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표암봉(慶州)

영대디강 2023. 9. 3. 05:07

신라천년의 고도(古都)인 경주시는 이 지역의 어디라도 문화재가 아닌 곳이 없지만, 경주시 동천동의 이곳 표암봉(勡巖峰)이 포함된 경주 금강산(金剛山)은 신라의 건국, 종교, 설화 등 다양한 문화유산을 포함하고 있어서 2022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하여 관리되고 있다. 표암(勡巖)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된 BC(기원전) 69년 진한(辰韓) 6촌장들이 자제들을 데리고 모여서 신라건국을 논의한 알천언덕이며, 화백(和白)이라는 민주 정치제도의 발상지이다. 신라시대에 국가대사를 민주적으로 논의하는 신령스러운 장소로 이곳 금강산이 회의장소이기도 하다

표암봉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무덤은 신라 제4대 탈해왕(脫解王, 57 ~ 80 재위)의 왕릉으로 알려져 있다. 탈해왕은 석씨(昔氏)로 이름은 탈해이고, 왕호는 이사금(尼師今)이다. 탈해왕은 62세때 신라 제3대왕인 유리왕(儒理王)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23년간 재위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왕이 다파나국(多波那國 또는 龍城國)의 왕과 왕비사이에서 알(卵)로 태어나 불길하다하여 보물과 함께 궤짝에 넣어 왜국주변의 바다에 버려졌다가 신라로 떠 내려와 성장했다는 설화가 실려있으며, 탈해왕이 세상을 뜨자 성(城)의 북쪽인 양정(楊井) 언덕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신라 탈해왕릉(新羅 脫解王陵)이라는 비석옆에 '경주 탈해왕릉'의 안내표지판이 서 있는 이 능은 경주 금강산 남쪽 자락에 있다. 봉분을 장식한 석물은 언제 누가 놓았는지 확인되지 않으나, 왕릉은 1974년에 내부 구조가 굴식돌방무덤인 것을 확인하였다. 능의 주변에는 신라 화백회의의 근원이 되는 장소인 표암과 이를 기리기 위하여 1925년에 건립한 표암재(勡巖齋)가 있다. 또한 탈해왕의 제향(祭香)을 드리기 위하여 1980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온 숭신전도 있다.

숭신전(崇信殿)은 신라 최초의 석씨(昔氏)왕인 4대 탈해왕(脫解王, 57 ~ 80 재위)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지은 전각이다. 조선의 광무2(1898)에 군수 권상문의 제안으로 월성 안에 처음 지었고, 1906년에 숭신전이라는 편액을 받았다. 1980년에 탈해왕릉 옆에 위치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박씨의 시조인 박혁거세를 모시는 숭덕전(崇德殿), 김씨의 시조인 미추왕을 모시는 숭해전(崇惠殿)처럼 이곳이 석씨의 시조인 탈해왕을 모시는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숭신전 앞에 홍살문에서 영녕문 경엄문을 차례로 지나면 숭신전으로 이어진다. 영년문 밖에는 1921년에 세운 신라석탈해왕비(新羅昔脫解王碑)가 있다.

신라의 '신라석씨8왕(新羅昔氏八王)'의 비문이다. 신라석씨는 제4대 석탈해왕 23, 제9대 석벌휴왕 12, 제10대 석내해왕 34, 제11대 석조분왕 17, 제12대 석첨해왕 15, 제14대 석유례왕 14년, 제15대 석기림왕 12년, 제16대 석흘해왕 46년으로 신라석씨는 재위통산 8173년 간 신라를 통치하였다는 기록이다. 

2011년 표암의 암벽면에서 암각화와 213자의 음각 명문이 발견되었다. 암각화는 인물과 삼층탑, 당간지주(幢竿支柱) 등이 그려져 있어 사찰의 모습이다. 명문의 내용은 천보2(天寶2) 만월부인(滿月夫人) 간자상세야(干子上世也)’로 확인된다. 천보 2년은 제35대 경덕왕 2(743년)에 해당되는데, 이는 곧 경덕왕비 만월부인이 이곳 표암이 신라역사에서 차지하는 신성성에 기대어 사찰도를 그려놓고 대를 이을 아들 얻기를 부처님께 빌었다는 내용으로 풀이된다.

표암은 신라건국을 위해 사로 6촌장이 화백회의를 열었던 장소이고, 신라 불교의 전파와 공인, 이차돈의 순교와 관련된 백률사가 자리하고 있다. 또 금강산 전역에 걸쳐 분포하고 있는 고분들은 신라 귀족층의 묘지인 굴식 돌빙무덤으로 당시 신라인들의 사후세계관을 보여주는 중요한 고고학 자료이다. 이외에도 탈해왕릉, 순신전, 굴봉사지 석조사면불상, 동천동 마애삼존불산좌상, 표암을 포함하여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중인 이차돈 순교비와 금동약서여래입상도 백률사에 있던 것이다금강산은 고대부터 사용되는 고유명칭 이었으나, 1961년 이후 강원도 금강산과 구별하여 소금강산(小金剛山)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경주이씨시조알평경모비(慶州李氏始祖偉謁平景慕碑)가 세워져 있는 경주 금강산은 신라의 중요한 일을 대신들이 함께 회의하는 사림지(林地) 중에 한 곳이며, 황경오의(皇京五儀)에 해당되는 신성한 장소로 여겨지는 곳이다. 특히 표암봉은 삼국유사에 의하면 사로 6촌장 중 알천 양산촌장 알평의 탄강지(誕降地)로 알려져 있다이곳은 신라가 건국되기 이전부터 신라사의 주요한 역사/ 문화적 전환기마다 기록이 나타나는 장소이며, 다양한 문화유산이 분포되어 있다.

광림기(光臨基) 전각이 세워져있는 이곳은 진한 6촌 가운데 알천양산촌장(閼川楊山村長) 알평()이 이 바위에 내려와 세상을 밝게 하였다하여 표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표암은 밝은바위혹은 박바위라는 뜻이다. 동경잡기(東京雜記)에는 박씨를 심어서 박넝쿨이 이 바위를 온통 덮었으므로 박바위라 불렀다고도 한다.

광림대(光臨臺)의 석혈(石穴)이다. 이 석혈은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의 시조인 알평공()이 하늘에서 내려와 처음으로 목욕한 곳이라고 전해온다. 이곳은 경주이씨(慶州 李氏) 혈맥(血脈)의 근원지인 동시에 신라건국의 산실로서 광명이세(光明理世)의 이념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큰 뜻을 밝히고, 신라의 화백회의(和白會議)가 시작된 유서 깊은 곳이다. 이곳 표암 일대는 경상북도 기념물 제54호로 지정되어 있다.

표암에 서서 내려다 본 경주의 시가지 모습이다. 992년간 신라의 수도였던 곳으로 경주의 역사는 곧 신라의 역사이다. 신라는 경주평야에 있던 여섯 부족의 촌장들이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면서 건국된 나라이다. 그 후 밖으로는 주변의 여러 나라들을 통합하였으며, 안으로는 정치체계를 발전시켜 나갔다. 제22대 지증왕대에는 국호를 신라(新羅)로 확정지었으며, 제23대 법흥왕대에는 불교를 공인해 찬란한 불교문화의 막을 올렸다. 이처럼 국가의 면모를 일신한 신라는 그 기세를 몰아 고구려, 백제를 병합하고 676년에는 삼국통일의 성업을 달성하였다. 통일국가 신라는 평화로움 속에서 눈부신 문화적 발전을 이룩해 왔다는 자랑스러운 역사를 지닌 곳이다.

표암 유허비(勡巖 遺墟碑)이다. 박바위(勡巖)는 경주이씨(慶州 李氏) 시조 알평공(謁平公)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곳이다. 이조 순조(純祖) 4(1804)에 후손 좌의정 경일(敬一)이 현인(賢人)을 공경하고 조상을 추모할 곳이라는 내용으로 비문을 짓고, 형조판서 집두(集斗)가 글을 쓰고, 장령 진택(鎭宅)이 감독하여 이 비()를 건립하였다. 원래 표암 앞을 흐르던 동천(東川)가에 있었으나, 홍수의 피해를 입게되어 1879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유서깊은 사찰인 백률사는 경주시 금강산(金剛山)에 있는 신라의 삼국통일 전후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佛國寺)의 말사이다.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이 절의 대비관음상(大悲觀音像)은 중국의 공장(工匠)이 만든 것이라는 고전(古傳)이 있고, 또 이 관음상에 얽힌 영험이 693(효소왕 2년)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경내에 있는 자연암벽에 조각되어 있는 마애탑(磨崖塔) 높이 3.2m 되는 삼층탑으로 특이한 양식을 지니고 있으며, 상륜부(上輪部) 온전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는 백률사 대웅전 앞에 탑을 건립할 자리가 없어 소금강산에 만들었다고 전하고 있다.  소금강산 정상에서 북쪽 30m 아래 지점에는 마애삼존좌상(磨崖三尊坐像) 있는데, 손이나 얼굴 모습을 식별할 없을 정도로 마멸되어 있다. 아미타불(阿彌陀佛) 좌우에 협시보살(脇侍菩薩) 있으나 풍화가 심하여 조각수법을 파악하기 어렵다.

동천동과 이웃한 황성동은 내가 경주에 출장 올 때마다 새벽시간에 만보걷기를 위해 반드시 찾아오는 곳 황성공원(皇城公園Hwangseong Park)이 있다. 황성공원은 공원 스포츠 시설 단지로 경주시민운동장, 경주축구공원, 경주실내체육관 등의 스포츠 시설이 설치되어 있고, 숲으로 조성된 공원이 갖춰져 있다. 경주시에서 열리는 많은 행사들이 곳에서 진행된다. 사이로 자동차 3~4 정도 너비의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과 산책로가 있으며, 산책로를 따라 30 종류의 운동시설도 있다주변에 있는 서천과 북천 둔치에 조깅코스와, 인라인 스케이트, 자전거를 타고 다닐 있는 10km 산책로가 있다남쪽으로는 알천(북천)을경계로 성건동과 마주보고있고, 개인사유지가 공원의 반을 감싸고 있으며 925 지방도와 7 국도를 경계로 각각 황성동 시가지와 동천동 시가지가 마주보고 있다.

황성공원의 상징적인 동상 김유신(金庾信, 595 ~ 678 8 18(음력 71))  신라 화랑의 우두머리였으며 태대각간(太大角干)이었고 신라에 귀순한 가야 왕족의 후손으로서,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통일하고 당나라도 격퇴시켜 삼국 통일을 이루는 데에 중추적인 역할을 신라의 장군이며, 정치가이다. 신하로서 왕으로 추존된 유일한 인물이며, 무열왕의 즉위 삼국 통일 전쟁 등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받아 왕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순충장렬흥무대왕(純忠壯烈興武大王)으로 추존되었다. 신라를 포함하여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성신(聖臣주석지신(柱石之臣)으로 추앙받았다. 또한 관창, 사다함과 함께 신라의 3 화랑이다.

지난주에 찾았던 충북 진천의 길상산()은 고려 때 태령산()으로 불렸고, 김유신의 태를 안치했다하여 신라 이래로 김유신사()를 세워, 봄·가을로 국가에서 향()을 내려 제사하게 했음이 전해지고 있다. 김유신은 금관국 수로왕의 12대손이다. 금관국의 마지막 구형왕은 법흥왕 19(532) 명의 아들을 거느리고 신라에 항복했으며, 신라의 진골귀족으로 편입되었다. 구형왕의 막내아들 김무력은 무장으로 활동하며 백제와의 전쟁에서 성왕을 잡아 죽이는 공을 세웠고, 김무력의 장남이었던 아버지 김서현은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 지냈다. 어머니 만명은 진흥왕의 아우인 숙흘종의 딸이다.

꼰대들 어린시절에 누구나 불렀던 동요 '얼룩 송아지' 노래비 앞에서 박목월 시인을 만난다. 박목월(朴木月, 1915.1.6 ~ 1978.3.24) 한국 시문학의 대표적인 작가이며, 토속적 이미지의 작품을 많이 남겼다. 청록파 시인으로 조지훈, 박두진과 함께 발간한《청록집》이 특히 유명하다. 혁거세의 후손인 경주 박씨이며 본명은 "영종(泳鍾)"이나, 시를 무렵 본인의 필명을 "목월"(木月) 지었다. 목월의 아버지 박준필은 반대하였다. 그의 나이 18세인 1933, 개벽사에서 발행하는 잡지 《어린이》에 동시 「통딱딱 통짝짝」이 뽑혔고, 같은  《신가정》 6월호에 그의 「제비맞이」가 당선되어 동시를 주로 쓰는 시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경주 이씨의 후손인 이임수의 '풍경소리' 이다. 사가(思柯) 이임수 경주 동국대 교수는 생전에 봄을 유독 사랑했던 시인으로, 그는 가고 없어도 그가 남긴 속에는 봄이 활짝 피었다. 이임수 유고 시집 ‘모두가 꽃이었던 사람과 시간들’이 최근 현대불교문인협회에서 발간됐단다시집에는 ‘가족이야기’와 ‘아름다운 시간’을 추억하고 ‘항암 치료’를 받던 이야기, ‘옛집’ ‘손님’ ‘비둘기’ ‘나무’ ‘보리밭’ ‘갈라진 붓’ ‘마지막 바람’과 ‘살아간다는 거’에 관한 시들을 나즈막히, 읊조리듯 따뜻하게 썼다.

황성공원에 우뚝 선 황룡사 9층목탑은 신라 선덕여왕때 자장율사의 건의로 백제장인 아버지와 신라장인들이 국태민안(國泰民安)의 염원을 담아 선덕여왕 12(643)부터 3년간의 조성기간을 거쳐 높이 82m의 웅대한 9층탑을 완성하였다. 여러 차례 중수와 수리를 거치다가 고려 고종 25(1238)에 몽고의 침입으로 가람 전체가 불타면서 목탑도 함께 소실되었다. 1976년부터 실시된 발굴 조사를 통해 목탑 규모는 한 변의 길이가 22m인 정방형의 형태로 바닥면적은 490이다.  

황성공원은 새벽 이른시간임에도 경주시민들은 거의 줄지어 걷는 수준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무척 많다.  많은 지역을 출장으로 일하고 어느 지역이든 상관없이 새벽시간에 만보걷기를 해 온 경험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운동하는 모습은 이곳 경주가 유일하다. 아마도 천년의 역사 속에서 사로국이 주변지역에 대한 정복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면서 그 기백이 자손들에게도 이어지는 것 같다. 통일신라 이후의 전성시대에는 17 8,936호의 인구가 거주하는 대도시로 발전하였으며, 이러한 모습은 각종 유적에서 그 대략을 짐작할 수 있으나, 신라의 쇠퇴로 왕도로서의 영화는 사라지게 되었단다. 이곳에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가 두어져 6부지역을 위시한 인근의 여러 지역이 합속되었다는 역사가 이곳 종합운동장에 서려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맥문동(麥門冬, Liriope platyphylla) 비짜루목 비짜루과 맥문동속의 여러해살이풀로 우리나라와 대만 일본 등에 분포하며 산지의 나무 그늘에서 자란다. 높이는 30~50센티미터 정도로서 뿌리줄기가 짧고 굵으며, 수염뿌리는 가늘고 긴데 어떤 것은 굵어져서 덩이뿌리가 된다. 잎은 짙은 녹색으로 뿌리줄기에서 뭉쳐나고 길이 30~50센티미터의 선형으로서 밑부분이 좁아져서 잎집을 형성하고 11-15맥이 있다. 꽃은 여름에 연한 자주색으로 피는데 마디마다 3-5개씩 모여 달려 길이 8~12센티미터의 총상꽃차례를 이룬다. 작은꽃자루는 길이 2~5밀리미터이고  밑부분 또는 중앙 윗부분에 관절이 있다. 꽃잎은 6개이고, 수술도 6개이며 수술대가 꾸불꾸불하게 굽었다. 씨방은 상위이고 암술대는 1개이다. 열매는 장과로서 구형이며 일찍 껍질이 벗겨지는데 흑색의 씨가 노출된다.

황성공원에서도 나라사랑의 모습이 높이 솟아 보이는 '충혼탑 지킴이의 생각'이다. "이곳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 영령들께서 고이 잠들어 계시는 성역이므로 정숙한 마음으로 참배하시기 바랍니다. 추모 분위기 조성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여러분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합니다. 첫째 고성방가, 침뱉기, 음주행위는 삼가주세요. 둘째 애완견을 동반하거나 운동을 삼가주세요. 셋째 충혼탑 시설물 보호 및 관리에 함께해 주세요. 넷째 여러분의 작은 배려가 모두를 미소짓게 합니다."라고 안내표지판에 쓰여 있다.

이천년 동안 한결같이 두둥실 떠 오르는 아침해를 바라본다. 이 지역은 상고시대에는 진한 12국 중 사로국(斯盧國)이었으며, 삼국시대에는 BC 57년 신라 건국 후 992년간 왕조를 이어 온 수도이고 당시에는 서라벌 또는 계림이라고 불렸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민족문화의 본류를 형성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태조 18년(935년)에 경주로 칭하였다가 987년 동경으로 개칭하였으며 1012년에 다시 또 경주로 개칭하였으며 1308년 계림부로 개칭하였다. 조선시대에는 1413년 행정구역은 경주부로 개칭하였으며 1895년 경주군으로 개칭하였다. 지금은 경주시에서 바라보는 아침해가 2천년의 그 세월을 미루어 추억하게 한다.

경주시의 동쪽은 동해, 서쪽은 청도군과 영천시, 남쪽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북쪽은 포항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8°58′∼ 129°31, 북위 35°39′∼ 36°04′에 위치한다. 면적은 1,324.41㎢이고, 인구는 25 9773(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4개 읍, 8개 면, 11개 행정동(44개 법정동), 305개 행정리(142개 법정리)가 있다. 태백산맥의 남단으로 경상계(慶尙系)의 화강암이 관입한 지질을 이룬다. 지형은 주사산맥(朱砂山脈) · 금오산맥(金鰲山脈) · 동대산맥(東大山脈) 등 세 줄기 태백산맥의 지맥이 서부 · 중부 · 동부를 각각 남북으로 주행하여 산지지형을 이루고 있다. 주요 산으로는 도덕산(道德山, 703m) · 구미산(龜尾山, 594m) · 금오산(金鰲山, 466m) · 황룡산(黃龍山, 664m) · 토함산(吐含山, 745m)과 주사산(朱砂山, 622m) · 소두방산(315m) · 천룡산(天龍山, 495m)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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