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나의 이야기

독산성 세마대지

영대디강 2018. 10. 9. 17:39

한글날인 오늘은 경기도 오산시 지곶동에 사적 제140호로 지정된 독산성(禿城山城)을 찾았습니다. 주차료와 입장료가 없는 곳이라서 넓은 주차장에 편안하게 주차를 마친 후, 길을 묻지 않아도 찾아갈 수 있도록 입구에는 '독산성세마대산문(禿山城洗馬臺山門)'이라는 기와지붕 일주문과 보적사 1.4Km라는 표지판 그리고 독산성산림욕장이라 쓰인 표지석이 우리에게 아침인사로 어서오라는 듯 반갑게 안내하고 있군요.

보적사를 향하여 가벼운 마음으로 시멘트로 포장된 길을 걸어 올라가는데, 여기도 역시 걷는 사람들 보다는 줄지어 올라가는 차량들이 우릴 비웃듯 비켜서라 하는군요. 몸이 불편하신 분이나 어린 아이들을 싣고 가는 길이 아니라면 굳이 이렇게 산성 오르막 길에도 낑낑거리는 차들이 올라야만 하는걸까 그런 불편한 마음으로, 남문으로 오르는 길로 약 1.1Km를 가볍게 걸어 올랐습니다.

백제시대에 축성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산성 둘레는 약 3.6Km인데 현재는 약 400m정도가 복원되었으며, 성문은 4곳이 남아있습니다. 우리는 남문에서 출발하여 서문과 북문을 거쳐 동문으로 거의 오르내림이 없이 평탄한 길 약 1Km를 한바퀴 돌아드니 너무 싱겁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반대로 한바퀴를 더 돌고, 또 다시 한바퀴 더 돌아도 역시 우리들의 젊은 다리는 불만입니다.

우리는 성공하지도 못했고 내세울 것도 없는 평범한 삶이지만 살아온 어제를 별로 후회하지 않게 살아왔기에,  내일이 왔을 때 또 어제가 되어버린 오늘을 돌아보며 후회하지 않도록 오늘하루도 재밋고 맛있게 열심히 운동을 합니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키자는 소신으로 인터넷 검색을 통하여 갈 곳을 정하고 휴일이면 어김없이 집을 나서서 함께 걷습니다. 오랜세월을 더불어 살았어도 모든 취향이 다른 우리는 둘이서 딱 맞는 취미가 함께 보고 걷고 먹는 이거 하나 뿐이거든요. 그러나 우리에겐 함께라는 단어가 전혀 어울리지 않게 대화가 없습니다.


우리는 정상에 우뚝 선 세마대(洗馬臺)에서 잠시 쉼을 갖자 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1593년에 권율 장군이 이곳에 주둔하였을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끈 왜군이 침략하여 포위된 산에 물이 없을 것이라 짐작하고는 물 한 지게를 산 위로 올려보내며 항복하라 조롱하였답니다. 그러자 권율 장군은 물이 많은 것처럼 보이기 위해 백마를 산 위로 끌어 올려서 목욕시키는 것처럼 흰 쌀을 끼얹었고, 산 아래에서 이를 본 왜군은 말을 씻길 만큼 충분한 물이 산 꼭대기에 풍부하다고 생각하고는 그냥 물러났다고 합니다. 이 유서깊은 세마대는 6.25 동란중에 불탔고, 지금은 1957년에 복원되어 당시 대통령 이승만이 친필로 쓴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이 독산성은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쳐 임진왜란 때까지 계속 사용되었으며, 1593(선조 26) 7월에 전라도관찰사 겸 순변사였던 권율(權慄)장군이 근왕병 2만 명을 모아 한양으로 올라가다가 이곳에 진을 치고서 쳐들어 온 왜적을 물리쳤고, 이듬해 1594년에는 백성들이 힘을 모아 불과 4일 만에 허물어진 성을 고쳐 쌓았답니다. 우리는 천천히 걸으며 싱곽을 돌아들면서, 전투의 지식이 없이 그냥 바라보기에는 석축으로 앃아놓은 산성의 아래쪽이 거의 수직으로 너무 가파르기 때문에 당시의 병사들은 기어 오르기를 포기하지 않았을까 여겨집니다.

세마대 바로 아래 위치한 보적사는 창건당시 중생의 질병치료, 수명연장, 재화 소멸, 의복, 음식 등을 만족케하고 부처의 행을 닦아 무상보리의 진리를 터득케 한다는 약사여래를 모신 약사전을 정전으로, 독산성의 역사와 함께 오랜 세월을 같이 했으나 1990년 도광정운()스님의 불사 때 석가여래불을 모신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창정전이 건립되면서 대웅전으로 명칭이 변경돼 오늘에 이르고 있답니다. 보적사는 백제의 고성인 독산성 정상하단 동문 앞에 위치해 있는데, 삼국시대에 독산성을 축성한 후 성내인 현재의 터에 전승을 기원하기 위해 창건된 이래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인한 중건을 거듭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보적사란 이름이 지어진 것은 백제시대 보릿고개로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노부부가 겨우 쌀두되만이 남아 있어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러 구차하게 사느니 차라리 부처님께 바치겠다고 결심한 후, 공양후 집에 돌아와 보니 곡간에 쌀이 가득차 있는 기적이 발생하였다고 하며 열심히 공양하여 보화가 쌓인 신통력 있는 사찰이라 하여 보적사라 명명되었다고 한다. 1988년 7월 27일 전통사찰 제34호 지정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대학수능을 앞둔 부모와 자녀들이 많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함께 기도하지는 못하지만, 그 염원을 생각하며 숙연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한신대 유적지 발굴팀이 파헤쳐 놓은 모습들을 보면서 우리민족의 유구한 역사도 이곳에서 발굴되고 있음이 자랑스럽네요.   


단조로운 산성길을 돌아 걷다보니 안되겠다 싶어서 스마트으로 또 다른 곳을 걸어보려 손가락 검색으로 오산 주변 가볼만한 곳을 찾았습니다. 보적사 바로 아래에 '독산도보여행길'이 나타났습니다. 그 길로 들어서니 정말 아늑하고 한적한 소나무와 잣나무 오솔길에는 걷는 사람들도 거의 없고 햇볕도 잘 들지않는 시원함까지 더해져서 힐링의 시간이 됐습니다. 여름에 걷기 좋은 길이라며 우리는 반드시 기억하자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서로에게 부탁하며 주차장까지 한바퀴를 한시간 남짓 돌아왔습니다


돌아드니 마침 점심시간이라서 주차장 바로 앞에 '산풀들풀 산채정식'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나니, 이젠 너무 배가 불러서 소화를 시켜야 하니까 이웃 '물향기수목원'에 가자며 그곳으로 방향을 정했습니다. 이곳도 역시 경로라는 나이탓에 입장료는 무료였고 주차료만 3,000원을 부담하니 조금은 미안하다는 생각이 됩니다. 수목원의 미로찾기부터 이곳 저곳 식물원들을 둘러보며 느낀것은, 이곳은 아이들과 함께 자연을 공부하러 가족나들이로 찾아오는 곳인데 논네들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느냐며 고목나무 앞에서 사진한장 찍은 후 재빨리 퇴장했습니다. 

  

한글날이 공휴일로 지정되어 그냥 쉬는 날로 여기고 오늘은 국기게양도 하지 않은 채 놀러만 다닌 연후에 블러그에 들어와 이제서야 깨닫고 반성을 합니다. 한글은 인류가 사용하는 문자들 중에서 창제자와 창제년도가 명확히 밝혀진 몇 안 되는 문자이며, 한글은 그 창제 정신이 '자주, 애민, 실용'에 있다는 점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문자로 평가받는 답니다. 이러한 창제 정신과 더불어 제자() 원리의 독창성과 과학성에 있어서도 뛰어나며, 한글의 특성은 국제 기구에서 공인을 받기에 이르렀고, UNESCO에서는 해마다 세계에서 문맹 퇴치에 공이 큰 사람들에게 '세종대왕 문맹 퇴치상'(King Sejong Literacy Prize)을 주고 있고, 이 상의 명칭이 세종대왕에서 비롯된 것은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이 가장 배우기가 쉬워 문맹자를 없애기에 좋은 글자임을 세계가 인정했기 때문이라네요.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한글을 만들어 주신 세종대왕님께 감사합니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속리산 세조길  (0) 2018.10.21
잣향기 푸른숲  (0) 2018.10.14
여주 마감산  (0) 2018.09.30
의왕 백운산  (0) 2018.09.23
김천 오봉저수지  (0) 2018.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