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모락산둘레길(義王)

영대디강 2023. 8. 6. 05:16

경기도 의왕시 왕곡동의 무지개아파트 옆 사거리 길을 건너서 모락산 등산로 입구에 들어서면 모락산 둘레길 종합안내판이 오늘 걸어야 할 길을 안내한다. 요즘은 연일 섭씨 35도 이상의 폭염경보가 수시로 스마트폰에 울려도 그렇다고 그냥 에어컨 밑에 앉아 쉴 수  없으니, 내 건강은 스스로 지켜야하고 누구도 대신 해 줄 수 없음에 오늘도 습관처럼 만보를 걸어야 한다. 이곳 모락산 둘레길은 서늘하고 안전하게 약 12.6㎞로 한바퀴를 천천히 돌아들면  3시간 40분 정도 소요되는 코스이다.

조선 중엽 전주남이라는 욕심 많은 부자가 이 마을에 살았다. 하루는 이 마을을 지나던 스님이 그 부잣집에 들러 시주를 청했다. 욕심쟁이 부자 영감은 시주는 커녕 거름을 담아주며 문전박대하였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스님은 골탕을 먹이고자 마을 뒷산의 혈을 끊으면 더 큰 부자가 된다고 일러주고 돌아섰다. 전주남은 곧장 스님이 일러준대로 산의 혈을 끊으러 갔다. 이를 지켜본 며느리는 돌아서 떠나가는 스님을 시아버지 몰래 쫓아가서 공손히 쌀을 전했다. 이에 감사하며 스님은 훗날 큰비가 내리면 아이들을 데리고 뒷산으로 피하시요. 단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마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세월이 흐르고 전주남의 가세가 점차 기울던 어느날 마을에 큰 비가 내렸다. 재물이 걱정된 시아버지는 집을 떠나려 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며느리는 아들 셋만을 앞세우고 뒷산으로 올랐다. 때마침 마을에 천둥과 번개가 내리쳤다. 깜짝 놀란 며느리와 아이들은 스님이 일러준 말을 잊고 그만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그들은 모두 돌이 되어버렸다. 앞서가던 세아들의 바위는 훗날 삼형제 바위라 불렸고, 뒤따르던 며느리는 그 아래 큰 바위가 되어 지금은 당집을 지키고 있다. 이후 사람들은 전주남이란 욕심쟁이 큰 부자가 살았던 동네라하여 이 마을을 전주남이라 불렀다.

거북바위는 모락초등학교 옆을 지나는 모락산 둘레길 바로 옆에 위치해 있는데 산으로 기어오르는 거북이 형상을 하고 있다거북은 예로부터 장수의 상징이자 상서로운 동물로 알려져 있으며, 이 바위는 거북을 닮은 형상을 띠고 있어 거북바위(龜巖)라고 불려지게 되었다. 거북 형상을 한 바위에 대한 설화는 장수의 상징이자 상서로운 동물로 일려진 거북을 신성하게 여기는데서 출발하였다.

예로부터 거북은 용, 기린, 봉황과 함께 사령(四靈)으로 일컬어졌으며, 재복(財福)을 가져다 주거나 신령스러운 일을 하는 능력을 보여주는 일들이 거북을 통해 일어 난다고 믿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곳 보식골은 성나자로 마을과 모락초등학교가 있는 지역으로 큰 보식골과 작은 보식골로 나뉘는 풍요롭고 아늑한 마을이다.

오매기는 조선시대부터 원래 문화 유(柳)씨를 중심으로 문씨, 진씨, 노씨, 마씨등이 각각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이와 관련하여 다섯집 매발을 뜻하는 오막동(五幕洞)이라 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백운산과 모락산에서 흘러내려 마을 앞을 지나는 오전천의 물길이 모락산 줄기 끝자락 바위를 만나 물이 휘돌아흐르는 곳이 있는데, 사람들은 이곳 마을을 가리켜 마치 용의 머리 가운데 동네가 있다하여 용머리(龍頭里)라고 부른다.

모락산(慕落山)은 정상 높이가 385m이다. 해발 385m의 비교적 낮은 산이지만 절벽과 기암괴석, 암릉 등으로 이뤄져 있다. 조선시대 세종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이 이 산에 올라 서울을 향해 멀리 있는 궁궐을 바라보고 행하는 예를 올려 ‘서울을 사모하는 산’이라 불린다는 이야기와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이 산에서 사람들을 몰아 죽였다고 해서 모락산이라고도 전해진다

모락산 둘레길은 연 40여만 명이 즐겨 찾는 의왕의 명소 모락산의 기존 숲길과 마을 길을 잇고 단절된 등산로 구간을 정비해 완성한 12.6㎞의 산길이다. 모락산은 정상이 암벽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산으로 정상에서는 안양, 군포, 과천, 서울이 한 눈에 들어온다정상부에는 국군 제1시단 15보병연대의 전승기념비와 고인돌로 보이는 큰 바위가 있으며, 백제 석축성곽 축조의 시원양식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성곽인 모락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한데 산성의 역활은 백제시대 때 남쪽에서의 마한 침입에 대비하고 북쪽으로는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했으며 수도방위 역활을 담당했던 풍납토성의 배후 거점성으로써 큰 역활을 담당했었다고 한다.

모락산 정상에 있는 모락산성은 정상부를 감싸고 있는 산지를 둘러싼 돌로 쌓은 성으로 전체 둘레는 920m이다. 백제시대에 축조된 모락산성에 관한 안내문을 지나면 6.25 전승 기념비가 있는 넓은 쉼터가 나온다. 한국전쟁 당시 모락산을 포함한 수리산과 백운산 주변은 수도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요충지였다는 팻말이 보인다현재는 문터·치성·망대터·건물터 등이 남아있으며 경기도 기념물 제216호로 지정돼 있다.

주민들이 만든 야생화단지이다. 야생화(wildflower , 野生花)는 산이나 들에 자생하며 피는 꽃이다. 정원에 심는 여러 가지 꽃은 이 야생화에서 비롯되었다. 야생화는 양지·반양지 식물이 많다. 지구에는 약 25만 종, 한국에는 약 3,500종의 꽃피는 식물이 있는데, 이중 거의 대부분이 야생화이다. 야생화는 습도나 온도의 영향을 받아 식물상의 변화를 가져 온다. 도시와 농장이 커지면서 시골은 좁아지고 야생상태는 점점 사라지고 있어 일부 야생상태의 지역과 그곳의 식물들을 국립·주립·지방 공원이나 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임영대군이 세조의 왕위 찬탈에 충격을 받아 매일 이 산에 올라 서울을 향해 "망궐례"를 올려 '서울을 사모하는 산'이라는 뜻으로 '사모할 모()', '서울이름(중국의 낙양) 락()'으로 하여 '모락산'이라 부르게 되었다는데, 둘레길 곳곳마다 마주치는 바위마다 임영대군의 그 충절이 맺혀 있는것 같이 느껴진다.

걷다보니 비오듯 땀이 많이 흐르고 목이 마르다. 수도꼭지에서 흘러내리는 약수를 만나는 곳이 보수골약수터이다. 또한 정상에서 가까운 곳에 절터 약수터가 있는데, 이곳 역시 임영대군이 창건한 경일암의 옛터로 추정된다. 지금도 흙바닥에서 건물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발굴조사 당시에는 기와, 토기, 자기 파편 등이 여러 점 발견됐다. 현재 등산객들을 위한 쉼터와 팔각정이 마련됐다

약수터에는 둘레길을 걷는 등산객들을 위한 쉼터와 팔각정이 마련되어 있다. 시원하게 마시려고 물병을 얼려 들고 길을 나섰는데, 병과 함께 얼어있는 얼음이 녹아 물이 되지않아서 약수터의 물과 섞어 겨우 마시며 타는 갈증을 삭히우고 있다. 

출입문이 닫혀있는 성나자로 마을 입구이다. 이곳 모락산 일원(오전동 산89-1번지외 3필지)은 재단법인 천주교 수원교구 유지재단 소유의 사유림으로 모락산 둘레길 조성에 협조해줘 이 길을 개설했으니, 이 산책로를 걷는 등산객들은 사유지를 훼손하지 말라는 안내표지판이 여러개 곳곳에 서 있다. 

본 안내판은 성나자로마을에서 기증한 식물표본을 토대로 의왕시청에서 제작하였다는 안내판 문구에는 애기둥글레, 박하, 참나리, 좀싸리, 노루오줌, 골무꽃 등이 있어서 그냥 걷기만하는게 아니라 새롭게 공부하며 걸으니 일거양득으로 더 좋다. 문득 옛 고교시절에 배운 군자의 삼락 중에 첫번째인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배우고 또한 익히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로 머릿속이 채워진다. 

지구의 온난화 현상으로 연일 계속되는 35°c 이상 올라가는 폭염에 방송에서는 온열질환으로 몇명이 사망했다는 뉴스를 접하게 되고, 행안부와 지자체의 폭염경보 안내문자도 쉴새없이 날아온다. 안타까운 소식은 2023 새만금 제25회 세계 스카우트 잼버리 대회에서 가장 많은 4,000여 명이 참가 했다는 영국은 철수한다는 소식도 들려 온다. 그저 지켜봐야하는 마음이 많이 안타깝고 힘들다. 

모락산 정상에는 한성기 백제시대에 군사적 목적으로 설치된 산성터가 남아있다.  모락산이란 지명은 임영대군 전설에서 유래되었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자 임영대군은 이곳으로 피신해 살았는데, 산 아래 초막을 짓고 매일 이 산의 제일 높은 봉우리 큰 바위에 올라 망궐례(望闕禮)를 올렸다고 한다. 이후 후손들은 한양을 그리워하고 조선을 걱정하던 임영대군을 기리며 모락산이라하고 그 바위를 사인암(舍人岩)이라 이름지었다.

임영대군은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 태어난 넷째아들이다, 이름은 구(1420 ~ 1469) 시호는 정간이며, 그의 묘와 사당이 이곳 모락산의 능안마을에 있다. 임영대군의 묘가 이곳에 위치하게 된 연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425년 소헌왕후가 청계사 서쪽에 있는 원릉암을 왕실 원찰로 삼고 중창한 뒤 임영대군과 함께 왕래하면서 인연을 맺은 듯 하다. 수양대군을 피해 이곳 모락산 기슭에 내려와 숨어 지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마을이 임금의 능 후보지였다 하여 능안말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 둘레길은 맨발로 걷는 사람들이 많다. 숲속은 시원스레 울어주는 매미소리도 청아하고 ,숲사이로 불어오는 바람결은 없지만 그래도 숲그늘 속에서 야자매트가 깔려 있는 길이라서 촉감도 부드럽다. 

모락공원의 유래 안내판에는 이곳이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왕륜면 오마동, 전주동, 등곡동이었는데, 1914년  수원군 의왕면 오전리로 변경되었고, 1936년에는 수원군 일왕면 오전리, 1949년 화성군 일왕면 오전리, 1964년 시흥군 일왕면 오전리, 1980년에는 시흥군 의왕읍 오전리, 1989년에 의왕시 오전동이 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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