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Dalat(越南)

영대디강 2023. 6. 4. 05:03

영원한 봄의 도시라는 Dalat(달랏)이다. 제목을 달랏(越南)이라고 올려 놓고보니, 아재개그를 즐겨하는 나에게 "달라? 뭐가 달랏?" 그렇게 말장난으로 어지러울까 싶어서 Dalat(越南)이라고 바꿔 올렸다. 이곳은 비교적 최근에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고있는 관광지로 떠오르는 지역이기 때문에 어쩌면 조금 생소한 지역일  수 있단다달랏(Dalat) 베트남 럼동성의 성도(省都), 해발 1500m 높이의 럼비엔(Lâm Viên) 고원(高原)위치하고 있어 연평균 기온이 15도에서 24도 사이의 서늘한 곳이다2015기준으로 인구는 40만명이 살고 있으며, 당초 지역의 인구는 1999 12만명 → 2009 20만명 → 2015 40만명으로 증가에서 보듯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달랏(Dalat) 라틴어: Dat Aliis Laetitiam Aliis Temperiem(“어떤 이에게는 즐거움을, 어떤 이에게는 신선함을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에서 왔으며, 프랑스 식민지 정부가 달랏(Đà Lạt)이라는 이름을 정식으로 사용하면서 달랏(Dalat)이 도시명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먼저 크레이지 하우스를 찾았다.  베트남의 가우디라는 별명을 얻은 베트남 총리의  ' 비엣 응아'가 기존의 건축양식을 파괴하고 숲속의 이미지를 형상화해서 기괴스럽고 특이한 구조로 지은 건축물이며, 마치 동화속 궁전 같은 건축물로 어린이나 어른이나 모두 흥미를 가지고 둘러볼 만하는 평이다.  곳의 1층은 갤러리와 게스트하우스가 있어서 숙박도 가능하다고 한다.

랑비앙 전망대이다. 6인승 케이블카에 4명씩 마주앉아 랑비양 전망대(해발 2,167m) 올랐다. 오르는 길목에는 케이블카 창밖으로 보이는 곳마다 직선으로 쭉쭉 뻗은 울창한 아름드리 소나무 숲이 우리를 반겨 주는 듯했다 위에 오르니 달랏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포토존에서 사진도 찍고, 커피도 주문하여 마시면서 한가로이 달랏 시내를 조망하면서 여유 있게 한시간을 보냈다. 랑비앙 산에 얽힌 전설은 마치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사랑 이야기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에 남아 있다.

랑비앙전망대의 비석에 있는 전설을 옮긴 글이다「옛날 산악지대에는 라트족(tộc Lát) 족장에게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칠족(tộc Chil) 족장의 비앙이라는 딸을 사랑했다. 부족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비앙은 랑과 결혼할 없었다. 그래서 사람은 사랑을 지키기위해, 엄격한 관습에 반대하며 죽을 수 밖에 없었다. 랑과 비앙이 죽자 비앙의 아버지는 후회를 하며, 라트족, 칠족, 스레부족을합쳐서꼬호족으로 통합했다. 그때부터 모든 부족의 젊은 남녀는 쉽게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게된다. 사람의 무덤은 차츰 옆에놓여 있는 높은 개가 되었고,마을 사람들은 산의 이름을 랑비앙으로 지었다.(네이버지식백과)

우리 일행은 1시간 동안 랑비앙 전망대에서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 놓은 이곳저곳을 두루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오밀조밀하게 정말 꾸며 놓아서 랑비앙 산의 어디를 가든 그곳이 바로 포토존이다. 단체사진을 찍자며 이 도시의 한가운데 위치한 둘레 약 5Km의 쑤엉흐엉 호수-춘향(春香)호수를 내려다보며 포즈를 잡았는데, 여기서는 너무 높아서 그런지 잘 보이지 않는다. 달랏에 머무르는 사흘동안 매번 코스를 바꿀때마다 이 호수를 중심으로 관광버스가 움직여서, 쑤엉흐엉 호수 가운데 커다랗게 만들어 놓은 핑크빛 연꽃을 열번도 훨씬 넘게 많이도 바라보아서 눈에 익은 곳이라 기억에 오래 남는다는 생각이 든다.

달랏에서는 어딜가든 마주치는 곳마다 비닐하우스가 바다처럼 넓게 자릴잡고 있으며, 여기서도 산아래로 즐비한 비닐하우스가 보인다. 자랑스런 한국인- 김진국. 대구효성여대에서 화훼장식학을 가르치던 김진국 교수는 1990년대 초반 '2 정착지' 찾아 동남아 10개국을 2년간 돌아다니다가 1994 달랏을 찾았다. 현지 관공서와 담판을 지어 산비탈 돌산 개간을 허가받았으며, 움막을 짓고 삽과 괭이로 바위를 깨고 돌을 날랐다. 8 동안 어깨가 으스러지고 손바닥이 까지는 험난한 작업으로 5000평을 계단식 밭으로 개간했다. '한국에서 미친 노인' 점점 '달랏의 보배' 됐다. 교수는 회사를 만들어 자신이 생산한 화훼·채소는 물론 이웃이 생산한 농작물도 사들여 대도시에 출하해 줬다. 국화와 카네이션의 일본·싱가포르 수출길도 열어준 그는 달랏을 꽃의 도시로 만들었고, 상징적으로 달랏의 아버지가 되었단다.

한국인 김진국 교수가 전파한 비닐하우스로 달랏의 화훼·채소 농가는 부유해졌고, 이곳의 집들은 그림엽서처럼 예쁘게 변해갔다. 베트남 1인당 GDP 1000달러 정도지만 달랏의 농가 수입은 4000~5000달러에 이른다. 김진국 교수 도움으로 달랏대학교에는 2005 농과대학, 2006 ()연구센터가 만들어졌다. 2004년엔 한국어학과를 개설해 작년 봄까지 졸업생 220여명을 배출했다. 달랏대는 지금 우리나라 26 대학과 자매결연을 맺어서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다.

꽃의 도시인 달랏을 상징하는 달랏 플라워 파크 정문이다. 달랏은 정말 꽃이 많은 도시가 맞다. 온실의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하는 모습도 그렇고, 이곳은 기후가 정말 좋고 식물들이 자라기에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 준단다. 실제로 달랏의 많은 별명 중 하나는 '천꽃의 도시라고 한다. 달랏 중심가 쑤엉흐엉호수 바로 옆에 위치해 있어서 접근성도 좋고, 300종류가 넘는 꽃들이 전시되어 있어서 그야말로 꽃의 천국이다.

신기하게도 분재된 나무들이 우리 사람의 키보다 더 크다. 분재(盆栽) 한자만으로는 '그릇 안에 묘목을 담는 ' 또는 '화분에서 재배하는 ' 뜻하지만, 관용적으로 '나무를 화분에 심어 난쟁이로 자라게 하는 , 또는  결과물' 가리킨다. 그러므로, 식물이 환경에 맞춰 성장하는 성향을 극단적으로 이용해서 작게 만든다. 작고 얕은 화분을 척박한 흙으로 채우고, 바람과 햇빛이  드는 곳에 두어 생장을 억제한다. 분재를 만드는 나무는 특정한 품종이 아니다. 분재나무를 넓은 땅에 심어 영양분을 충분히 주면 다시  나무로 자라난다. 분재의 잎과 가지가 작아지는 이유는 세포분열이 억제되었기 때문이다.

관광명소인 달랏기차역은 베트남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차역으로 알려져 있단다프랑스 식민지시대에 건축되어 프랑스 건축 양식 영향을 받아 세개의 뽀족한 지붕이 하늘로 솟아있는 독특한 디자인으로, 묘하게 서구의 건축과 동양적인 멋을 생각케 하는 건물이다아름다운 건물로 기차역을 배경삼아 사진을 담는 여행객들로 붐비고 있다. 실제로 여기서 7km 구간에 이르는 관광열차가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관광열차를 이용하려는 여행자들에게 아주 인기있는 곳이란다.

노부부가 열차에 올라 사진을 찍는다. 우리가 어린시절에도 접하지 못했던 이국적인 열차의 모습이다. 이곳은 우리가 생각하는 여름날이라서 사계절이 무더운 동남아 도시이긴 하지만, 고도가 상당히 높은 지역이라 그런지 아침저녁으로 생각보다 더 쌀쌀하게 느껴진다. 습관적인 걷기를 즐기는 버릇때문에 아침일찍 일어나 호텔밖으로 새벽에 나가면 즐비한 비닐하우스 옆길을 걸으면서도 춥게 느껴진다. 우리 여행객은 긴 팔 옷을 반드시 챙겨서 입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곳 현지인들은 밤이 되면 오리털 패딩을 입고 다니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으니 그렇다.

이곳이 이틀밤을 머물게 될 나달랏 호텔이다. 2017년에 지어진  숙소(LADALAT HOTEL) 달랏 여행을 위하여 아주 스마트한 선택이란다. 이유로는 별다섯개의 5성급 숙소는 공항에서  35km 거리에 있어서 쉽게 이동할  있으며, 달랏 필수 관광 명소에 손쉽게 접근할  있는 편리한 위치를 자랑한단다. 이곳은 피곤하고 지친 여행자들을 기운나게 하기위한 우수한 서비스와 모든 필수 시설을 제공한단다. Wi-Fi (무료/ 객실), 24시간 룸서비스, 24시간 경비 서비스, 일일 청소 서비스, 택시 서비스 등과 같은 최상급 편의/부대 시설을  숙소에서 즐길  있단다.

호텔앞 분수대에는 조각된 여인들이 악기를 들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멋지다 . 이 숙소에는 최고 수준의 편의성과 편안함이 갖춰져 있단다. 일부 객실에서 무료 , 타월, 카펫바닥, 마룻바닥, 옷걸이 등을 제공하고, 실내 수영장 등과 같은 멋진 여가 시설/활동을 즐길 있어 잊을 없는 추억을 만들 있단다. 숙소(라달랏 호텔) 달랏 여행객의 스마트한 선택이 있단다. 바쁜 일상을 벗어나 매순간이 편안한 휴식이 것이란다. 실내 샤워기에 급수문제로 데스크에 전화를 했더니 금방 여직원 두명이 달려와서 조치해 주는 걸 보면서, 이곳에서 이틀밤을 지내어 보니 사실이 그렇다는 걸 확실하게 체험했다. 

달랏 중앙시장, 야시장이다. 어느 관광지는 지역의 특징을 보기위해 시장을 찾아가게 되며, 그리고 야시장이 발달되었다면 더욱 흥미로운 곳이 되곤밤이라는 특성상 사람들이 많이 몰리고, 여유를 가지고 분위기와 쇼핑을 즐기기 때문이다달랏도 40만이 넘는 달랏시민과 몰려든 관광객으로 인해 전통 시장과 야시장이 발전했다. 달랏시장 풍경은 우리나라 재래시장이니 크게 차이없어 보인다. 시장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들르고, 판매하는 상품들이 조금 다를 전체적인 포맷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다.

이곳 낮에는 농산물과 같은 달랏에서 나오는 특산품들이 주로 거래되기 때문에 베트남 특유의 거래 문화가 강하게 지배한단다그렇지만 야시장이 되면 여느 야시장과 마찬가지로 보다 조리된 식사, 식품 판매가 늘면서 낮처럼 흥정의 거래보다는 조금 즐기는 분위기로 변한단다. 이곳도 베트남 다른 관광지처럼 호갱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열심히 흥정할 필요도 있단다. 우리도 역시 달랏시장 한복판에 있는 계단에 줄지어 앉아 반짠느엉 간식을 맛보며, 길거리 음식과 노상에서 즐길 수 있는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달랏의 명소인 다딴라 폭포에 가기 위해서는 롤러 코스터를 타고 내려와야 한다. 두사람이 앉는 좌석에서 뒷사람이 조종석에 앉아 달리는 속도를 빠르게 또 느리게 조정하는 운전사가 되어야 한단다. 브레이크를 잡지 않아도 천천히 달려야 하는 중간의 두곳에는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서 무조건 싫든 좋든 사진을 찍어주고, 도착하면 먼저 사진을 찾을건지 말건지를 컴퓨터 화면을 보면서 결정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해당 사진을 찾겠다고 의사표시를 하면 한장당 3만동씩 프린터로 이렇게 출력을 해 준다. 

폭포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소리가 우렁차고 힘있게 들리는 다탄란 폭포앞에서 나는 환호한다. 달랏 외곽에 있는 다탄란 폭포는 달랏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 명소이며, 롤러 코스터를 타는 액티비티도 있고, 정말 스릴있게 재밋다. 산악지형을 따라 내려가면서 폭포를 구경하다보면, 이곳은 속세에서 벗어난 별천지임을 느끼게 해 준다. 다만, 물빛이 황토색이라서 그런지 '폭포의 물이 너무 맑아서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그런 물은 정말 아닌것 같았다.

전설에 의하면 다딴라는 또한 잎사귀로 덮인 맑은 때문에 선녀들이 목욕을 하곤 했던 폭포였다고 한다. ‘잎사귀 밑에 물이 있다 것을 모르고, 폭포를 발견했을 소수민족들은 그것을물이 있는 잎사귀 아래라는 뜻의 다땀느느하’(Đạ Tam Nnha)라고 이름 붙였다. 후에 프랑스와 킨족이 서정적인 고지에 발을 들여놓자, 말은 다띠나(Đatina) 변했고, 다음에는 다딴라(Đatanla) 변했다. 두갈래로 쏟아지는 폭포수를 상징하는 나뭇잎 모양으로 만든 잎사귀 아래 선녀들이 목욕을 한다는 조형물이 재밋다. 

베트남의 마지막 황제인 바오다이 황제의 여름별장이다. 바오다이 황제(베트남어: Hoàng đế Bảo Đại / 保大 보대, 1913 10 22 ~ 1997 7 31)는 베트남의 마지막 황제(재위:1925 11 13(정식 즉위는 1926 1 8) ~ 1945 3 11))이자 베트남국의 황제(재위: 1945 3 11 ~1945 8 23)이고, 베트남 공화국의 국가원수(재임: 1949 6 13 ~ 1955 4 30)이다. 재위기간 프랑스와 일본의 식민통치 하에서 형식적으로 황위를 유지하였다.

어쩌면 우리나라의 고종황제 역사와 매우 닮은 것 같은 베트남의 마지막 황제가 사용하던 초라한 의자에 앉아 만감이 교차함을 어쩔 수가 없다. 바오다이 황제가 아버지 카이 국왕으로부터 황제위를 물려받은 것은 13 때다. 그러나 1858 이래 베트남을 거듭 침공해 보호국으로 삼은 프랑스가 1887 라오스ㆍ크메르와 함께 베트남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연방으로 통합해버린 터라, 바오다이는 아버지가 그랬듯 이름 뿐인 국왕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는 베트남 식민지를 셋으로 나누어 북부 하노이 시티 중심의 통킹을 반보호령으로, 남부 사이공(지금의 호치민 시티) 시티 중심의 코친차이나를 직할령으로, 중부 후에 시티를 중심으로 하는 앤냄을 보호령으로 삼고 있었다. 프랑스는 앤냄의 후에를 수도로 삼은 내응우옌 왕조(구엔 왕조) 황권을 형식적으로는 인정했지만, 실제의 시정권은 파리에서 파견된 총독에게 있었다.

처음으로 맛보는 사슴고기가 식탁에 올랐다. 사슴고기 베니즌(venison)이라고도 한다. 사슴고기는 11세기 노르만 정복 당시에 영국 왕실에서 사슴을 사냥한 이를 먹던 것에서 비롯되었으며, 보통 사냥한 사슴을 대상으로  사냥감을 먹기 때문에 동물권에 대한 논란이 있다. 상당히 쫄깃거리는 사슴 고기를 먹을 그래도 두려워 것이 없단다. 사슴고기는 매우 향긋하고 맛있는 고기란다. 쇠고기보다 얇고 단백질이 많다는데, 우리팀의 여성들은 젓가락도 대지 않아서 남자들만 넷이서 소주 안주로 삼아 푸짐하고 맛있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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