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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서삼릉 서오릉

영대디강 2018. 5. 6. 14:29

아슴한 기억이지만 아름다운 추억을 찾아 서삼릉을 찾았습니다. 벌써 세월은 42년이 흘렀지만, 싱글로 찾았던 우리부부의 풋풋한 시절엔 꿈과 더불어 가슴 가득한 낭만이 풍요로웠기에, 목장길 사이로 길게 늘어선 백양목 가로수길에 두연인이 꿈결처럼 거닐며 영화의 촬영장소로도 유명했던 그곳을 설레임으로 찾았으나, 가로수가 사라진 옛기억은 이미 흔적만 남고 작고 좁은 길과 세계문화유산 팻말만 자리매김하고 있었습니다.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의 서삼릉엔 효릉, 희릉, 예릉의 삼릉이 있고, 효창원과 의령원 소경원의 삼원이 있습니다. 왕과 왕비의 무덤은 릉, 왕세자와 세자빈 또는 왕 사친의 무덤을 원이라 합니다. 효릉은 조선 12대 인종과 그의 비 인성왕후, 희릉은 11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예릉은 제25대 철종과 왕후, 의령원은 영조의 아들 장조(사도세자)가 15세 세자비에게 낳아 3세에 돌아간 의소세손이 묻힌 곳이며, 효창원은 정조의 아들인 문효세자, 소경원은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의 묘입니다.

조선왕조의 무덤이 모두 120기가 보존되고 있으며, 릉이 42기(개성에 2기) , 원이 14기, 묘가 64기로 500년 왕조의 무덤이 이렇게 잘 보존된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워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 받아서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삼릉은 홍살문과 정자각을 지나 천천히 걸으며 사진까지 남겨도, 너무 좁은 면적에 한바퀴 돌아드는 시간이 겨우 십여분을 못 넘기네요. 매표소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희릉을, 왼쪽으로 예릉을 돌아나와 효창원 의령원을 잠깐 돌아보니 싱겁게 끝입니다.   

전체 130여만평이던 서삼릉은 이제 겨우 7만평 면적으로 이웃 종마목장인 렛츠런에게 사유지로 내어주고 있어서, 우린 발길을 오른쪽 목장길로 옮겼습니다.  도시인에겐 낯설게 다가서는 목장의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긴해도 넓고 시원하게 펼쳐진 초원은 입장료 없이도 들어갈 수 있기에, 이곳에서 잘 정돈된 목장을 배경으로 사진을 여러장 찍었습니다. 역사보다 현실이 우선함으로 느끼며, 서삼릉에 묻힌 조선왕조의 사색당쟁이 그대로 후손인 우리에게 전수된것 같은 마음으로도 호시탐탐 우릴 넘보는 주변 강국들의 모습이 두렵지도 않은 평온함 그대로입니다.

드넓은 초원이 펼쳐진 목장에서의 한바퀴가 싱그럽습니다. 마침 어린이날이라서 아이들 손목을 잡고 목장을 찾은 젊은 가족모습들이 너무 정겹고 흐믓했습니다. 자식없는 부모는 있어도 부모없는 자녀는 없다는 속담이 떠오르면서, 문득 예릉에 묻힌 철종은 사도세자의 증손자로 태어나 헌종의 후사가 없다는 연유로 강화도령에서 곧장 왕으로 영입되었고, 재위 14년 동안 3년간은 대비의 수렴청정으로 그 뒤로는 안동김씨의 세도로 국정을 어지럽힌 왕이지만, 그럼에도 사후에 대한제국 황제로 추존된 슬픈 역사를 떠 올리며 오늘의 우리 현실을 반성하게 하네요.

동명여중시절에 서오릉으로 소풍을 다녔다는 아내의 추억속으로 무조건 옮겨가자는 아내의 말에 순종하면서, 작년에 광화문 광장에서 1인시위를 하시던 1922년생 아버지의 소학교동창을 떠 올리며 반면교사 선친이 생각났습니다. 가족부양의 의무가 뭔지 모르시며 시도 때도 없이 손님들을 몰고와 밭일하시는 어머니를 집으로 불러오라시던 아버지는 항상 자식들 앞길을 열어주려고 그런다며 큰소리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6남매는 아버지의 도움을 받은 자녀가 한명도 없고, 덕분에 나는 평생 정당가입이나 정치인 적극 지지가 없는 정치혐오 백성으로 살아왔습니다. 

나이들어 좋은 점도 있더군요. 입장료를 내지 않아도 신분증만 보여주면 끝~. 서오릉은 역시 서삼릉과는 출발부터 달랐습니다. 입구에 전시관이 있어서, 경릉에는 성종의 아버지인 추존왕 덕종과 소혜왕후(인수대비), 명릉에는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및 두번째 계비 인원왕후, 창릉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익릉에는 숙종의 정비인 인경왕후, 홍릉에는 영조의 정비 정성황후, 순창원은 명종의 장남인 수회세자와 공회빈 윤씨, 수경원은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소유 영빈 이씨가 안장된 곳임을 한번에 공부할 수 있더군요.

대빈묘가 눈에 번쩍 뜨이더군요. 묘지도 역시 작고 아담하게 이뻤습니다. 장희빈은 숙종의 총애를 받으며 경종을 낳아 희빈에서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숙종의 생모인 명성왕후의 미움을 받아 쫒겨났고, 대비 사후에 다시 궁으로 돌아왔으나 서인과 남인의 당쟁으로 또 다시 수모를 당해야했습니다. 경기도 광주 오포읍에 있다가 이리로 옮겨졌다는 기록을 읽으며, 왜 우리는 역사속에서 민족이 하나임에도 세계속의 조그만 나라에서도 한덩어리로 똘똘 뭉치지 못하고 동서갈등 이념투쟁 세대차이를 극복하지 못하는지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산책로로 조성된 약3Km의 서이나무길과 소나무길은 기가막히게 좋더군요. 숲 사이에 흙길 그대로 개설한 걷는 길은 높낮이가 별로 없으면서도 시원하고 맑은 바람이 소리없이 흐르며 가끔씩 들리는 산새소리만 안전하고 쾌적한 환경임을 절감케 하네요. 국내외로 수 없이 많은 곳을 다녀봤지만, 이곳으로 이사하고 싶다는 생각은 여기가 처음입니다. 대다수의 노부부가 정답게 걷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우리 커플은 단연 돋보이게 씽씽~ 노인우대 관람객 답지 않게 잰 걸음을 옮겼습니다.

두시간 남짓 걷고 찍고 읽고 공부하면서 정문을 향해 돌아나오는데 익릉앞에 심기워진 사꾸라 나무가 우리 두사람 눈에 거슬립니다. 이조 오백년의 사직을 싸워보지도 못하고 그냥 넘겨준 그 나라의 국화를 왜 거기에 심었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네요. 우리네 집 문앞에만 나서면 벚나무가 지천인 우리나라 삼천리 금수강산에서, 하필이면 조선왕조 오백년 내내 왜구의 침략에 시달리다가 끝내는 식민지로 무릎을 꿇어야했던 아픈 역사가 잊혀지지 않는 조선왕비의 무덤앞에 소나무도 무궁화도 아닌 사꾸라나무가 왠말인가 싶었습니다.

뒤따르던 아내가 스마트 폰을 바라보더니 "피는 역시 못 속이겠구먼~" 하며 웃습니다. 엄마를 찾는 가족 단톡방에 "우리는 서삼릉을 거쳐 서오릉에 있다"고 했더니만, "그럼 내친김에 아주 서칠릉까지 다녀 오슈"라는 세찌의 답신이랍니다. ㅎㅎ 삼오칠구... 점심을 먹자며 우리는 서울과 경기도 접경에 있는 장어구이집으로 들어가면서 "여기가 종점 서구릉!" 이라고 개그를 하면서 이래 저래 즐겁고 행복한 하루였음을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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