정상 부근에는 현대에 세워진 전승기념비가 있다.

모락산성은 해발 385m 모락산 정상에 축조된 백제 한성기 시대 석축산성이다. 산 정상부를 감싸고 있는 태뫼식 산성으로 성벽의 길이는 878m이다. 성벽은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경사가 가파른 곳은 자연암반을 이용하였고 경사가 완만한 곳은 안팎으로 석축을 쌓아 올렸다. 북·동·남벽은 비교적 직선을 이루지만, 서벽은 능선과 계곡부를 연결하면서 자연적 지형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성내의 시설물로는 문지 2개소, 치성 4개소, 망대지 2개소, 건물지 6개소 등이 있다. 성내에서 수습된 토기류는 호, 옹, 심발형 토기, 장란형 토기 등으로 4세기~5세기 무렵 백제 토기이다. 모락산성은 도성인 풍납토성에서 서남부지방으로 통하는 교통로를 통제하고 배후에서 적의 침투로를 견제하는 등 도성방어를 위한 경기 서남부지역 주요 거점 성이었다.

정상에 오르니 시원스레 펼쳐진 눈앞으로 백운산(白雲山)이 보인다. 이 산은 의왕과 수원, 용인에 걸쳐있는 산으로 백운산의 고도는 567 미터이다. 앞에 보이는 능선을 따라 양 4.5Km를 걸으면 백운산에 오를 수 있다.

청계산에서 뻗어내린 국사봉·바라산(428m)·백운산 등이 이어져 있으며, 서부에는 모락산·오봉산 등의 구릉성산지가 솟아 있다. 이들 산지 사이의 시 중앙부와 서남부는 비교적 낮고 평탄해 이 두 지역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다.

군포 수리산은 높이 475m. 견불산이라고도 한다. 주위에 수암봉 등이 있다. 전사면이 비교적 완만하다. 남북으로 능선이 길게 뻗어 있으며, 비교적 형세가 복잡하다. 북쪽 골짜기에 있는 담배촌은 조선시대 후기 천주교 박해 때 신자들이 담배를 가꾸며 숨어 지내던 곳으로, 지금은 천주교 순례지로 되어 있다. 창박골-동쪽 능선-산성-수리사-둔대리, 부곡동-서북쪽 능선-수리사-수암봉-창박골 등의 등산로가 있다. 

한국전쟁 당시 모락산을 포함한 수리산과 백운산 주변은 수도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요충지였다. 1951년 1월, 한국군은 모락산 정상에서 중공군과 벌인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를 기리는 전승기념비가 1999년에 세워졌고, 이 부근에서 매년 전승기념비 참배 행사가 열린다. 국기봉 주변 쉼터에 한국전쟁 관련 사진들이 전시되고, 사람들이 모여 지난 시간에 대한 애도를 표한다.

국기봉에는 태극기가 펄럭인다. 385m의 낮은 산이지만 다양한 수준의 코스가 마련돼 산을 오르는 재미가 좋다. 산 주변에 백운호수가 있고 호수 옆으로 먹을거리가 가득하다. 수도권에서도 타 지역 사람들이 당일 산행을 위해 모락산을 찾는 이유는 가까운 곳에 이렇게 보고 먹고 즐길거리가 충분한 이유란다.

손가락의 형상을 닮은 바위라서 손가락바위라고 이름 붙였단다. 이곳에도 역시 뭔가를 소망하는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기원하는 돌탑이 정성을 담은 모습 그대로 아담스레 서 있다. 

두 덩이의 바위 사이로 설치한 밧줄에 매달려 오르면 서쪽으로 까마득한 낭떠러지를 이룬 암봉위에 서게 된다. 이 암봉은 대여섯 평의 암반이 두 단계로 되어 있다. 의왕의 산이면서도 안양과 군포의 넓게 펼쳐진 시가지를 내려다 볼 수 있고 북으로는 하얀 바위들을 드러내고 있는 관악산이 보인다.

모락산 전망대에 오르면 의왕시내는 물론 안양, 군포, 과천, 서울이 한눈에 들어오는 조망이 아주 좋은 곳이다.

소나무들이 작은 숲을 이루고 있으며 그 바로 아래에 곤양 배씨 묘가 있다. 태극기가 펄럭이는 상봉으로 가자면 다시 널찍한 잘록이를 지나고 작은 과수원을 지나야 한다. 잘록이에는 휴식 시설이 있고 고인돌같이 허공에 뜬 커다란 바위가 있으며 산불감시 망루도 있다. 상봉은 뾰족하게 솟은 암봉이다. 양면이 천길 낭떠러지여서 시원하고 전망이 좋다.

구렁이등 같은 암릉은 거대하고 보기 좋을 뿐만 아니라 중간 중간의 바위들은 보는 이에 따라 해석이 다를 정도로 기기 묘묘하다 . 톱바위, 코끼리 바위 등의 이름이 붙어있는 것도 있다. 신기하고 경관이 좋아 사진도 찍고 조망도 해야하기 때문에 시간이 꽤 걸린다. 첫 암릉에서 왼편으로 사다리와 밧줄을 타고 내려가면 그 아래에 또 비슷한 암릉이 이어진다.

모락산에는 임영대군에 얽힌 이야기가 곳곳에 전해진다. 정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절터약수터가 있는데, 이곳 역시 임영대군이 창건한 경일암의 옛터로 추정된다. 지금도 흙바닥에서 건물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발굴조사 당시에는 기와, 토기, 자기 파편 등이 여러 점 발견되었다. 이런 역사 이야기가 깔려있어 그런지 발밑에 밟히우는 낙엽의 두께가 포근하다.

이곳에는 아직 조사가 끝나지 않은 고대 고분들이 있다. 거리상 차이가 있어도 하산길은 대체로 수월하다. 경사가 있는 길로 먼저 올랐으니 어느 길로 내려가도 그저 호젓한 숲길이다. 올라온 길의 반대쪽으로 내려가면 백운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종주길과 큰범바위, 돼지바위를 지나 의왕시내에 도달하는 길, 가장 짧은 코스인 모락중학교 방면 하산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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